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Love never fails.고전13: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심(眞心)이 우리를 감동시켰습니다. 진심은 통하는 법입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 지성이면 감천(至誠感天)! 진실한 사랑은 하늘의 하나님을 감동시키며, 땅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IOC위원장 ‘로케’의 드라마틱한 개최지 발표 ‘푱창!’ 간절히 바랬던 지난 10년간의 평창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져, 2018년 동계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올림픽 유치위원회의 ‘나승연’ 대변인은 눈물을 흘리며 소감을 밝힙니다. ‘진심이 통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너무 간절히 원했잖아요...’ 찬성 63표, 압도적지지, New horizon!, 새시대를 여는 ‘평창의 꿈’이 더반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간절한 바램이 새역사의 지평을 열고, 절박한 소원이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마음(眞心)이 가장 중요합니다. 석탄, 석유, 원자력 에너지 보다도 비할 수 없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마음의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자살도 합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에너지가 가장 강력한 에너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이보다 더욱 강력한 에너지가 작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정말 어렵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세 번째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간절하고 절박한, 그리고 포기치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의 진실성이 드디어 제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승천하시기 전, 지상사역을 마무리 해야 하는 그 긴박한 와중에도, 부활하신 주님은 세 번째로 또 다시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한번, 두 번,..공생애의 사역동안에 받은 은혜와 사랑은 차치하고서라도 부활하신 후,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온 정성을 다해 복을 빌어주시며 사랑을 베풀었건만 베드로를 위시한 여섯 제자들은 또다시 부름받기 이전의 옛생활로 돌아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어허! 참~ 어찌 이럴 수가... 부르심의 목적인 ‘사람 낚는 어부’가 아닌 그저 이전의 ‘물고기 잡는 어부’로 되돌아가 있는 형편없고 한심한 모습, 야속한 그들을 뻔히 보시면서도...십자가에서 보이신 사랑의 진실성으로 또다시 갈릴리 바닷가로 세 번째 그들을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찾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부활의 주님이 왜 꼭 그리하셔야만 했는지, 진정 무엇 때문에 그러실 수밖에 없으셨는지...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그렇게도 힘들고 어렵고 그리고 꼭 필요한 것이었을 터. 무식한 겁쟁이, 배신자들이었던 베드로와 제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부르심의 본연의 사명을 다하게 하고자 하시고자 하시는 간절한 바램, 절박한 소원, 바로 그런 진심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성육신인 주님이 그들을 가슴에 품고, 유대 풍습상, 상대를 향한 진심어린 존중과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식사를 직접 준비해 먹이셨습니다. 지극한 사랑을 아낌없이 주었건만 세 번이나 자신을 부인했던 베드로였지만 육체를 입은 연약한 피조체로서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하고 이해하시면서 말입니다. 아낌없이 자신의 전부를 주신 사랑과 배려와 존중으로, 주님은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자들을 사랑하셨고 참을 수 없는 배신감과 서운함, 속상함과 아쉬움을 이겨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자신을 대신하여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어 이 땅에 보냄 받은 사명자로서 참된 삶을 살 수 있게 하기위하여,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또 다시 나타나셔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랑, 그 진실된 사랑의 에너지를 쏟아 부으심으로 마음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진실은 왜곡되지 않는 법이고, 진심(眞心)은 통하는 법입니다.
참된 사랑의 화신인 주님은 참으로 배은망덕한 실망스럽고 답답한 제자들과의 식사 후에, 진실한 사랑의 마음으로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진실로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을 계속 물으시면서 부르심에 합당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시고, 진실된 사랑을 일깨우셨습니다. 진실된 사랑만이 진실된 사랑을 낳는 법입니다. 사랑의 도미노 원리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 진실된 사랑으로 인해 감동된 베드로와 제자들의 마음은 진실된 사랑의 에너지로 가득차 마침내 온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양들을 보살피고 키우는 생명살림의 본질적 복음 사역을 감당해나가게 됩니다(요21:12-22).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진실로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참으로 사랑하느냐?’ ....... 왜냐하면 진실한 사랑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하만사 모든 문제의 해결은 바로 ‘진실한 사랑’이라는 열쇠에 달려있습니다. 바로 이 진실한 사랑이 ‘다양성(多樣性)의 존중(尊重)’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고서는 진실된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1세기의 화두는 ‘다양성’입니다. 이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으면 진실된 사랑을 할 수 없고, 그로인해 3차 세계대전도 발발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감이 팽배하고 있습니다.
21세기를 ‘다양성(多樣性)’을 ‘존중(尊重)’하는 시대라고들 합니다. 다양성이란 모든 나라의 문화적인 특성들을 말하는 것이며, 존중이란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양성이 화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과거와 달리 이제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다문화(多文化)’의 물결을 막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외국인 거주자가 100만이 넘을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 외국인 근로자의 수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이모든 나라들의 언어와 피부색이 다르듯이 문화적인 특성 또한 다를 수밖에 없고, 그들이 믿고 의지하는 종교도 낯섭니다. 그러나 서로 ‘다르다’는 사실의 차이가 ‘우열(愚劣)을 가르는 기준(基準)’이 되서는 안된다는 것이 다양성에 대한 존중의 본질일 것입니다.
다양성은 존중 돼야 합니다. 비근한 예로 지난 3월 11일 대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로 일본열도는 무참하게 짓밟혔습니다. 우리는 구호현장에 소방대원들을 보낸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나라인 일본은 우리 구호 의지를 달갑게 맞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여야 하는 것은, 그들 문화에선, 자선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진이나, 쓰나미, 태풍 등 절대 이길 수 없는 강적들과 살아온 역사로 인해 ‘공동체 의식’이 개인과 가족의 안위보다 우선하며, 질서에서 이탈해 훗날 비난받고 싶지 않다는 강한의지로 훈련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자선(慈善)’이란 가난하거나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딱하게 여겨 도와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겐 남들에게 동정과 도움을 받는 것이 고마운 일이기보다는 오히려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그들에게 자선이란, 오직 공동체 구성원들이 ‘대등한 관계’에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으로 이해될 뿐입니다.
이처럼 지구촌에 이웃이 되어 함께 살면서도 서로 다른 ‘문화적 차이’를 염려하게 되는 것은, 자선이라는 의미조차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구촌의 미래’는 ‘다양성의 존중’이 실현되지 않을 경우,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감히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유추해 보건데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한 가지 ‘사실’을 두고 전혀 ‘다른 이해’를 갖게 되는 것은 ‘인식의 괴리’를 만들어 낼 것이고, 종국에는 ‘다툼’이 일어날 것이고, ‘이익의 조정’이 개입되면서, ‘정의의 객관적인 기준’은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사람이 죽습니다. 그에게도 이름은 있습니다. 오사마 빈라덴. 3000명이라는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범죄 집단의 수괴로 ‘처형’됐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겐 제국주의에 맞선 한 열사의 ‘순교’로도 조형됩니다. ‘처형과 순교’ 사이에 존재하는 이 ‘인식의 괴리’가 과연 좁혀질 수 있을까요? 다만, 이런 유형의 문제들이 일어나기 전에 ‘다양성의 존중’을 화두로 삼게 된 것에 대해 찬사와 기대를 갖습니다.
인간은 사랑과 존중으로 변화됩니다. 링컨이 변호사 시절 ‘에드윈 스탠턴’은 틈만 나면 링컨을 모욕했습니다. ‘저런 애송이 변호사와 무슨 일을 같이하겠나.’ 그리고 링컨이 대통령 출마를 했을 때도 스탠턴은 반대당인 민주당 소속으로 또 다시 링컨을 공격했습니다. ‘깡마르고 무식한자 원숭이같은 링컨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국가적이 재난이다.’라고. 1861년 3월, 링컨은제 16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 후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뜻밖의 결정을 내립니다. 자신을 괴롭히던 정적 스탠턴을 국방 장관이라는 중책에 임명한 것입니다. “이 난국을 해결할 소신과 추진력이 있는 사람은 스탠턴 뿐이다.”라며. 그리고 1865년 4월, 링컨이 암살을 당했을 때, 스탠턴은 누구보다도 슬퍼하며 링컨의 시신 앞에서 울먹이며 말을 이어갑니다. “링컨의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그는 이시대의 위대한 창조자다.”라고.
그렇습니다. 사람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는 사랑하는 마음과 상대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행위입니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진실한 사랑’의 첫걸음입니다. 부모 자식 간, 부부간, 목장 구성원간, 교회공동체원간, 사회 구성원간에 서로 다른 문화의 차이와 더불어 꿈의 차이, 믿음의 차이,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실한 사랑의 에너지를 쏟아 부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진실성’이 ‘교리의 순수성’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는 영생을 얻으며 참 자유자가 됩니다. 21세기 다양성이 화두인 이 시대 ‘다름의 미학’을 키워가야 합니다. 변화의 폭풍 속에서 ‘이쪽저쪽’, ‘내편 네편’ 편가르기를 하며 이전투구의 싸움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유일하신 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안에서 ‘사람중심’으로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내가 신이 되어 상대를 정죄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존중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는 것이고 그의 마음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무겁지도, 무례하지도 말라’는 대인관계의 금언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역인 심판은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저 한결같이, 간절하고 절박하게, 진실한 사랑을 베풀고 상대를 존중함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켜 이 시대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다양성을 존중하여 다툼과 분열을 종식하고 ‘한 몸 공동체’의 균형 잡힌 조화와 밸런스를 이루어가는 당신은 바로 진리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상대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하여 진실된 사랑의 에너지를 쏟아 부읍시다. 주님의 한몸 된 지체로서 베드로는 베드로이고, 요한은 요한입니다. 베드로가 요한일 수 없고, 요한이 바울일 수 없듯이, 나와 너, 우리 사이에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다양성을 존중하여 진실한 사랑을 베푸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사랑과 존중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