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것은 새 부대에!’, 하나님 나라의 제1원리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에 합당하도록 새롭게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너희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거룩하고 기쁘시고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올바로 의식하라!’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매사에 참된 하나님을 인식하고 거룩한 그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삶일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욱 참되게 인식하고 ‘시간속, 속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빛과 소금으로서 ‘참됨의 규범(norm)’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가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엄밀하게, 이 세상에서는 ‘정의(justice)란 없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를 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준, 즉 규범이 정해져야 그에 따라 ‘옳고 그름’을 규정할 수 있는 법인데, 오대양 육대주 각 나라마다, 각 문화마다, 각각 그 정의의 기준과 규범이 다르기 때문에 정의(justice)를 정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중앙 아시아 에서는 음식을 대접받고 ‘끄윽~’하고 트림을 해야 음식대접에 대한 감사의 올바른 표현이 되지만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행동은 몰상식하고 예의바르지 못한 행동이 되며,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 동남아시아 사람들의 행동들도 ‘그렇게 하는 게 옳은 일이지’라고 인식되지 않는 사회적 통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센덜’의 명강의가 수록된 명저서 ‘정의(justice)’를 잘 살펴보면 ‘정의란 없다’라는 싱거운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진정한 정의란 하늘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정의를 구하라’하는 말뜻은 하늘에 있는 천국을 사모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정의’란 없고 다만 ‘이익의 조정’만 있을 뿐입니다. 각자 다른 규범과 기준을 가지고 있는 개인 혹은 집단들, 나라 간에 이익을 조정하는 일이 사회적 정의를 다루는 정치활동 속에서, 경제적 정의를 다루는 경제활동 속에서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만 진정한 의미의 ‘정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간절히 천국을 사모합니다. 정의가 존재하는 천국을 사모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정의의 규범(norm)’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셨습니다. 완벽하지 않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참된 뜻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했다는 점에서의 한계와 인간의 편협된 생각과 고정관념으로 인해 잘못 이해되고 잘못 인식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의 온전치 못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핵심적인 주님의 말씀, 성경의 말씀입니다. 2000여년전, 이 주님의 말씀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비아냥대며 이 성경의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냐고 조롱하는 자들도 있지만 우리는 ‘정의의 규범’인 성경 말씀이야말로 거짓말이 아닌 참된 말이라고 믿습니다. 주님께서 2000여년전에 천국이 가까웠다고 회개하라고 애타게 소리치셨는데, 2000여년이 지난 지금은 얼마나 더 천국이 가까워 졌겠습니까? 더 간절히 천국을 사모하고, 더 열심히 천국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천국을 유업으로 받기위해 진실된 회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회개하라’는 이 말뜻은 가톨릭에서 해석한대로 ‘고해성사’하라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신부님에게 죄를 고해하기만 하면 모든 죄가 용서되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 것이고, 회개해야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원문의 의미로 보다 밝히 해석해보자면 ‘회개하라’는 ‘마음을 바꾸라’라는 의미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바꾸고 생각을 새롭게 바꾸어야, ‘새것을 새부대에!’ 담을 수 있듯이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바꾸어 열린 사고, 열린 생각을 함으로써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새것,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새 역사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린’ 교회는 하나님의 각별하신 사랑과 배려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식을 향한 애타는 긍휼(矜恤)의 마음으로 인한 고귀한 선물입니다. ‘열린 교회’란 교회의 본질적 사명 수행을 위해선 필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아직도 돌아와야 할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천’의 ‘영생받기로 작정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찿아 살리기 위해 교회는 활짝 열려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이전에 한 번도 닫힌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닫힌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천국 복음을 듣고 좋게 생각하고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참여코자 하는 자면 그가 노인이든 어린이든, 재벌이든 가난한자이든, 남자든 여자든, 권세가든 촌부든, 장애인이든 이방 문화인이든 상관없이, 빈부나 귀천에 분별이 없이, 어느 누구든지 이곳에 와서 값없이 구원의 샘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 문을 열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주님이 베데스다, 긍휼의 연못가에 병든 채 죽어가는 병자를 찾아가 살려내듯, 세상 속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들을 찾아 살려내기 위하여 더욱 더 활짝 ‘열린 교회’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이런 열린 교회의 본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웃사람들과 친해져야 하고 주변과의 관계를 좋게 만들어야 합니다. 잘못된 이미지를 개선시켜야 하며 부정적인 선입견이나 편견, 고정관념을 없애야 합니다.
초대교회 때에도 천국복음을 전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중의 하나가 성만찬예식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거짓 소문, 왜곡된 이미지 때문이었습니다. ‘내 살을 먹으라, 내 피를 마시라!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죽어도 살리라!’ 이 말씀을 오해하고 곡해하여 ‘기독교인들은 사람을 죽여 그 살과 피를 함께 나누어 먹고 마신다’ 카더라, 카더라, 카더라.... 반인륜적적, 반사회적이고 끔직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빛과 소금’으로서의 거룩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극복하고 ‘천국복음을 천국복음 되게!’ 만들며 약속대로 크리스천 공동체를 세워가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 언약의 씨가 뿌려짐으로 시작된 약속의 역사는 모세의 ‘출애굽 사건’과 다윗왕정의 왕들의 섭정에 따라서 ‘사랑의 채찍’으로 인도된 이스라엘 ‘언약공동체의 바벨론 포로 및 귀환역사’를 통하여 약속의 꽂을 피우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약속의 성취’를 이루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지 2000여년이 되는 지금, ‘더욱 더 가까워진 천국’을 더욱 더 간절히 산 소망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천국복음의 열매가 맺혀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바꾸고, 생각을 새롭게 바꿈으로써 ‘인식을 전환’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하여 약속된 구원인 새 하늘 새 땅,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약속의 결실이 맺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결실의 시대에, 우리도 38년 된 병자를 찾아간 주님처럼 고정관념에 갇히고 생각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고 멸망해 가는 딱하고 불쌍한 인생들을 찾아가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근간으로 한 전통적 유대 사회의 통념과 규범, 유대인들 자신들이 정한 기준에 따라 ‘생각의 덫’에 걸려 불쌍히 죽어가는 영적 육적 병자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찾아가 살려 내야할 책무가 우리들, 주님의 몸 된 교회에게 있는 것입니다. 핍박 자들에게 조차 ‘저들이 잘 모르고 하는 짓이니 저들을 용서하시고 불쌍히 여겨 주소서’하는 주님과 같은 긍휼의 마음으로 생명살림의 사명체인 교회공동체의 본질적 사역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 첫걸음이 열린 교회에서 닫힌 마음으로 딴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열린 교회에서, 주님을 만나기전 38년 된 중풍병자처럼 옛 생각, 천사가 내려와 동해진 저 연못물에 들어가야만 병치유의 소원이 이루어 질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에 갇혀, 편견 속에서 여전히 닫힌 마음으로, 닫힌 생각을 하고 있다면 참으로 불쌍한 인생으로 스러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생각 속에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지 모르겠다며 나를 저 연못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만 고집하며 오늘 ‘하시는 주의 말씀’대로 하기를 거절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구원의 새로운 길과 방법이신 주님께서 ‘일어나, 네 메트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하신 대로 이전의 생각을 바꿔 순종하면 그 순간 새로운 기적이 일어나 소원을 이루며 행복한 새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요5:1-11).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고정관념이 주님을 만나서 주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듣는 순간 생각의 틀이 바뀌고 그 ‘인식이 전환’되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paradigm이 순간 shift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뀌면 세상이 변하는 법입니다. 모든 것은 생각의 겨자씨로부터 시작하여 천국이라는 엄청난 결과로 열매 맺어지는 것입니다. 열린 좋은 생각, 좋은 마음으로 30배, 60배, 100배의 좋은 결실을 맺습니다. 모든 것이 생각으로부터 시작하여 생각이 원인이 되어 결과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겨자씨 같은 열린 생각으로부터 비롯되어 그 작은 원인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받는 엄청난 결과를 이루게 됩니다.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 : 인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을 인식하는 정도에 따라 깨달음을 통한 구원의 새길, 신앙의 참 길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박지성이 활약하는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도 1980년대 홀리건의 폭동과 선수들의 몸값상승으로 인해 몰락의 길로 들어섰을 때, 24구단주들이 모여 ‘인식을 전환’하여 혁신적 리그 운영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지금 세계최고의 흥행 인기 리그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자존심인 영국축구리그에서 영국인이 아닌, 게다가 축구 후진국이라 할 수 있는 아시아, 아프리카 코치, 감독, 그리고 선수들까지 영입하자고 새롭게 생각을 바꾼 것입니다. 고정관념을 벗어나서 열린 마음, 열린 생각으로 인식을 전환하고 발상을 새롭게 함으로써 엄청난 성공의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건축사에 길이 남을 1954년은 ‘발상을 전환’한 획기적인 해로 평가됩니다. 일반적 생각으로 냄새나고 불결한 화장실이 실외에서 실내로 진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기정사실화되어서 재론할 일고의 가치도 없었던 일, 멀리 있을수록 좋다는 ‘똥간’이 집안으로 들어온다....?! 화장실이 집밖에 있어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냥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줄로 알고 살아오다가 ‘발상을 전환’하여 화장실을 집안에 둠으로써 주거문화의 일대혁신이 생긴 것입니다. 안식일 준수의 율법이 본질적으로 ‘사람을 위함’인 것처럼 ‘사람을 사랑함’으로 생각을 바꾸어 ‘생긴 대로 살지 말고,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다가오는 결실의 계절, 추수를 기대하며 다 바꿉시다. 생각도 새롭게 바꿉시다. 마음도 새롭게 바꿉시다. 말도 긍정적인 말로, 옷차림도 아주 밝은 칼라로, 우거지상에서 스마일 미소로, ... 삶의 어둔 면도 밝은 면으로.... 바꾸고, 바꾸고, 새로 바꾸고...새것은 새 부대에 담는 것이니 날로 새롭게 바뀝시다.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마음으로 생명살림의 새 역사를 이룹시다. 생각은 결과를 낳는 법입니다. 만사는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처럼 열린 생각을 하고 주님같이 긍휼의 마음을 품읍시다. 열린 사고로 긍휼의 공동체를 세웁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