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거라, 참되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라!’ 스승의 은혜는 가이 없습니다.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됩니다. 태어난 때와 삶의 자리에 대한 감사와 함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라는 ‘스승’이 있음을 감사했다고 합니다. ‘세월’이라는 스승, ‘고난’이라는 스승, ‘자연’이라는 스승의 가르침으로 부터의 깨달음이 소중합니다. 무엇보다 위대한 스승인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의 말씀’으로부터의 깨달음은 참으로 소중하다 할 수 있습니다.
스승의 주일 예배시간에 일본의 농업혁명가인 ‘기무라 아키노리’씨에 얽힌 다음과 같은 ‘스승이 된 도토리’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제발 죽지만 말아다오!” 말라 죽어가는 사과나무들을 바라보며 속수무책인 농장주인 기무라 아키노리. 그는 비통한 표정으로 더 이상 아무 말도 이어가지 못한 채 해저문 농원을 떠날 줄 모릅니다. 마사노부가 쓴 자연농법을 읽은 후 그 감동으로 사과를 자연농법으로 재배하겠다는 신념과 끈기로 지난 5년 동안 꿋꿋하게 천연퇴비만을 사용하고 해충을 직접 손으로 잡으며 사과 하나하나 봉투를 씌어주면서 지극정성으로 보살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수확량 감소, 말라 죽어가는 사과나무, 눈덩이처럼 빚은 늘어가고, 아! 이젠 끝이로구나~! 결국 자살을 결심, 산에 올라 목을 매려는 순간 그동안 무심코 봐오던 상수리나무에 가득 달린 도토리가 새롭게 보입니다. 숲속에는 벌레도 잡초도 많은데, 농약도 없이 이렇게 잘 자라는 이유가 뭘까? 무엇 때문일까? 인식의 변화는 기적의 시작입니다. 새로운 인식의 변화는 시작되고 죽으려는 결심도 바뀌게 됩니다. ‘원인은 흙’, 자연의 흙은 농장의 흙과 다르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기존재배의 방식을 뒤엎는 역발상으로 접근합니다. “최대한 가꾸지 말고 방치하자.” 그동안 사용되던 농약, 화학비료는 물론 천연비료 및 농기계조차 일체의 사용을 금지합니다. 그러나 먹이사슬의 치열한 줄다리기 선수들인 잡초, 해충, 들쥐, 토끼 등은 환영! 기무라씨가 할 일은 오직 병에 걸릴 경우 물과 식초를 공급해주고 진심어린 대화를 나누어 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 일본전역을 발칵 뒤집은 기적의 ‘썩지 않는 사과’가 탄생합니다. 온라인 판매 3분만에 품절. 일본 요미우리, 아사이, 마이니찌 등 언론사 집중보도 ‘썩지 않는 기적의 사과!’ 100프로 자연농법이 만든 기적. 농약에 의존하지 않고는 재배자체가 불가능한 농장의 현실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1991년 아오모리 현 4성급 태풍이 강타했을 때 대부분의 사과농장은 전멸합니다. 그러나 기무라씨 농장은 80프로 수확량을 확보합니다. 기무라씨의 기적의 썩지 않는 사과 농장토양과 사과잎 표면에는 사라카미 산지의 원시림에서나 볼 수 있는 유익한 미생물들이 활발히 생존하고 있어서 다른 농장에서는 볼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환경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히로시마 대학 농업생명과학부의 ‘스기야마’ 교수는 기무라씨의 사과농원이야말로 철저하게 자연 그대로 관리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생각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치명적 한계, 모든 적들에게 노출되어 있는 식물들의 처절한 생존경쟁, 그러나 그들에게도 ‘자기방어 시스템’이 있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옥수수, 갑자기 애벌레가 나타나 잎을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적이다” 그러자 비상이 걸리고 뿌리와 가지들은 화학성분을 만들어 잎사귀를 통해 방출합니다. 애벌레의 천적인 말벌이 가장 좋아하는 냄새입니다. 어느새 말벌들이 나타나 애벌레를 잡아먹습니다. 손가락 까닥 안하고 적을 퇴치하는 자기방어 능력이 참으로 뛰어납니다. 원시림과 흡사한 토양에서 자란 기무라씨의 사과나무는 이처럼 잃었던 자기방어 시스템이 회복된 것이며 썩지 않는 사과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반면에 애벌레를 잡기위해 농약을 살포하면 여지없이 자기방어 시스템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할 것입니다. 애벌레가 아닌 농약의 독성에 대처하기 위하여 자기방어 시스템의 체계가 바뀌기 시작할 것이며 이로 인해 유전자의 변형이 올 것입니다. 오염된 종자들은 자기방어 시스템을 더 이상 작동시키지 못할 것이며 농약에만 의존하는 변형된 씨앗으로 유전되기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목합니다. 기무라씨의 신념과 끈기를.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말라 죽어가던 사과나무의 ‘자기방어 시스템의 회복’입니다. 기적의 썩지 않는 사과의 탄생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입니까? 이는 사과나무의 기적이 우리자신들의 자기방어 시스템의 회복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방어 시스템의 회복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미래에 또 다른 이름의 희망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리라...”(시82:6-7) 성경말씀에 신들의 재판이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공의를 거스린 우매한 신들은 신들이라도 죽을 것으로 전락된다 하는 것이니 참 가혹하다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매한 신들을 불러 모은 후, 행위의 경중을 따라 신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도 사람처럼 죽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들이 사람처럼 죽게 된다면 사람은....? 혹 짐승처럼 죽게 된다는 것은 아닌지....! 이 성경 말씀이 자기방어 시스템이 망가지면 신들조차 사람처럼 죽어간다라는 의미로 들리는 것은 우리 또한 자기방어 시스템의 회복을 구하는 간절함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자기방어 시스템은 우리의 참된 희망입니다.
진리가 시작되는 그곳, ‘에덴동산’에서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위대한 걸작품으로서 원래 죽지 않도록 만들어 졌었습니다. 창조의 질서를 따라 공의롭게 살아갈 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면서 영원토록 복락을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질서를 깨고 공의를 어그러뜨림으로써 영생의 권리를 잃어버리고 동산 밖으로 내 쫒겨 죽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 사람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으니 내 말대로 정녕 죽게 될 것이다. 그런 이 사람이 동산중앙에 있는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게 되면 영생을 하게 될 것이니, 그리되지 않도록 동산 밖으로 쫒아내고 그 길을 두루도는 화염검과 천사들로 지키라.’(창3:17-24)
비밀을 말하자면 ‘사람’은 원래 ‘신(gods)’이었습니다. 사람은 처음 만들어 질 그 당시 죽음을 모르는 존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지 않는 존재였기 때문에 사람을 신이라 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사람을 만들 때 사람은 죽지 않게 만들어져 신처럼 살 수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물론 이 때 ‘신(gods)’과 같다는 표현은 ‘하나님(God)’과 동일본질인 존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천지 등의 이단종파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사람은 결코 하나님(God)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God)’이 죽지 않는 ‘신(gods)’과 방불하게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쏙 닮아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과 같은 ‘신의 성품’을 지닌 위대한 피조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시편82편’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사람’을 가르켜 ‘신(gods)’이라 칭하신 의미 있는 가르침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원래 죽음을 모른 채, 영원히 살도록 지음 받은 ‘신(gods)’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들도 하나님의 질서와 공의를 거스려 행악하면 사람처럼 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니, 하물며 사람이 하나님의 질서와 공의를 거스려 불순종하면 어찌 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억하고, 만물이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필연적 선택이었던 ‘선악과’, 즉 사람이 하나님의 질서와 공의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심어둔 동산중앙에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그만 ‘죽음’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에덴의 낙원에서 생명나무를 뒤로 하고 쫓겨난 사람은 이 땅에서 살면서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하신 말씀대로 죽기 시작했습니다. 농약이나 인위적인 화학비료에 의존해 유전자가 변형됨으로 자기방어 시스템이 망가진 사과나무가 점차 말라 비틀어져 죽어갔던 것처럼 죄악 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공의를 거스리며 인위적인 세상의 것들에 의존하여 유전자가 변형됨으로 자기방어 시스템이 망가진 사람들 역시 점차 말라 비틀어져 죽어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타락된 사람은 일평생 ‘죽음의 종’이 되어 허무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덴의 낙원에서 쫒겨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며 그 사람들을 외면치 않으시고 긍휼을 베푸시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폐쇄하라!’하시지 않으시고 불칼과 천사들로 ‘지키라!’ 명하심으로써 누군가 어떤 사람들이 다시 그 길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희망)을 남겨 두셨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다면 분명하게 바로 이같은 성경속 진리를 말해줘야 할 것입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생명나무로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니라!(계22:14)’ 이러한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복된 우리에겐 참된 희망이 있습니다.
썩지 않는 사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가슴이 이렇게 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방어시스템이 회복되면 우리도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을 수 있다는 확신에 찬 희망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때가 차서 만물은 ‘회복’되기로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 또한 온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잃었던 기능도, 조직도, 시스템도, 세포도, DNA 유전자도 ‘죄악으로 변형’된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변화’되어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새롭게 태어나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원래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셔서 에덴의 낙원에서 창조의 섭리와 질서 가운데 영원히 죽지않고 참사람답게 사람값을 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신, 잃었던 사람의 권리를 되찾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너희가 나를 믿으면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썩지 않는 ‘영원한 생명’은 전설이나 신화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이며 ‘실화’입니다. 허상이 아닌 실상의 역사입니다. ‘영생’의 소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입니다(디1:2).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온 마음으로 찬양합시다.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대로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렸습니다. 옳습니다. 이 ‘예수의 부활 때문에’ 우리가 ‘새로 태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썩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꿈꾸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잃어버린 자기방어시스템이 회복되어가는 참사람이 되어 썩지 않는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어 ‘썩지 않는 기업’을 잇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온 ‘바울’도 증언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불가불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겠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15:51-53) 소설책 등의 여타 책들과는 차별되는 성경 속에 이런 놀라운 희소식, 복된 뉴스가 ‘진리의 대하’가 되어 우리 가운데로 도도히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미래에 간절히 꿈꾸고 희망하는 썩지 않는 인생, 썩지 않는 기업, 썩지 않는 행복의 나라여, 어서 임하시옵소서! 할렐루야! 하나님의 기운으로, 자기 방어력을 되찾게 하옵소서! 아멘 할렐루야!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과 성령으로 잃었던 자기 방어 시스템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