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생활

★말씀 ★/말 씀

진리의 공동체여! 생명나무로 나아가자 2011-01-23

감사^^* 2011. 1. 26. 19:15

진리의 공동체여! 생명나무로 나아가자
창세기 3:8~24    2011-01-23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까지 내어주신 분이기에 우리가 그 ‘하나님 아버지’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 아버지를 두셨기에 ‘예수’가 ‘노자’나 ‘석가’나 ‘소크라테스’등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위대한 분인 ‘예수 그리스도(mesiah)’가 될 수 있다 하겠습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인 ‘교회(敎會)’는 에덴의 생명나무를 등지고 쫒겨난 이 세상에서, 불순종한 아담의 원죄로 인해 죄에 빠져 죽어가는 인생을 구하기 위해 ‘생명과 희망의 빛’을 가득히 담은 ‘구명용 항공모함’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 보냄받은, 말씀하시는 교회 ‘과천소망교회’는 목적지 ‘에덴’을 향하여 ‘영생받기로 작정된 자들’과 함께 나아가는 ‘진리의 공동체’이자, ‘거룩한 공동체’ 입니다.
 
결혼을 ‘신비한 결합(mysterious unity)’이라고 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합하여 새로운 ‘한 몸 공동체(共同體)’를 이룹니다. ‘교회 공동체(敎會 共同體)’도 이와 같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새로난, 운명을 같이하는 삶을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인 생명 공동체입니다. 구원의 시나리오이자 생명의 지도라 할 수 있는 성경전체를 통으로 볼 때, 이스라엘 왕들의 시대의 ‘성전(聖殿) 공동체’와 출애굽 후 광야시대의 ‘성막(聖幕)공동체’와 그 맥을 같이하며 상통하는 의미를 지니는 ‘교회(敎會) 공동체’는 일정한 목적 하에 통일적으로 조직되어, 각 부분과 전체가 스스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생명활동을 하는 유기체입니다. 40년간의 광야 길을 가면서 200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한 ‘성막 공동체’로 살아갔습니다. 유다지파를 선두로 12지파가 각자의 ‘거룩한 위치’에서 각자의 ‘거룩한 역할’을 유기적으로 담당하는 ‘거룩한 공동체’로서 ‘나팔 소리’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약속의 땅을 향해 ‘거룩한 행진’을 하였습니다. 오늘 ‘거룩한 공동체’인 ‘과천소망교회’에서도 ‘진리의 말씀’의 나팔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거룩한 행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성막’, ‘성전’, ‘교회’의 전시대에 걸쳐 이 ‘거룩한 공동체’에서 상호 협력하여 공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갈등과 분쟁이 상존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대화와 설득으로 서로 조화롭게 상합하면서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시대마다 잘 감당해 왔습니다. 이처럼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본질적 사명을 완수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려면 안팎으로 각각 기호와 개성이 독특한 상대를 설득하는 비법을 필연코 습득해야 합니다.
 
한비자의 ‘난세편(難說篇)에 설득의 비법이 수록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대가 좋은 이름과 높은 지조를 동경함으로 명예를 추구하는 자인데, 이익이 크다는 것으로 그들 달래려 하면, 상대는 자기를 비루하고 지조가 없는 사람으로 대한다하여 멀리할 것이 틀림 없다. 반대로 상대가 큰 이익을 원하고 있는데, 명예가 어떻고 지조가 어떻고 하는 말로 이를 달래려 하면, 이 쪽을 세상물정이 어두운 사람이라 하여 상대해주지 않을 것이 뻔하다. 상대가 속으로는 큰 이익을 바라면서 겉으로는 명예와 지조를 대단이 아는 척 할 때, 그를 명예와 지조를 가지고 설득하려 하면, 겉으로는 이 쪽을 대우하는 척하며 속으로는 멀리하게 될 것이며, 그렇다고 이익을 가지고 이를 달래면 속으로 이쪽 말만 받아들이고 겉으로는 나를 버리고 말 것이다. 참으로 사람들의 의중을 간파하고, 마음을 움직여서, 무언가 일을 함께 도모하게 이끌어내도록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한비자는 이렇게 ‘유세로 남을 설득하기가 어려움(難說)’을 말하고, 그 상대가 왕일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하면서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맨 끝에 ‘역린지화(逆鱗之禍)’라는 고사성어를 말합니다. 중국에서는 ‘용(龍)’에 관한 전설적 이야기가 많습니다. 용은 물론 가상적 동물이지만 특별한 영물로 실제화하여 생각했습니다. 용은 특히 비늘 달린 짐승 중 으뜸가는 것으로 여겼으며 군주를 용에 비겨서 ‘용상’이니 ‘용안’이니 하여 그 권위를 높이기도 하였습니다. 전국시대에 현실주의적인 법가(法家)인 ‘한비(韓非)’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군신간의 오해와 온갖 불법등을 직시하면서 전국시대의 난국을 이겨낼 국가적 대계를 강구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저서 ‘한비자’의 ‘세난편(說難編)’에 유세시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꼭 주의해야 할 것인 ‘역린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용은 상냥한 짐승입니다. 가까이 길들이면 탈 수도 있는 용의 턱 밑에는 지름이 한 자쯤되는 비늘이 거슬러서 난 것, 즉 ‘역린(逆鱗)’이 하나 있습니다. 용은 온순해서 평상시에는 사람이 올라타 사이좋게 놀지만, 만일 이 역린을 건드리면 돌변하여 용은 그 사람을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맙니다. 역린을 건드린 자는 누구든 죽임을 당합니다. 군주에게도 이런 역린이 있습니다.’
 
상대를 설득하는 데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철칙은 ‘역린을 건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대를 설득하려면 상대의 ‘역린’을 헤아려야 합니다. 역린을 건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에게도 역린이 있습니다. 에덴 동산의 중앙에 ‘선악과’는 결코 건드리지도 말라는 엄명을 어기고 하나님님의 사적 공간을 침범해 건드리지 말아야 할 역린을 건드린 아담은 정녕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창3:1-3). 오늘날, 하나님의 역린과도 같은 ‘선악과’를 피하여 그룹들과 불 칼로 지키는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자는 복이 있는 자입니다(창3:8-24).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고 거역하지 말아야 생명을 보전할 수 있는 법입니다. 인간에게도 역린이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진리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도 역린을 건드리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린이나 교인의 역린을 건드리는 교회는 부흥될 수 없습니다. 결코 건드려서는 안되는 각각의 영적 자존심, 영적 수욕감인 ‘역린’을 피해야만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법이며, 설득하여 분쟁을 해결하고 함께 협력함으로써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의 열매를 맺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설득의 달인 ‘서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993년, 고려, 성종때, 요나라의 장군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 이북에 진을 치고, 항복하지 않으면 다 죽이겠노라고 협박했습니다. 겉으로는 고구려가 원래 자신의 영토였었으니 고려의 서경 지역 이북이 요나라에 다시 복속되어져야 한다는 억지주장을 했으나, 속으론 고려가 자기 요나라가 아닌 적국인 송나라와 교류하는 것을 못내 괘씸히 여긴 의도적 침공이었습니다. 요나라 대군의 위용에 겁에 질린 조정이 항복하자는 분위기로 급물살을 타자, 이에 단호히 반대하거 나서서 서희가 소손녕과 협상의 테이블에 마주합니다. 서희는 상대의 의중을 꿰뚫어 보고, 먼저 고려는 고구려의 약칭으로 고려야 말로 고구려의 옛 땅의 실제적 주인임을 강조함으로써 상대의 의표를 찌릅니다. 이어서 서희는 고려가 바다건너 송나라와 교류하게 된 이유는 ‘요나라’와 ‘고려’의 국경사이에 진치고 있는 간교한 여진족 때문이니 여진족이 점령한 땅을 찾기만 하면 요나라와 직통로를 두어 교류할 수 있게 되지 않겠느냐며 진심으로 소손녕의 마음에 호소했습니다. 서희는 상대의 의중을 간파하고, 논리적인 타당성을 지니고 맞설뿐만 아니라 상대의 역린을 피해 감정적으로 호소해서 마음을 움직임으로 상대를 설득하여 협상에 성공함으로써 오히려 강동 6주의 땅을 얻게 되었습니다. 서희도 설득의 철칙인 역린을 피해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냄으로써 ‘설득의 달인’ 이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설득의 대가’ 예수님도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율법사들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고, 상대를 설득하여 죽음의 위기를 넘어 뜻하신 바를 이루실 수 가 있었습니다. 율법을 범한 죄인은 죽여야 한다는 율법과 살인,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밖에 없는 ‘양두논법’에 걸려들 수 없는 예수님은 상대의 의중을 간파하고 ‘감정적 수사학’으로 양심에 호소하여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상대를 설득하여 생명살림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도 물론 설득의 대원칙인 상대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식적으로 정확한 논리와 함께 무의식적인 정서적 공감대를 만들므로써 상대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영혼을 움직이게 하심으로 생명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품격높은 유세, 논쟁없이 상대를 설득하신 불세출의 명언 한 말씀, 생명의 성음(聲音) 한마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로부터 돌을 던져라!’
 
적군의 날카로운 창끝을 협력의 지팡이로 만든 협상의 달인인 서희가 상대의 역린을 피하여 설득함으로 요나라로부터 강동 6주를 얻어낸 공적을 생각해봅니다. 이제 우리 진리의 공동체인 과천소망교회도 2011년, 예수님의 마음으로 ‘역린(逆鱗)’을 피해 살기를 띄고 돌을 든 군중들을 설득하여 간음한 여인을 살려냅시다. 정곡을 찌르고, 양심에 호소하여 영혼을 움직임으로 생명살림의 역사를 이룬 그리스도의 설득의 비법을 취합시다.
 
옛사람은 죽고 그리스도안에서 새사람이 된 자마다 새로운 안목, 새로운 생각, 새로운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생각과 마음으로 바뀌어 그리스도와 같이 말하고 행동하는 자가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는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법입니다.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된 공동체(共同體)’로서의 제역할을 다하는 ‘작은 그리스도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뜻을 이루어 갑니다. 나로부터 시작하여 ‘나’와 ‘너’와 그리고 ‘우리’ 모두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본질이며 교회의 핵심 사역입니다. 이제 우리 간음한 여인을 빌미로 죽음의 덫을 놓았던 율법사들의 의중을 간파하고, 감정적 수사학으로 살기등등한 상대를 설득한 신기한 설득의 비법을 보이신 그리스도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상대를 설득하여 바꾸기 전에 먼저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이 때,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내가 ‘그리스도화’ 되어서 말하고 행동할 때, 상대의 손에 쥔 살기 띈 돌을 내려놓게 할 것이며, 상대가 내게 겨누던 창끝을 돌리고 화해의 악수를 청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심령의 두루마기를 청결케 하는 자들은 작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갑니다. 진리의 자녀들로 새로난 말과 행동을 하는 진리의 공동체로서 함께 상대를 설득하고 분쟁을 해결하며 생명의 열매를 영글어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같은 유세로 역린을 피하여 상대를 설득함으로 생명살림의 역사를 이루어 갑시다. ‘너희 중, 죄 없는 자부터 돌을 던지라!’ 품격높은 진리의 자녀들 답게 말하고 행동합시다. 역린을 건드리지 마십시오. 진리의 자녀들이여! 선악과를 피해 생명나무로 나아갑시다. 진리의 공동체여! 역린을 피해 생명나무로 나아갑시다.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2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