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나는 성령님을 믿습니다.’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처럼 신앙은 언제나 ‘나’와 ‘하나님’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은 믿을만한 분이십니다. 그의 이름 외에는 구원받을 자 없는 예수님은 참으로 사랑할 만한 분이십니다. ‘너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평안하게 쉬게 하리라!’(마11:28) 인생이라는 고해(苦海)속,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스트레스가 극심하여 죽을 지경에 있는 사람이 현자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스트레스 때문에 죽을 것 같습니다.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한지 일주일이나 되었으니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숨막히는 스트레스를 좀 풀어주십시오.’ 현자는 말없이 그 사람을 이끌고 산속으로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아름드리 큰 나무를 두 팔로 꼭 끌어않고 한시간 두시간 세시간을 그 상태로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저 어이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 컴컴해질 때 즈음, ‘스트레스를 해결할 방법을 가르쳐 달랬더니 나무에 매달려 오도가도 못한 채 몇시간동안 도데체 이게 뭐 하시는 거냐’고 쏘아붙였습니다. 현자는 그제 서야 빙그레 웃으며 나무를 껴않고 있던 팔을 풀어 몸을 움직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나무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지, 나무가 나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지 않나. 내가 붙잡고 있었던 나무를 놓으면 당장 이렇게 자유로운 것을...! 이처럼 자네가 스트레스를 붙잡고 있는 것이지, 스트레스가 자네를 붙들고 있는 게 아닐세! 그러니 스트레스를 붙들고 있지 말고 풀어주게나, 그러면 자네는 참으로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네!’ 그렇습니다. 스트레스가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트레스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스트레스를 우리가 놓아 버리면 참으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서 행복한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는 붙잡고 있는 모든 것을 놓아 버릴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까지도 놓아버리고 주님께 인생전체를 내맡길 수 있는 우리 소망인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경상도 산골마을 평사리, ‘최참판’의 가족사를 통해 구한말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담아낸 대서사시 ‘토지(土地)’의 작가 ‘박경리’씨가 25년의 산고 끝에 그 작품을 끝낸 후에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지난 내 인생은 마치 절벽에 늘여져 있는 밧줄에 매달려 살았던 그런 삶이었다. 단 한순간도 편안한 순간이 없이 치열했던 나날들이었다.’ ‘톨스토이’도 인생이란 외줄을 붙잡고 절벽에 매달린 채, 살아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것도 절벽 위 밧줄의 끝을 생쥐가 갉아 먹고 있어서 곧 절대절명의 순간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절대위기의 상황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며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외줄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절박하게 외치는 사람을 향해 절벽 위에서 인기척과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위에 거기 누구 없습니까? 살려 주십시오’, ‘잡고 있는 밧줄을 놓아라!’ ‘누구 십니까?’ ‘하나님이다’ ‘아 예, 그런데 뭐라고 하셨습니까?’ ‘잡고 있는 밧줄을 놓으라고 했다’ ‘......!, 거 위에 다른 누구 없습니까?’
하나님께 몸을 던져 인생전체를 맡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피난처요, 산성이시오, 환난 날에 만날 큰 도움이십니다. 신앙은 그저 맡기는 것입니다. 이삭처럼 예수님처럼 다 맡기는 것입니다. ‘믿고 다 맡기겠으니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잡고 있던 것을 놓고, 하나님께 몸을 던져 인생전체를 맡기는 자가 ‘참된 신앙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학과 역사, 철학과 신학까지도 섭렵했던 유태계 화가 ‘샤갈’의 시적인 상상력에 의한 작품 세계로 인해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샤갈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다음과 같은 그의 고백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보기위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상상(想像)하기 위해서 보는 것이며, 함께 꿈꾸기 위해서 보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더불어 상상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은 ‘함께 꿈꾸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과 더불어 상상했고, 성경과 함께 꿈을 꾸었던 샤갈이 그린 ‘아브라함의 그림’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의 그림’을 통해선 ‘깨달음’을 배웁니다. ‘이삭의 그림’을 통해선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바로 ‘헌신함’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각자 ‘헌신의 열매’를 맺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가늠하건대 127세쯤 된 ‘아브라함’은 청천벽력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약속의 씨로 주신 약속의 자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이었습니다. 아무에게나 줄 수 없는 복, 그 위대한 가치를 지닌 복을 가질 자격이 있는 가를 테스트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을 수행키 이해 아침 일찍 일어나 이삭과 함께 번제로 드릴 모리아 산으로 향합니다. 하루, 이틀, 삼일...얼마나 많은 갈등과 번민과 괴로움이...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을지...‘아빠!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양은 어디 있어요?’하는 억장이 무너질 이삭의 말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슬펐을지...(이같은 상황에서 당신이 만약, 삼일간의 마지막 여행을 당신의 자녀와 함께 떠난다면 무슨 말을 주고 받으실 수 있을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언제는 저 약속의 씨를 통해 하늘의 별처럼 자손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확언하시드만, 지금은 이삭을 죽여 번제로 드리라 하시니... 이율배반적인, 앞뒤가 맞지 않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아브라함은 본토 갈대아 우르를 떠나올 때,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보여 줄’ 땅을 향해 믿음의 발걸음을 옮겼던 것을 떠올렸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놓아 버리고, 신실하신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겠다는 삶의 원칙대로 살아갈 것을 기도하며 다짐합니다. 아들 ‘이삭’에게 하나님의 명에 따라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자초지종을 말하며 차라리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이라도 치라고 까지도 말했었을 것입니다.
당시 추측건대 27살 정도의 혈기왕성한 청년 ‘이삭’은 도망치지도 않았고 반항하지도 않았습니다. 몸도 마음도 인생도 다 주께 맡기고, 잡고 있던 모든 애착과 집착을, 스트레스조차도 놓아 버렸습니다. 아버지처럼 자신도 주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겠다고 결단했습니다. 그 주님은 믿음만한 분이시며, 너무나 좋아하는 분, 진실로 사랑하는 주이시니 아버지 아브라함의 말처럼 ‘여호와 이레! 뭔가 좋은 것을 예비해 놓으셨을 것’이라고 소망하면서 말입니다. 이삭은 모든 것을 주께 내맡기겠다고 다짐합니다. 순순히 포박을 받고 드러누워 아버지를 위로하며 번제를 드리라고 몸을 내맡깁니다. 괴로워 하지말고 결행하라고 말하며 아버지의 칼을 받으려고 목을 길게 늘어뜨립니다. 주님께서 도살할 양같이 끌려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하며 순순히 십자가를 지셨던 것과 같이 이삭도 순순히 아버지의 칼을 받고자 합니다(창22:1-14). 우린 이런 이삭에게서 ‘헌신함’을 배웁니다. 헌신이란 자발적으로 몸을 내맡기는 것으로 희생적 섬김을 뜻합니다. 강요에 의해 하는 일과 자발적인 헌신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이 극적인 장면의 정점은 ‘크리티칼 포인트(critical point)’이자,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라 할 수 있습니다. 극적으로 변화되는 순간으로 ‘터닝 포인트’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정점은 약속된 복이 터지는 임계(臨界)점이요 경계(境界)점인 것입니다. 석공이 망치로 돌을 두들기는데, 계속적으로 망치질을 하다가 어느 한번의 망치질에 돌이 ‘쩍~’ 하고 쪼개지는 바로 그 정점을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라 합니다. 핵물리학에서 핵이 폭발되기 까지, 그 임계점까지의 ‘최소 질량(critical mass)’이 축적되는 바로 그 때,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에서 폭발하여 가공할 만한 엄청난 위력이 발휘되어 새차원의 세계가 열려지는 것입니다. 물이 99도에서는 끓지 않지만, 임계점에서 ‘크리티칼 포인트(critical point)’에서,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라 할 수 있는 100도에서는 드디어 끓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2011년! 이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의 질적변화의 새해! 영육간에 복터지는 한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야곱의 ‘깨달음’, 이삭의 ‘헌신함’이 있어야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참된 신앙인만이 세상의 빛이요, 소금으로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다 그리스도와 함께 시온산의 정상에 설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추락할 수 없을 만큼 신앙인과 교회의 권위가 떨어져있는 오늘날, 이 포스트모던의 위기의 시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참된 신앙인’, ‘참된 교회’가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마지막 때입니다.
‘너희가 바리새인보다도 더 의롭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우리 참된 신앙인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로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인 우리 소망인은 참으로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영광스럽게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속에서 나타나야 하며,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해져야 합니다. 예수의 삶을 살아감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부끄럽게도 교회들내에서의 작금의 한심한 작태, 악취나는 분쟁들을 바로잡는 뼈를 깎는 자정의 노력과 함께 새롭게 기독교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혀, 알게 해야 할 것입니다. ‘민경배’ 한국교회사가의 증언처럼 교육, 의료, 사회복지, 민주정치를 바로 세움으로써 한국 현대화의 초석을 놓았던 십자가의 정신, 약속의 정신을 되살려 그리스도의 푸른계절이 이 땅에 오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예수님이여! 성령님이여! 도우소서! 역사하소서! 참된 십자가의 정신으로 무장된 과천 소망교회가 세상의 희망이어야 합니다. 약속의 정신으로 거듭난 과천소망성도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참된 신앙인’으로서 ‘헌신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약속의 자녀여! 향기론 헌신의 열매를 드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