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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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난 방주의 새 일에 참여하자 [출애굽기 1:21-2:12] 2011-06-19

감사^^* 2011. 6. 30. 16:31

네모난 방주의 새 일에 참여하자 [출애굽기 1:21-2:12]
출애굽기 2:21~25    2011-06-19
 
 
모든 일에는 ‘원인(原因)’과 ‘결과(結果)’가 있습니다. 현상 너머 본질을 꿰뚫어 보면 천하의 모든 일은 결국 ‘구원의 일’을 이루기 위한 원인과 결과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깨달음 가운데 좋은 씨를 뿌려야 그것이 원인이 되어 좋은 열매로 결과 되어 질 것입니다. 오늘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어제 내가 뿌린 것의 결과라 할 수 있고, 내일의 우리 모습과 처지는 오늘 무엇이든 우리가 뿌리는 것이 원인이 되어 결과로 나타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리허설이 없는 인생, 그래서 잘못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란 연극에서 과거의 실수를 곱씹으며 ‘후회의 굴레’에 갇혀 술이나 마약으로 마음을 달래며 인생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난 과거의 잘못을 돌이킬 수는 없으나 ‘앞으로 더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나가야 합니다. 오늘, 희망찬 믿음으로 사랑과 생명과 행복의 씨를 뿌립시다. 바로 당신이 뿌린 그 사랑과 생명과 행복이 원인이 되어 ‘구원사’에 영원히 기록되어 추앙되는 상상할 수 없는 축복된 결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같은, 모세와 같은 ‘사람을 통하여’ 구원의 일을 이 땅에서 이루십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새 일을 믿으라고 권유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이란 하나님이 하시는 새 일에 믿고 참여(參與)하라고 권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지금도 구속사(救贖史)를 주도하시며 인간을 살리시고자 하시는 구원의 새 일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올바로 깨달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오늘, ‘참여하는 자’는 참으로 복이 있는 자입니다. 성경은 지식의 풍요를 요청하지 않고, ‘믿고 참여할 것’을 요청합니다.
 
신실한 신자가 홍수가 나자 하나님께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와 홍수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으로 믿고 기도하였습니다. 빗줄기는 장대같이 굵어지고 집안으로 물이 밀어닥치자 그는 다락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올 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기도하는데 삽시간에 물이 다락방에까지 차올라 허둥지둥 지붕위로 올라가서 소리쳐 부르짖습니다. 그때 거센 폭우를 헤치고 할아버지 한분이 뗏목을 저어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이보게, 곧 집이 무너질 것 같으니 빨리 이 뗏목으로 옮겨 타게나’ ‘아니요 이제 곧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하늘에서 밧줄을 내려주실 겁니다. 그러니 그냥 가십시오.’ 계속되는 그의 간절한 기도에도 물은 점점 불어나 가슴팍까지 급기야 코밑까지 차올랐을 때 방금 전의 그 노인이 다시 돌아와 재촉했습니다. ‘이보게 빨리 타게, 이 뗏목에 타야 살 수 있으니 어서 타라구’ 그는 ‘내 믿음을 시험하지 말라’하며 버럭 화를 내면서 그 노인을 쫓아버린 후 더욱 더 큰소리로 울부짖습니다. ‘주여! 하늘에서 밧줄을, 밧줄..’하다가 ‘꼬르륵’하고 그만 물에 빠져 익사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자 삿대질을 하며 소리 높여 항의했습니다. ‘하나님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내가 하늘에서 밧줄을 내려달라고 그렇게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를 드렸건만 어째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신 겁니까?’ 그때 하나님의 보좌 옆에서 한 할아버지가 달려 나와 항의하는 그 사람의 따귀를 세차게 후려쳤습니다. ‘이런 멍청한 작자 같으니라고. 네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는데, 내가 뗏목을 타고 가서 물에 빠져 죽기 전에 너를 구원하려고 얼마나 간곡하게 권유했는가. 기도의 응답으로 보내신 구원의 뗏목에 옮겨 타기를 네가 거절하지 않았느냐’하며 호되게 나무라는 그 노인 앞에서 그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으로 확신에 차서 기도했습니다. 다윗 왕과 같은 정치적 메시야가 올 것을 고대하는 가운데 간절히 기도해왔던 그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메시아인 예수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참된 구원자인 메시야 예수를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생각의 틀 속에 갇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다가 그만 죄악에 빠져 죽고 만 것입니다. 아무 검증 없이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정신적 질병인 ‘편집증적 집착’과 ‘참된 믿음’은 다른 것입니다. 구원 얻을 신자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말씀을 근거로 참된 믿음을 갖습니다. 참된 신자는 ‘다가오는 새 것’에 대한 확신으로 구원의 역사에 참여합니다. 복음이란 하나님께로부터 다가오는 새 일에 참여하라고 권유하는 것입니다. 오늘, 다가오는 새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새 일에 참여하는 참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새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미래로부터 오는 것(coming God)’이기 때문에 이전에 경험했었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과 ‘새로운 형태와 사건’으로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처럼 다가오는 새것에 대한 참된 믿음으로 그 일을 받아들여 참여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본래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고 히브리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십자가의 새 일을 거절하여 십자가의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스꽝스런 네모난 배인 ‘방주’를 강도 바다도 아닌 산중턱에 짓는 노아의 방주사건도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새 일임을 잘 알지 못해 참여하지 못했던 무관심했던 사람들, 그저 사고 팔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겉사람의 일에만 몰두했던 불쌍한 사람들은 다 불행한 결과를 당하고 만다는 역사의 교훈입니다. 겉모습에 가려져 있는 현상너머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면 그저 복주시기 위해 ‘다가오는 새것’, ‘다가오는 새일’에 참여하지 못하여 영생복락의 역사 밖에서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새 일을 깨닫고 그 새 일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자는 천복이 있는 자입니다. ‘보라! 멸시하는 자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말할 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그러나 영생 받기로 작정된 자들은 다 믿고 그 구원의 일에 참여하느니라.’(행13:41,48)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의 일에 참여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모세의 방주(ark)’, ‘노아의 방주(ark)’, ‘제 3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방주(ark)’에 타는 자만 생명을 구하고 구원을 얻습니다. 천국의 기업을 얻게 되며 영원한 지옥의 심판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의 새 일은 ‘때맞춰’, ‘사람을 통해’, ‘제3의 힘’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기한 역사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역사입니다.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자는 웨슬레의 천국 간증처럼 감리교인, 장로교인, 성결교인, 침례교인, 순복음 교인이 아닌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가 꿈결에 천국과 지옥에를 가봤다는 간증도 있습니다. 두 군데 모두 수려한 경관과 산해진미 진수성찬이 똑같이 차려져 있었는데, 지옥에서는 사람들이 피골이 상접한 초췌한 몰골로 서로 욕하고 싸우며 땅바닥에 음식이 난장판이 되어져 있는 아비규환의 현장임에 반해, 천국에서는 똑같이 차려진 진수성찬을 즐기며 기름진 환한 모습과 웃음이 떠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만족해하는 절대행복의 현장이였습니다. 동일한 상황에서 이처럼 극히 상반된 결과가 초래된 원인은 사람 키만 한 젓가락을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지옥에서는 그 긴 젓가락을 사용해 자기 입에다만 음식을 집어넣으려고 애쓰다 보니 결국 아비규환의 현장이 되어버린 것이고 그와는 반대로 천국에서는 먼저 상대의 입에다가 음식을 넣어주다보니 모두가 배부르게 되고 웃음이 끊이지 않는 화기애애한 낙원이 된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란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다 하겠습니다. 사랑이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같은 아담 스미스의 천국간증과 그의 경제 원리에 관한 다음의 이야기는 오늘 경기도 과천, 문원동이라는 ‘삶의 자리’에 살고 있는 참된 과천소망교인, 참된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뜻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개인의 이기심을 자극하지 않고서는 왕성한 경제활동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 그의 경제 이론은 경제 활동의 근본적인 동기를 개인의 이기심에 의한 상호 경쟁과 충돌하는 과정을 거쳐 종국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전체의 공공복지에 기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경제학자인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미묘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또한 중국 공산체제의 경제 정책의 기조를 바꾸어 낸 탁월한 지도자 등소평도 이런 말을 합니다. ‘오늘날 공산 진영 안에서 불고 있는 바람은 누구도 거역 할 수 없는 세계적인 대기후다. 이제 검은 고양이던 흰 고양이던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 ‘흑묘백묘론’의 이 말은 백성을 잘 먹여 살릴 수만 있다면 이념이 다른 자본주의 경제체제도 받아 드리겠다는 뜻입니다. 부정하거나 거역 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기는 있는 모양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던, ‘거역할 수 없는 바람’이던 대체 이손과 바람은 무엇이며 또한 어디서부터 오는 것들일까요. 보이지 않는 실체, 도저히 거역 할 수 없는 차원을 달리하는 다른 힘이 분명코 실존합니다. 신의 섭리라고 표현해도 될법한 인류의 역사에 개입하는 화해와 조정의 손길인 이 바람과 손! 통제하기 어려운 경제활동의 방향을 공공복지 쪽으로 갈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고, 변할 수 없는 공산권의 경제 정책을 변환시키는 ‘나의 힘, 모두의 힘이 아닌 제 3의 힘!’ 이 위대한 힘이 바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유추해 보건데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수단을 통해 ‘보이지 않는 손’과 ‘거역할 수 없는 바람’의 힘을 일부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아마 화폐일 것입니다. 그 속에는 경제적인 생활 방식이 들어 있으므로 누구나 이성적으로 느낄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흔히 돈이 최고야’라는 이 밑도 끝도 없는 논리가 통용되게 된 출처입니다. 둘째는 시인의 감성적 언어와 철학적 사고방식을 통해 제한적으로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는 ‘돈이면 다야’가 아닌 돈을 옳게 쓰고 난 후 얻게 되는 행복감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화폐가 가지고 있는 위험으로부터 더 이상 추락하지 않도록 붙드는 최후의 보루라는 생각입니다. 경제 전문가가 아닌 본인으로서는 이념이 아닌 옳은 철학적 사고방식이 경제를 앞서 있을 때는 건강 할 것 같은데 그 반대로 모든 것을 경제논리로 정의한다는 것은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안심 하십시오. ‘제 3의 힘’이라 표현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내시는 손길과 거역할 수 없는 바람 즉 ‘하나님의 힘’이 모든 것을 조정할 것이며 예수와 그의 부르심에 응답한 여러분들과도 그리고 우리 과천소망교회와도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고 소망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일들이 혼란하더라도 평온을 잃지 않는 당신의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사랑을 봅니다. 그 보이지 않는 손, 거역할 수 없는 바람인 하나님의 제 3의 힘이 오늘 우리와도 함께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출애굽의 구원사역을 위해 보내신 자 모세와도 함께 하고 있었으며, 모세의 구원 프로젝트라는 위대한 사역에도 주도적으로 개입하여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던 모세의 부모 아브람과 요게벳 가족을 통해 모세를 살리기 위한 시도를 감행합니다. 갈대로 네모난 상자 배인 방주(ark)를 만들고 역청을 칠합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방주를 짓는 일은 그것이 원인(原因)이 되어 가족과 민족모두가 살아나는 생명 도미노의 축복이 결과(結果)되는 위대한 구원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에 붙잡혀 있는 방주에 태워진 모세는 때맞춰, 나일 강가에 띄워 보내지고, 때맞춰 바로의 공주가 목욕을 하러 나와 물가로 들어갑니다. 서로의 시간이 조금만 어긋났었더라면....!!! 참으로 신비한 타이밍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일분일초의 오차도 없이 정확무오한 법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깨닫고 확신하는 자는 결코 낙심하거나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공주는 거역할 수 없는 무언가의 힘에 이끌리어 갈대 상자를 열어 그곳에 석달된 아이가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나일강물에 빠뜨려 죽여야 할 히브리 아이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측은지심에 그의 마음을 움직여 모세를 구해 자신의 양자를 삼아 왕궁의 교육을 받게 합니다. 게다가 친엄마가 유모가 되어 물질적, 정신적 필요를 채우게 하시는 신묘막측한 출애굽의 구원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나, 거역할 수 없는 바람과 같은 그 무언가 제3의 힘에 의해 주도되는 생명살림 구출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영광과 존경과 찬양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믿고 사랑할만한 분이시고 그의 구원의 일,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그 참된 일에 우리 인생과 일생의 모든 것을 드려서 참여할 만한 고귀한 가치가 있다 하겠습니다(출1:21-2장12).
 
이처럼 제 3의 힘에 의해 주도되는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일’, 참된 ‘행복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는 자’는 천대까지 복을 받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과 제네바교회가 주도하여 제네바시를 유럽사회의 위대한 도시로 만든 ‘제네바 성시화(聖市化) 운동’은 역사상 최고로 평가 받는 제3의 힘에 의한 성화운동이요 구원의 역사이었습니다. 제네바 성시화운동처럼 제3의 힘에 의해 주도되는 온리 원의 과천소망교회도 생명을 살리는 ‘방주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함으로써 과천 지역사회 전체의 공공복리를 증진하는 행복한 사회건설에 누룩과 같은 역할을 하며 구원사를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하시는 이 구원의 새일에 참여하는 자를 바라보시며 하나님은 미소를 지으실 것입니다. 좋은 씨를 뿌리면 함께 좋은 결과를 누리고, 함께 더불어 잘 사는 행복공동체, 복지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게 됩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새일에 참여하라고 권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 일에 참여자는 복이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방주인 교회의 사역, 대그룹과 소그룹, 영적 프로젝트와 물질적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사람을 ‘미소 메이커’라 칭합니다. 오늘, 생명선이요 구조선인, 네모난 방주의 새 일에 참여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