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History)란 ‘He, story’, ‘그’ 곧,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오늘 ‘새로운 이야기(new story)’를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이 ‘세상을 무대’로 하여 ‘연출자이신 하나님’이 ‘성경이라는 각본’을 토대로 하나님의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 나가시는 가운데, 이 극적인 구원의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바로 당신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각자 맡은 선한 역할을 잘 감당 해내십시오. ‘사명의 성령’이라 할 수 있는 ‘진리의 성령’의 액티브한 사역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것도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실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자, 우리가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하시고 ‘후~’ 하며 ‘하나님의 기운’을 불어넣자 흙덩이가 이성, 감성, 의지, 영성을 지닌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쏙 빼닮은 ‘생령’이 되어,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 수 있었던 사람은 그만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함으로써 에덴의 낙원에서 쫓겨나 이 세상에서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는 불쌍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런 죄와 허무의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참으로 사람답게’ 영원한 생명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독생하신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냈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요3:16)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보내심의 사역을 다 이룬 후, 부활 승천하시어 다시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서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내가 가면 진리의 성령을 보내겠노라’ 하신 예수님의 공생애의 마지막 약속의 말씀 후에 제자들을 향하여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리라’ 하셨습니다. 보내심의 축복과 사랑은 가이없는 것이고, 보내심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은 ‘보내심(sending)’으로 이어집니다. 구원의 대사를 위해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훈련을 통해 좋은 십자가 군사로 양육되어 세상을 향하여 보내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부르심과 보내심이 합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집니다. ‘부르심에 대한 의식’과 함께 ‘보내심에 대한 의식’ 또한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르심은 보내심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모세처럼, 주님처럼 ‘보내심을 받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보내심에 관한 의식을 하면서, 파송 받은 사명자(使命者)로서 사명감(使命感)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으로 파송된, ‘보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소망인은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각자 이 지구촌 구석구석으로 특별한 구원의 일을 이루기 위해 파송된, ‘또 하나의 보내신 자’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파송된 보내신 자로서 제몫을 찾아, 제역할을 다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오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으로 새로운 이성, 감성, 영성등과 함께 새로운 의지를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일을 다 합시다. 각각 제 십자가를 지고, 제 몫을 다하는 인생이라는 여행길을 갑시다.
인생이란 커다란 여행입니다. 잘 살펴보면 그 안에 우리에게 부닥친 여러 일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인생이란 양지를 걸을 때도 있고 음지를 걸을 때도 있는 법입니다. 넘어져 봐야 언제 일어서야 할 지 알 수도 있고, 굶주려 보지 않으면 풍요로움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한 번씩 한순간씩 이겨내다 보면 강해집니다. 영웅들도 갈림길에서 갈등을 합니다. 그러나 가던 길을 멈추는 일은 없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신중히 결정해야 할 갈림길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 때 ‘어느 쪽으로 가야하나’ 하는 순간의 머뭇거림은 인류의 조상들로부터 오늘의 구도자에 이르기 까지 예외가 아니라 생각됩니다.
역사시대의 시작인 기원전 20세기에 하나님이 갑자기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신의 형상을 만드는 ‘데라’의 아들로 당시 최고의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명령했으니 그 명령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안정적인 삶의 터전과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는 갈등 속에서 미지의 세계로 떠나야 할 것인가로 머뭇거립니다. 이윽고 신의 의지에 이끌려서 그는 보여줄 땅을 향해 발을 내딛습니다. 순간의 머뭇거림과 갈등은 아브라함의 의지에 상관없는 최초의 여행으로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인류는 위대한 종교의 탄생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의 모세도 갈림길에서 갈등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힘들고 이겨내기 어려운 갈등 속에 위대한 좁은 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생은 커다란 여행길이라 가다보면 언제나 기로에선 갈림길을 만납니다. 이렇게 할까, 아니면 저렇게 해야 하나 순간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갈등의 갈림길에서 본인의 의지이든 아니면 본인의 의지에 상관없든 옳은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주님의 선한 손길로 인도될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온전히 맡기는 가운데 이 세상에 보냄 받은 사명자로서의 옳은 결정, 옳은 선택을 해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보냄 받은 사명자는 미련하고 약하나, 지혜롭고 강합니다. 모세처럼 사명자는 미약하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출애굽 후, 매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혼자서 척박한 광야생활속의 200만 이스라엘 백성들 간의 수많은 복잡다단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며 쩔쩔매던 사명자 모세는 점점 탈진되어 갔습니다. 미련했던 사명자 모세!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광야에서 연단되고 양육되었고, 그럼에도 그 미련함을 이방 제사장인 장인 이드로를 통해 지혜롭게 보완시켜주심으로 ‘지혜 있는 자보다 더 지혜롭게’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백성중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자’, ‘진실한 자’,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며 공동체간 신뢰가 있는 자’를 선별하여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으로 세워, 각각 할 일을 분담하여 제 역할을 감당하게 함으로써, 함께 보냄의 사역자로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출18:13-27). 이로써 출애굽의 위대한 사역을 함께 이루어 간 것입니다. 만약 혼자서 백성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미련스럽게 계속 고집을 부렸다면, 본인의 의지에 상관없이, 타자의 의지에 이끌려 참으로 지혜롭고 옳은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출애굽의 사역은 40년이 아니라 아마 80년이 걸릴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천부장, 백부장등 각자의 분량에 따라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사명을 부여하는 새로운 방법을 채택하는, 더없이 지혜로운 옳은 결정을 한 후에, 비로서 모세는 시내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과의 신비한 교제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새로운 명령을 받는 가운데 선두에서 백성을 이끄는 사명자로서의 제 몫을 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보냄 받은 자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이 해야 하는 독특한 사명(使命)이 주어집니다. 보낸 분으로부터의 분명한 목적하에 보냄을 받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어디로부터 와서 이 세상에 잠깐 머물다가 다시 어디론가 가는 것이라 합니다. 각본에 따라 이 세상에서 구원의 큰일을 이루시기위해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의 인생이야 말로 너무나 분명한 목적이 있는 인생일 것입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파송된, 보내심을 받은 인생들에게는 남이 대신할 수 없는, 대신해서도 안되는 제 역할이 있습니다. 인생의 제몫을 찾아 사명을 다하는 인생이 참으로 행복한 인생일 것입니다.
작곡가 겸 피아노의 거장,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193cm의 거구입니다. 그는 특히 손가락이 기형적으로 길고 두터워서 피아노 연주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합니다. 특별한 손가락의 신체구조 때문에 일반인들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연주를 선보였습니다. 13도 음을 그 긴 손가락을 사용하여 단번에 낼 수 있으며, 그로인해 오선지도 아홉 칸을 만들어 직접 자신만이 연주할 수 있는 특별한 곡을 자작하여 연주함으로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들으며 사람의 영혼이 만들어 내는 춤사위를 감동적으로 감상해봅니다. 무엇보다 그의 특별한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그렇다. 보냄 받은 우리의 인생에는 각기 제 몫이 있는 법이다’라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누구도 흉내 내거나, 대신할 수 없는 특별히 길고 두터운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의 몫이 있는 반면 특별히 짧고 가느다란 내 손가락으로만 연주할 수 있는 내 몫도 있는 것입니다. 라흐마니노프의 손가락으로는 도저히 연주할 수 없는, only1, 오직 나만이 내 영혼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독특하게 연주할 수 있는 내 몫 말입니다. 보냄 받은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제 몫이 있습니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우리네 인생에서 제 몫을 찾아야 합니다. 각각 사명감에 불타서 주어진 제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보냄 받은 자의 삶에 대한 확고한 인 식속에서 ‘또 하나의 보내신 자로서’ 보냄 받은 사명자로서의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해야 합니다. 이 사명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대신해서도 안 되는 천명(天命)입니다.
천재 같은 바보가 있는 반면, 바보 같은 천재가 있는 법입니다. 진짜 같은 가짜가 있고, 가짜 같은 진짜도 있으며, 강한 것 같지만 약한 것이 있는가 하면, 미약하지만 실은 강력한 것이 있는 법입니다. 참된 진리와 거짓된 가짜는 결국 드러나게 되며 판가름 나게 됩니다. 거짓된 가짜는 99% 지점인 ‘크리티컬 포인트(critical point)’를 통과하지 못하여 결실하지 못할 것이나, 참된 진리의 역사에 참여된 진리의 존재들은 크리티컬 포인트, 극한 99도의 상황을 극복해 냄으로 좋은 열매를 결실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의 자녀로 십자가의 좋은 군사인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십자가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여 첫째 부활의 열매를 결실하게 될 것입니다. 극한 임계점, 포기하고 싶은 그 99도 지점을, 살고자 하지 않고 주의 공동체를 위하여 죽고자 대듦으로써 극복해 내고 끝까지 감당해 내고야 마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 곧 사명의 성령은 각자가 감당해야 하는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합니다. 주님과 한몸 공동체인 우리, 누구에게나 제 몫이 있는 법, 누구도 대신할 수도 없고, 대신 해서도 안되는 제몫을 찾아, 제 할 일을 끝까지 감당하는 이 땅에 파송되어 보냄 받은 사명자로서 당당히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욥의 결실을 우리가 보았으니 오래 참고 인내하며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 결국 결실하게 해주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도함으로 옳은 결정으로 결국 참된 진리의 자녀로 참된 열매를 맺는 알곡으로 영광의 자유에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사명자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사명자는 미련하고 약하나 위대한 사명을 잘 감당합니다. 갈림길과 기로에 서서도, ‘들고 있자니 팔이 아프고, 내려놓자니 마음이 아픈’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해 냅니다. 참된 결실을 맺으며 위대한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기로에서 미련하나 주께서 함께 하심으로 사명을 잘 감당한 위대한 사명자 모세와 같이, 부르심을 입어 보내심을 받은 선진 사도와 같이. 미련한 우리, 흠이 많고 약한 소망인은 기꺼이 목숨을 바치셔서 생명을 살리신 거짓 삯꾼 목자가 아닌 선한 목자를 믿고 사랑함으로 각자의 역할을 잘 감당합시다. 제 몫을 다하는 사명자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약속된 선한 결실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명자는 미약하나 위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