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품속 같은 영혼의 고향(故鄕)인 ‘과천소망교회’는 은혜와 진리의 성읍입니다. ‘하나님의 허락(許諾) 받은 자’만 올 수 있는 이곳에 오시면, ‘훌륭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달나라에 갈 수 있는 지식과 정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행복해질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명왕성에 갈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지고 있어도 이웃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다면 행복해 질 수 없는 인간이란 참으로 특별한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존재는 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바, 인간이 참으로 원하는 것은 행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행복은 은혜와 진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라.’(요1:17)
노벨과학상을 꿈꾸던 한 카이스트 학생이 징벌적 등록금 제도에 따른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그만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인 인천 만안구에서 그런 극단적인 불행한 선택을 하게 된 이유가 안타깝습니다. ‘무한경쟁속, 학점 경쟁에서 말려나면 패배자소리를 들어야 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서로 고민을 나눌 여유조차 없다. 이 학교에서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이에 대해 카이스트대학의 서총장은 ‘이 세상에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며 경쟁이 불가피한 이 사회의 상황에서 항상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와 같은 불행한 일은 아무리 치열한 경쟁사회속, 냉혹한 현실속이라 하더라도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성령의 학교, 어머니의 품속 같은 은혜의 고향에서는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일 것입니다.
진시황시절, 나라의 백성들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세상의 지혜’를 모아오라는 엄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문무 대신들은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등 각 분야를 총망라하여 12권의 책을 골라 왕께 가져갔습니다. 왕은 이 많은 책을 언제 다 읽을 수 있겠느냐며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보라 지시합니다. 가까스로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온 대신들을 향해 이것도 너무 많으니 이 책을 아주 한 페이지로 아니, 그것도 길 것 같으니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해 오라고 명합니다. 드디어 뛰어난 지혜자, 책사들이 수많은 날을 고민하고 연구하여 이 세상의 모든 지혜를 집대성해서 다음의 한 문장으로 요약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물론,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이 무한경쟁속의 세상에서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차원을 달리하는 하나님의 세계에는 ‘공짜가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지혜’에 반하는 역설적인 ‘하나님의 지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짜’라는 말뜻을 가지고 있는 ‘은혜(gratis)’는 아무 댓가없이, 거저 얻는 것입니다. ‘네가 이러 저러한 일을 했으니 그 공적으로 인해 내가 이것을 주겠다’가 아니라, 아무 행한 일이 없을지라도 아무 댓가를 바라지도 않고, 보상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그저 값없이 주심으로 공짜로 거저 얻게 되는 그런 신비한 은혜의 축복도 있는 것입니다. 본래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이 은혜(gratis)를 베풀어서, 값없이 아무 댓가없이 아들을 보내주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거저 얻게 되었습니다.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이같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라, 보내신 자,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이것이야말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공짜로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는 법, 무한경쟁속 적자생존의 사회원리,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 있는 그런 세상에서 사는 자에게 참된 행복이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세계안에서 진리를 깨닫는 사람에게만 참된 행복이 있다 할 것입니다. 하늘의 지혜로서 참된 행복을 담고 있는 진리란 본래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옳다 인정함을 받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서를 모두 모아 딱 한 줄로 ‘이 세상에 공짜가 없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면, 하늘의 지혜서인 성경66권도 축약하여 다음과 같은 딱 한 구절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이 요한복음 6:29절의 말씀은 ‘어찌해야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한 영생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질문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는 공짜가 있다’는 진리를 함축하여 천명하신 주님 말씀의 정수입니다. 성경전체의 요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요한복음 6:29 이야말로 값없이 주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 주셨으니, 거저 주신 저를 믿는 자, 그저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 이와같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통한 은혜안에서 왕노릇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어지는 참된 행복입니다. 은혜의 세계안에서 진리를 깨닫는 사람에게만 참된 행복이 있는 법입니다.
옳습니다. 이것 즉, 은혜와 진리를 세상의 지혜자들 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 같은 자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드립니다.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하는 이 은혜와 진리가 오직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받은 자들에게만 알려지도록 허락된 신비로운 하나님의 뜻입니다(마11:20-30).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 바로 신비로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그 아들이 천국문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의 비밀 열쇠인 예수 그리스도! 그가 길이고, 진리며, 생명의 유일한 방법이며 행복의 통로이십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인간사 모든 문제,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역사와 죄와 죽음등.. 무슨 문제든 풀 수 있는 신비한 열쇠가 있습니다. ‘너희가 영생을 얻을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은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한 것이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자가 ‘Key solution’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6.25전쟁당시, 부산에서 전쟁고아들을 위해 고아원이 만들어졌습니다. 엄마 아빠를 전쟁중에 잃어버리고 거리에서 헤메이다 굶주림에 죽어가는 아이들을 그 고아원에서 수용해 깨끗이 씻기고, 먹을 것을 먹여 잠을 재우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고아원 아이들이 하나같이 밤에 잠을 자지 않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 사흘,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아이들은 눈은 토끼눈같이 빨개지고, 잠을 못자니 점점 수척해 져갔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그 이유를 몰라 당황하며 고민하던 차에 면밀히 그 아이들을 관찰하던 한 보육사가 해결방안을 찾아냈습니다. 아이들의 손에 빵 하나씩을 쥐어주니, 그 심각했던 문제가 간단히 해결된 것입니다. 이제까지 굶주림에 시달린 아이들은 잠을 자고 내일이 되면 또 다시 그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런 굶주림을 겪을까봐 두렵고 걱정이 되어 불안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후, 아이들은 손에 빵 하나씩을 붙들고, 단잠에 빠져들게 됩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 공중을 나는 새도 들의 풀도 내가 먹이고 입히거늘 하물며 내 사랑하는 자녀일까보냐’ 주님을 붙들고 오늘에 몰입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한 크리스천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에서 보내진 ‘생명의 빵’인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주님을 꼭 붙들면 따뜻한 주님의 품안에서 참으로 쉼과 평안을 누리는 행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온유와 겸손한 내게 와서 배우라. 내가 주는 짐은 세상의 짐과 같지 않아서 아주 쉽고 가벼움이라’
영생복락의 천국 역사를 이루기 위한 ‘보내심의 원리(sending formula)’를 깨닫는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지고 오신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썩지 않는 생명을 얻기 위한 하나님의 일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생명의 빵되신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보내신 아들’과 ‘영생의 일’은 상호 필연적 상관관계에 있다 하겠습니다.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중에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에 다녀왔던 제자들에게 ‘나는 배부르다’고 하십니다. 누가 잡수실 것을 가져다 주셨느냐며 수군대는 제자들에게 참된 양식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온전하게 그의 일을 이루는 이것 이니라.’(요4:34).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 사랑하는 것이 영생을 위한 일이며,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게 하고, 사랑하게 하는 그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참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신비로운 통로이며, 하늘 문을 여는 비밀 열쇠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신비로운 비밀열쇠로 하늘을 열고서 ‘상상(想像)’을 그려야 합니다. 법관은 접하는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보는 죄의 관점으로 보는 경향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법관이 참으로 법관이 되면 법의 정신인 ‘사랑’을 구현하게 되기 때문에 법을 집행할 수가 없게 된다고 합니다. 법을 집행함으로 모든 죄인을 구속하려고만 하는 법관은 ‘세상을 그리는 자’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품속에서 주님을 붙들고 사는 우리는 세상을 그리지 말고, 상상을 그려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로 무한경쟁속 공짜가 없는 이 세상만을 그리는 불행한 삶을 살지 말고 차원을 달리하여 하늘 꿈을 그리고, 상상을 그리며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늘을 날고싶다는 생각 때문에 비행기를 발명해 하늘을 날 수 있었듯이, 해저 깊은 바다를 여행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상상했기 때문에 잠수함으로 깊은 바다를 유영할 수 있듯이, 이 세상과 차원이 다른 하늘나라를 생각하며, 꿈꾸고 상상하는 자에게 그 생각과 꿈, 상상 때문에 바로 그것이 근거와 원동력이 되어 생각하고 꿈꾸는 대로 상상한 그대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영혼의 고향’에서 하늘 본향을 사모하는 소망인이여! 오늘 주를 붙들고 상상을 그려봅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붙들고 보내신 자를 믿게 하고 사랑하게 하는 참된 양식인 그 일을 오늘도 끊임없이 하다보면, 내일의 염려도 사라지고, 고난도 극복되며, 상상을 그리는 대로 다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붙들고 상상을 그립시다.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물지 않고, 어린양과 사자가 함께 뛰놀며, 눈물과 아픈 것과 사망이 없는 곳에서 서로를 무화과 나무아래 초대하여 천국잔치를 즐기는 내세의 영생복락을 그려봅시다. 선진 사도들이 상상으로 그린대로 주님의 따뜻한 품속에서 잊어버리고 잊었던 것을 되찾고,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바대로 잃어버렸던 인간의 권리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 지구를 사는 큰 꿈을 그리는 가운데 보내신 아들이 도맡아 이루시는 생명살림 프로젝트와 생명살림 복합단지건설 프로젝트를 위하여 ‘상상을 그리는 그대로’ 다 성취되어질 것입니다. 어머니 품속 같은 과천소망교회, 은혜와 진리의 고향에서 헛되고 순간뿐인 세상을 그리지 말고, 참된 행복을 주는 주님을 붙들고 영원한 하늘의 새세계를 이루기 위하여 상상을 그려봅시다. 오늘, 따뜻한 주님의 품안에서 상상을 그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