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게 하는 것은 거절하는 것이 아니다!’
베다니 마을에서 이제나 저제나 오시려나 하고 애타게 기다리던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왈칵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조금만 더 일찍 오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텐데...왜 인제 오셨나요...? 모든 게 다 끝나버리고 말았어요...’ 함께 눈물을 흘리시던 예수님이 나사로가 장사되어 있는 썩은 내나는 동굴무덤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 순간 죽었던 나사로가 수건으로 온 몸을 싼 채 살아 나왔습니다. 동굴 앞에선 주님은 주변사람들에게 그의 이름이 뭔지 물어보시지도 않고 거침없이 나사로라는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주님이 나사로를 알고 계셨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래, 양은 목자의 음성을 분별하고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아는 법입니다. 선한 목자되신 주님은 단순히 양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전부 아십니다. 주님은 부르신 자의 삶 전체를 통으로 아시며 이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명심할 것은 내가 주님을 안다하나 주님이 나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안다고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치유하는 등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했습니까? 그때에 주님께서 그들에게 밝히 말씀하시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마7:21-23) 내가 주님을 알 듯이 주님도 나를 알 때 참으로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들에게 천국의 기업이 주어질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소망인은 ‘우리가 주님을 알 듯이 주님도 우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복있는 자들입니다. 고난의 폭풍 속, ‘이제 모든 게 다 끝났다’고 체념할 수 밖에 없는 절망의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기다리게 하는 것은 거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너무도 잘 아는 주님이 조금 늦더라도 반드시 오셔서 나사로를 살려내시는 것처럼 결국 우리의 꿈과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너무도 잘 아시는 우리의 삶의 전체를 통하여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된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참으로 ‘아는 것의 의미’를 깨닫고 기다임의 자세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인생이야말로 복된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야 말로 진리와 성령에 의하여 ‘아는 것’으로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할 때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참으로 아시는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요13;1). 끝을 같이 하리라는 진실한 사랑! 소말리아 해적선 피해 환자들을 치료하는 ‘이국종’ 의사가 잔잔한 감동을 자아냅니다. ‘석선장, 그와 끝을 함께 할 것이라는 각오로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가 잘못되면 나도 이 의사직을 그만 둘 것입니다’ 개별적으로 각각을 너무나 잘 아시는 양들을 위해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우리와 끝을 함께 하시리라는 각오로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와 끝을 함께 하겠다’고 맹세하시는 주님의 진실속에 뜨거운 감동이 밀려옵니다.
‘주가 아시는 사람들, 만세전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calling),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도다’(엡1:4, 롬8:30) 주가 아시는 사람들, 만세 전에 미리 정하셔서 부르신 그들이 성화되고 영화로워 지기위하여 주를 따라 주의 길을 함께 가야 할 것입니다. 어디든 선생님을 따르겠다던 서기관이든 아니면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장사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했던 제자던 누구든지 주님이 이미 알고 계신 바로 그가 주를 따라 주와 함께 끝을 같이 할 자입니다(마8:18-22). ‘예정되어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주와 함께 어디든 지 갈 것입니다.’ 어디로 인도하시던 주를 따라 가는 우리는 주와 끝을 함께 할 것입니다. 기다림의 의미를 깨닫고 신앙인의 참된 삶을 살았던 ‘노아’처럼 우리도 ‘현대판 노아’가 되어 명하신 일들을 다 준행하며 주의 가족들과 끝을 같이할 각오로 최선을 다해 함께 승리의 결국을 목격 하고야 말 것입니다. 만세 전에 미리 아신 자들을 부르실 때,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 calling ‘나를 따르라!(Nachfolge!)’ 하시는 성음(聖音)을 따라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며 그리스도를 닮아 갑니다. 점차 거룩히 변화되면서 그리스도의 모습과 향기와 생명을 나타내고 작은 그리스도로서 말과 행동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된 인생은 일생을 죽음의 종노릇 하다가 허무하게 생을 마치게 되어 있습니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지만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다 죽어야 되는 ‘모순의 극치’가 죽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어 세상의 모든 권세자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들까지도 꼼짝 못하게 만듭니다. 죄의 삯이요 교만으로 인한 탐욕으로 말미암은 그 죽음의 권세 앞에서 모든 인생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두가지 뿐입니다. 그 죽음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던지, 아니면 그 죽음을 주관하는 분과 화해하든지... 이 두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길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갖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갖을 수 있게 된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요1:12). 이 하나님 자녀의 특권을 잘 활용하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죽음을 극복하고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는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고전15:54).
이런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최대한 활용하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점점 더 강해지는 법입니다. 부분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온전해 지는 승리의 삶을 영위해 갑니다. 청운의 꿈을 품고 대서양을 횡단하여 신대륙을 향해 가는 배를 타고 가던 영국 젊은이의 에피소드를 잊지 마십시오. 배삯에 포함되어 있는 배에서 누릴 수 있는 크나 큰 권리를 사장시키고 의기소침하여 궁상을 떠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 예수를 만나 그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그 특별한 권리를 마음껏 활용해야 합니다. 주와 함께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고 희망찬 미래를 개척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 믿음으로 영접하고 이제 주와 함께 갈릴리 바다의 배에 탄 제자들처럼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주님을 과소평가하거나 경박하게 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기치 않은 돌풍속에서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이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배는 절대로 침몰되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그 배에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폭풍속 금새라도 파선될 것 같아 보이지만 목적지를 향해 파도를 극복하고 나아가는 것처럼 주와 함께하는 우리 인생의 항해도 결코 잘못되지 않고 목표한 곳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믿음이 적은 자들아! 거친 파도와 풍랑을 향해 꾸짖으니 이내 잠잠하여 지니라!’ 온전한 순종의 대상인 주님과 함께 가는 자들은 모든 두려움, 극한 두려움인 죽음조차도 극복하고 점차로 강성해지고 완숙되어 지며, 영광된 뜻을 이루는 참된 승리자가 됩니다(마8:23-27). 죽음의 고난과 두려움이라는 풀무불 속에서 참으로 강하고 온전한 정금같은 인간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고난과 두려움 속에서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이스라엘인이 현재 그토록 강해진 것과도 같다 하겠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는 고난의 폭풍속 죽음같은 두려움을 극복해 나가면서 점점 더 강해지는 법입이다.
부분에서 시작하여 완전하게 되어져 갑니다. 적은 믿음(little faith)으로 시작하여 큰 믿음이 되어져 갑니다. 불완전한 순종에서 완전한 순종이 되어져 갑니다. 불온전한 사랑에서 온전한 사랑이 되어져 갑니다. 폭풍속 죽음의 두려움속에 있던 주를 따라 주와 함께 했던 베드와 및 제자들은 처음에는 책망받는 ‘적은 믿음'이었지만 부분에서 시작하여 온전하게 되듯이 큰믿음, 온전한 순종, 완전한 사랑으로 바뀌어져 가고, 거룩한 그리스도의 삶으로 변화되어 승리의 인생으로 마쳐지는 하나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됩니다.
참된 승리자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하나님 자녀의 영광의 특권을 마음껏 활용합니다.
‘+1’, ‘+Jesus’,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속에서도 ‘인자(人子:son of man)’를 플러스해서 한 사람을 더불어 계산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한사람이 더하여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화형에 처하라는 바벨론 왕의 엄명으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7배나 뜨거운 풀무불에 들어갔었는데 머리털 하나 끄스르지 않고 살아 나왔습니다. 들어갈 때는 세 사람이었는 데 풀무불 속을 가만히 들여다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한사람 더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불가사의한 바로 그 장면이 다니엘의 세친구가 신기하게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인자(人子)같은 이’가 함께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이기고 또 이기는 승승장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밧모섬의 유배자 요한도 생명과 승리의 열쇠인 그 ‘인자같은 이’를 본대로 기록하였습니다.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그의 눈은 불꽃같고...그의 오른 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그가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있는 자라,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계1:14-20)
주님을 따라 사는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기고 또 이깁니다. 주님을 모시고 가는 곳마다 흥왕하게 될 것입니다. 영국에서 메이플라워를 타고 신대륙에 도착하여 미지의 세계를 개척한 청교도 신앙인들 50여명이 지금 세계 최대 강대국 ‘미국’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세계의 유수한 역사가들의 증언대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의 중심 축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 역시 단 하나!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간 그 곳, 서양, 미국의 유명한 대학, 정치 경제의 중심부, 교육 문화의 핵심부에서 이제는 예수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석가, 노자, 공자등 동양의 사상과 문화를 모셔 들이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서양의 기독교에서 냉대를 당하는 예수님을 온 마음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 모셔 들이고 있습니다. 나라, 민족, 가정, 목장, 영혼, 마음 그 어디에나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곳마다 점점 더 흥왕하고 번성합니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시공간, 환경, 배경에 상관없이 주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곳마다 흥왕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곳마다 일어섭니다.’ 이제, 예수님을 우리의 인식에 모셔 들임으로써, 새로운 부흥과 영광의 역사를 이루어 갑시다. ‘두려워 말라!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내가 사망의 권세를 부숴뜨렸느리라!’ 주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는 승리자가 됩니다. 영원토록 순종할 대상 예수 그리스도! 주와 함께 희망찬 부흥과 영광의 역사를 이룹시다. 사랑하는 주와 함께 미래를 개척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