‘새것은 새 부대에!’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제1원리입니다. 진리의 새 역사가 시작되는 하반기의 새로운 시작, 새로운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초심으로 돌아가 처음 사랑을 가져야 처음과 끝이 같아짐으로써 마지막이 완성될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 같은 성령’이 내려옴으로 그리스도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듯이, 말씀과 함께 ‘약속의 성령’이 내려옴으로 진리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진리의 새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꼭 필요한 진리의 새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늘의 곳간에서 옛것과 새것,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그리스도의 빛나는 승리의 왕국, 교회와 사자들, 각양 각종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보물들, 유리바닷가의 진리의 생명수, 은혜의 보좌 앞의 노래 소리, 추수의 기쁨, 천사들의 나팔, 영들의 사역, 영원한 생명 살림의 나라...등’ 의 뜻하신 영광이 이제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보여 질 것입니다. 열린 하늘로부터 ‘그리스도’를 통로(通路)로 하여, 열린 마음만큼 쏟아져 채워질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으로부터 받은 것들을 폭포수와 같이 토해내고 쏟아낼 것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진리의 복음을 받은 자는 다시 예언하게 됩니다. 은혜와 진리의 복음의 능력은 나눌수록 풍성하게 되고, 사용할수록 커지고 강해집니다.
때가 차매, 허락하심을 따라, 이제 마음껏 하늘의 영광된 능력을 가져와 채우고, 마음먹은 대로 선하게 사용하시면 ‘됩니다.’ 하다 보면 필연코 될 것입니다. 가다보면 없던 길도 만들어질 것입니다. 이전의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인해, 처음 된 자로서 나중 되지 마십시오. 처음의 마음가짐으로 무제한의 은총의 선물을 받아, 있는 것 위에 더 받아서 풍성하여 지십시오. 활짝 열린 순수한 마음으로, 피부색이나 겉모습을 보시지 않고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다윗 같은 사람, 아브라함과 같은 의인들의 복을 넘치도록 받으십시오. 그 복들을 대그룹 사역에서 충만하게 ‘채우고’, 그 복들을 소그룹 사역을 통해 ‘나누어’, 우리 함께 ‘성장’합시다. 복의 근원, 복의 통로가 되는 의인(義人),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기는 ‘의로운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의인 공동체가 세상을 살립니다. 세상의 심장인 하나님의 교회만이 희망입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만, 복과 희망과 의와 진리와 생명이 있습니다. ‘나는 처음이요 끝이고, 시작이고 마지막이며, 알파요 오메가라!’ 모멘토 모리!(Momento mori!) 처음을 알고 그리고 끝을 알아야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알게 되는 법입니다. 이 시대는 처음과 종말에 대한 진리가 사라져 버린 혼돈과 무질서의 시대입니다. 출가를 결심하게 된 한 스님의 화두처럼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처음과 끝에 관한 강론, ‘창조론’과 ‘종말론’이 강단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진리의 기준이 없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갈팡질팡하며. 그저 현세의 잠깐 뿐인 과정이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하고 불행한 인생들로 가득합니다. 이런 사태가 야기된 주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시대를 선도해야 하나, 참된 진리로 계도하지 못한 종교와 종교인, 학자와 사회의 지도자, 각계의 리더들 때문입니다. 이 와중에 다윈의 진화론 또한 절대 진리가 실종된 포스트모던 시대의 혼란을 조장하는 주범입니다. 만물이 저등한 상태에서 시작하여 ‘자연발생적 원리’를 따라 고등생물로 진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진화론자’에 따르면 천지창조는 물론 아담과 하와도 없고, 에덴도, 노아의 홍수도 없고, 죽음의 원인도 없어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역도 필요 없어지며,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도, 종래에는 하나님도 없어져 버리는 무서운 결과가 초래됩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 진리가 송두리째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처음에 박테리아와 같은 미생물로부터 진화하여 고등 생물이 되었다는 진화론자들도 그 처음의 물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답하지 못합니다. 처음과 나중을 알지 못한 채 과정만 말하는 그들은 참 진리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에게는 처음과 끝이 없습니다. 진화론은 처음과 끝이 없고, 과정만 있을 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적 시간론도 이 세상,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뿐, 시간의 끝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영원의 세계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방법, 즉 계시의 방법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의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는 불교와 그 차원을 달리합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라면, 반면에 기독교는 신이 인간을 찾아옴으로써 시작됩니다. 화두를 붙들고 스스로 깨달아 득도함으로써 성불(成佛)하는 불교와는 달리,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당신을 드러내 나타내 보이시며 깨닫게 하셔야만 비로소 알 수 있게 됩니다.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서만, 은혜로 알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며 진리입니다. 그런 영원하신 하나님을 칠, 팔십 평생을 살다가는 유한한 인생,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조차 모르는 인생이 태초의 섭리, 천지창조의 그 처음을 평생토록 연구한다 할지라도 잘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우주와 역사의 끝,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종말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어떤 사실을 알 수 있는 방법으로 두 가지의 접근 방법이 가능합니다. 첫째, ‘학술적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 학술적 접근방법은 먼저 ‘사료(史料)’를 통해 사실을 파악합니다. 역사 속에서 기록된 모든 문헌을 수집하여 조사 연구함으로써 정보를 습득하는 것입니다. 사료에 대한 연구조사가 끝나면, 그 다음에는 문헌으로 알려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구전(口傳)’을 전부 모아 조사 연구합니다. 사료에 이어 구전을 조사 연구 파악한 후에,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신화(神話)를 수집하여 파악해 보는 것입니다. 사료(史料), 구전(口傳)을 통한 후에, 만들어낸 이야기인 신화(神話)에 매달려 천착할 수밖에 없는 한계, 그 이상 그 어떤 방법으로도 더 이상은 사실에 접근할 수 없는 방법이 학술적 접근방법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는 이와 차원을 달리하는 특별한 두 번째 방법이 있습니다. 두 번째, 사실에 대해 알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바로 ‘성령으로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학술적 접근방법의 한계를 뛰어넘는 확실한 대안은 바로 ‘영적 접근 방법’뿐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합니다. 만물의 시작과 끝, 천지창조로부터 앞으로 되어 질 미래의 장래사와 종말에 이르기 까지 모든 진리를 깨닫게 될 수 있는 것이 이 같은 ‘성령의 방법’입니다. 가장 분명하게 처음과 나중과 과정까지, 만사를 관통하여 알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하신 아들 예수를 통하여 보내시는 성령으로만,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만물의 처음과 끝과 과정의 섭리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 찾으시는 이스라엘의 잃은 양들, 주 예수께 잡힌바 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깨달아 알게 하시는 은혜’가 베풀어집니다.
주 예수께 잡힌바 된,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우리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예수께 잡힌바 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깨달아 알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나는 이 세상에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노라.’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 가느니라.’ ‘지혜는 그 자녀로만 깨달아 옳다 인정함을 받느니라,’ 이 세상에 항상 ‘낮선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보내신 아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만 알아보고, 영접할 수 있으며, 그로인해 영원한 생명의 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낯선 의(alien rightness)’란 ‘나의 밖’으로부터, 이 ‘지구 밖’인 외계(alien), 곧 하늘 위로부터 수여되는 의(義)를 말합니다. 본래 ‘우리의 의롭게 됨’의 ‘칭의(稱義)’의 근거는 ‘우리 외부’에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의로우심’에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의로움만이 칭의의 완전한 공로적 근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값없이 우리에게 수여되는 ‘낯선 의’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낯선 모습으로 나타난 낯선 사람을 영접함으로써 주어지는 ‘믿음의 의’입니다. 이는 낯선 사람의 모습, 목수 요셉의 아들로 오셔서 자기를 낮추사,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하나님의 아들,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의로서 종교개혁자들이 외치는 ‘전가된 의’입니다. 이 ‘낯선 의’는 자기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는 ‘공적의 의’가 아니라, 나의 밖으로부터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지는 보냄의 역사로서 주어지는 ‘은혜의 의’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지는 이 ‘낯선 의’는 이 세상에는 언제나 낯설기 때문에, 다시 말해 누구나 알아볼 수 없도록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성령의 알게 하시는 은혜’를 통해서 깨닫는 자들만 영접할 수 있는 특별한 축복입니다.
성경 속 실례가 있습니다. 절망하고 낙심하여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사람에게 낯선 사람이 다가와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와 성경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중 마음이 뜨거워 졌던 두 제자는 그 낯선 자를 집으로 영접하여 극진하게 대접하는 중에 그가 바로 부활의 주님임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알게 하시는 은혜를 통하여, 변화된 낯선 모습의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고, 진리의 복음의 증인이 됨으로써 천하만민 중, 복의 통로가 되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낯선 손님대접하기를 힘쓰라.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는 자도 있느니라.’ 낯선 사람을 영접하여 극진히 대접함으로써 ‘의인’의 복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도 낯선 사람을 영접하여 집으로 모셔 극진한 대접을 함으로써 ‘의인’의 복을 받습니다. 그렇게 복의 통로로서 의인된 아브라함, 그로 말미암아 천하민민이 복을 받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낯선 모습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에 받아들여 믿으니, 이를 의롭다 여기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밝혀 ‘나의 사랑하는 복의 통로요, 의인에게 내가 하려는 일을 숨기겠느냐’ 하시고 앞으로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알려 주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관영한 죄로 인해 심판하시겠다는 주님께 아브라함은 의인들과 악인들을 함께 심판하는 것의 부당함을 아뢰며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오십명의 의인이 있다면, 사십오명의 의인.., 사십명.., 삽십명.., 이십명.., 열명의 의인을 찾으면 온 지역을 용서하시겠습니까?’‘내가 의인 열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창18:1-31) 하나님은 ‘의인’ 열명을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욱 더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의인과 함께 있는 의인 공동체를 우주보다도 더 고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이 의인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그의 조카와 가족을 기억하시고 복주시어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심장과도 같은 ‘의인 공동체’를 기억하시고 복주시어 심판받을 이 세상 중, 하나님의 가족을 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의인은 반드시 살리십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창세기에 기록된 노아홍수의 전례대로 이 세상을 심판하기로 작정하셨으나, 의인들을 악인들과 같이 심판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세상의 심장처럼 여기며 의인 공동체를 천하보다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처음(A)이고 마지막(Ω)이신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는 노아의 때, 롯의 때와 같이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 인자의 임함은 노아의 때와 같이, 롯의 때와 같이 이루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갈 때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되 홍수가 나서 세상이 멸할 때까지 깨닫지 못하니라.’
태초에 천지가 창조된 것처럼 마지막에 이 세상은 심판을 받고, 새로운 하늘과 땅이 창조될 것입니다. 바로 이 시대! 그 처음처럼 마지막을 이루는 과정 가운데 진리의 복음대로 절차를 따라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의 인생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지’를 깨닫고, 오늘을 사는 삶의 이유를 분명히 하여 진리의 복음의 새 역사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참과 진리가 실종되고 거짓과 비진리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가 없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리를 갈구하는 영혼이 신음하며 헤메이고 있는 이 때, 진리의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교회의 역할과 소임을 다 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교회입니다.
신천지 교리비판 세미나에서 어느 목사님과 박사님의 한탄이 가슴을 울립니다. 지금 교회에서 진리가 설파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천지와 같은 잘못된 비진리가 창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미 선교회이후 교회강단에서 종말론의 설교가 자취를 감추고 현세의 축복만을 강조하는 달콤한 설교에만 익숙해져 있는 우리가 대오각성하고 진리의 복음을 바로 세움으로써 교회를 바로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따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우리 교회가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의인은 오직 진리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 그 의인 공동체가 확장되어 세상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알파요 오메가인 내가 의인에게 나의 하려는 일을 숨기겠느냐?’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기시는 의인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깨달아 알고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혼돈 가운데, 진리의 새 역사가 시작되는 이 때, 노아의 방주의 역할을 다하는 교회와 우리, 의인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의인 공동체가 진리의 새 능력을 나타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