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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순종함으로 회복의 약속을 이루라. 2011-05-29

감사^^* 2011. 6. 7. 19:22

함께 순종함으로 회복의 약속을 이루라.
여호수아 6:8~20    2011-05-29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보다 앞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의 뜻’으로 결코 하나님의 뜻을 가로 막을 수 없습니다. ‘이삭’이 아무리 ‘에서’에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애썼어도 결국 ‘약속의 말씀대로’ 야곱에게 축복권이 주어졌습니다. 필연코 약속된 하나님의 뜻대로 다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기위해 가슴 저린 삶을 살았던 약속의 고리, ‘리브가’처럼 사는 자는 복 있는 자입니다. 정하신 날,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날, 약속의 말씀을 따라 ‘순종의 삶’을 사는 자는 복을 내리실 것이나, ‘거역의 삶’을 살아가는 자는 재앙과 저주를 내리실 것입니다.
 
‘학문은 닦을수록 지식이 늘고, 도는 닦을수록 지식이 줄어든다.’는 노자의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학문을 닦을수록 지식은 풍성해지나 그로인해 상대적으로 영성은 빈약해질 수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도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깊은 묵상과 겸손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학문적 지식과 기독교적 영성은 서로 역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道)’를 터득하여 기독교적 영성이 충만하기 위해서는 깊은 기도와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겸손이 가장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도(道)’는 세상의 학문과 지식의 차원을 달리하여 사물에 대한 현상에 주목하지 않고, 현상을 일으키는 본질과 원리를 밝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상의 학문과 지식에 기초하지 않고 은혜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신자를 신자답게’ 하는 십자가의 도가 성경에서 증거하는 썩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지식과 영성은 서로 상반적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학문으로 가득찬 지식의 책은 덮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서 제한받지 않고 자유롭게 영의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고,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속과 본질과 원리를 보지 못하고 겉모습으로 나타나는 ‘현상’에만 현혹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 들어오시면 먼저 눈을 감아야 할 것입니다. ‘육신의 눈’은 감고 ‘영의 눈’을 떠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뜻과 나라에 대한 본질과 원리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고 히브리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인 ‘십자가의 도’를 터득하는 영성이 충만한 자는 승리의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역함으로 사람처럼 죽지 말고, 순종함으로 신처럼 살라!’. 오직 순종함으로 잃었던 사람의 권리를 회복하게 됩니다.
 
사이비 소종파의 어느 교주는 자칭 하나님이라 하다가 ‘사람처럼 죽게 될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졌지만, 사람처럼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사람 ‘그리스도’가 잃어버린 영원한 생명을 되찾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잃어버린 인간의 권리를 되찾는 ‘회복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순종함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신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 회복이란 잃었던 것을 되찾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본래 사람에게 주어졌던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의 권리를 되찾게 됩니다.
 
신‘처럼’ 된다는 것은 신이 된다는 말일 수 없습니다. 예수처럼 된다는 것은 예수가 된다는 것일 수 없는 것이며, 예수처럼 된다는 예수‘화’도 예수처럼 된다는 것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라는 정체성이 없어질 수 없고, 오히려 너무나 분명하게 업그레이드되어 ‘그리스도화’되면서 나로서의 참 사람됨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수가 된다’는 의미는 하늘 보좌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루는 사명자가 된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너, 우리 모두가 예수가 되어서 온 땅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나와 너,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살라!’는 ‘그리스도와 하나 된 마음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영광의 보좌에 앉으셨느니라!’(빌2:1-1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천천만만의 수양의 제사보다 순종함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이다’(삼상15:2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사람으로 함께 순종함으로 더불어 살아나갈 때, 성전(聖戰)에서 함께 영광의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 공동체인 우리, 같은 마음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가야하는 소망인은 ‘리지웨이 장군’이야기처럼 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거룩한 전쟁을 해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6.25 전쟁시,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 대장이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전방을 시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리지웨이 장군이 이대통령을 모시고 최전방 전략지를 시찰하는 동안, 내내 참아왔던 소변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식은땀이 흐르고 정신이 아득해 지는 가운데, 몸을 뒤틀며 안간힘을 쓰고 참아왔던 장군은 이제 도무지, 달리 어찌할 수가 없어,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대통령께 양해를 구합니다. ‘각하, 소변을 좀 봐야겠으니 차를 잠시 세워야겠습니다.’ 이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자마자, 급히 차를 세우고 장군은 야산 숲속에서 소변을 보았습니다. 차안에서 대통령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의식하며, 소변을 보는 장군은, 창피하기도 하고 또 미안하고 죄송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때 대통령이 슬그머니, 장군의 옆에 와서 자신도 같이 소변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까? 순간,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던 장군은 이내 그것이 자신을 위한 대통령의 사려깊은 배려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는 가슴 속 깊이 스며드는 감동에 사로 잡혔습니다. 볼일을 마치고 지프차를 향하여 대통령과 함께 숲속에서 걸어 나오면서 리지웨이 장군이 어린시절을 부모님과 지냈었던 ‘짐바브웨의 속담’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If you want to go fast, you walk alone, But If you want to go far, walk with another.:빨리 가기를 원한다면 혼자 가라! 그러나 멀리 가기를 원한다면 함께 가라.”
 
“각하! 이제 일평생 각하 곁에서 각하와 함께 하겠습니다.”
사려 깊은 작은 배려하나, 작은 사랑으로 그 장군은 평생을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하기를 결심했고, 실제로 그는 그 후로 평생을 함께 하면서 그 이후에 겪게 되는 수많은 어려운 난제들을 해결해 주며 실제적인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리지웨이 장군은 후일, 이 대통령과 함께 한 것은 참으로 잘한 결정이고, 그와 함께 하는 것이 ‘참으로 즐겁고 행복했다’라고 회고하였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소변을 같이 봐준 ‘작은 배려’, ‘작은 사랑’ 하나로 일평생 함께하는 동반자(同伴者)로 살아간 자가 있다면 목숨까지도 기꺼이 버리는 ‘위대한 배려’, ‘위대한 사랑’을 받은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그 ‘위대한 사랑’을 배경으로 우리를 부르셨고, 의롭다 하셨고, 필연코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이 ‘위대한 사랑’에 감동되어 ‘주님’과 함께 끝까지 동행(同行)하는 자는 결국, 영광스런 좋은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진리가 증언하듯, 한번은 추락하지만 다시 솟구쳐 올라갈 것이고, 한번은 망하지만 다시 흥하고, 한번은 실패하는 것처럼 보여지나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한번은 죽는 것처럼 보여지나, 기필코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극적인 인생역전’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도(道)’를 가슴에 새기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자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 ‘인생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안식처요, 가난하고 불쌍한 죄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한몸 공동체로서, 이 사회에 ‘최후의 안전망’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멀리, 저 천국까지 가기를 원한다면, ‘나 혼자서’가 아니라, ‘우리 함께 가야합니다’. 주와 함께 가는 우리, 이웃과 함께 살아 갑시다. 한 마음되어 ‘동반자’로 살아가는 이 길의 끝에서, 우리 ‘함께’ 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하기로 결판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고 승리하리라’(창3:15) 이 ‘성전(聖戰)’에서 우리는 필승(必勝)할 것입니다.
 
우리 소망인은 영원히 함께 살아갈 상생공동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썩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향해 함께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이웃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에 끝까지 절대순종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순종의 정신을 일깨우십시오. 절대순종이라는 그 약속의 정신으로 무장하여, 그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에 승리하신 그리스도처럼 영광의 보좌에 앉게 됩니다.
 
출애굽후, 40년간 혹독한 훈련을 받은 광야의 길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사는 자들만 남겨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했던 고라와 다비딤등의 잡종들은 다 멸망하고 성령의 북소리에 발맞춰 어디로 인도하던지 순종하는 자들만 여호수아와 함께 여리고 성문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현상적으로 보면 전술같지도 않은, 유치하게 보이는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명하여진 필승전략이었던 ‘여리고 작전’대로 남녀노소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체 잔말하지 않고 침묵하며 여리고 성주위를 함께 돌았습니다. 그때까지 현상적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무런 조짐도 생겨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티핑 포인트를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 일곱째 날, 일곱바퀴째를 돌면서 하시는 말씀에 ‘순종’하여 함성을 질렀습니다. 그 승리의 함성으로 난공불락인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수6:1-21).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를 이루시기위한 본질이요 원리인 ‘순종’의 비법을 일깨우는 성경속의 모범적 예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던 순종의 삶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뜻대로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시는 말씀에 절대 순종함으로 하나님 사람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하옵소서! 현상적으로 보이기는 최하위의 저급한 작전과 전략으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된 최상위의 차원을 달리하는 고급의 작전으로 여겨져 모든 백성들이 함께 순종했던 ‘여리고 사건’에서 깨닫게 되는 성경의 본질적 원리처럼 여리고 성을 일곱째 날, 일곱 바퀴 돌 때에 일곱째 천사의 소리내는 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한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비밀이 다 이루어 질 것입니다.
 
과천의 개발과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바라보면서, 모든 일을 합하여 회복의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약속된 말씀대로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약속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낙타무릎이 되어 절대 순종하게 하옵소서! 절대순종의 원리를 따라 썩지 않는 영원한 생명에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영광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과천소망교회, 이 곳이 얼마나 귀한 은혜의 고향이며, 과천소망공동체, 우리가 어떻게 맺어진 사람들입니까? 순종시스템이 회복되며 하나님의 사람들된 우리는 절대로 나뉘거나 분쟁해서는 안되는 한 마음, 한 뜻으로 같은 곳을 향해 함께 가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을 얻기 위해 함께 순종함으로 회복의 약속을 이루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