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벤에셀!’ 여기까지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시간과 순간 예술이라는 공연은 몇 번이고 ‘리허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연극’에는 리허설이 없기 때문에 실수가 많은 법입니다. 과거의 잘못에 발목이 잡혀 ‘후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오지 못한 채, 시간과 미래를 낭비하는 바보 같은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과거의 잘못을 돌이킬 수는 없지만 앞으로 더 잘할 수는 있습니다. 남은 2011년 하반기를 시작하는 오늘부터 앞으로 희망찬 미래를 향하여 더욱 더 잘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타인과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에 좌우되어 살아가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오늘부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미소 메이커’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과 세상에게 인정받는 삶이기보다 우선 ‘주님께 인정(認定)받는 삶’을 살아가는 인생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자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수 플러스(+)!’ 예수를 만나 뵈면 도움을 얻습니다. 예수와 함께 동고동락하며 살아가는 자는 예수와 ‘닮은꼴’ 삶을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이제부터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안의 예수가 사는 것이니라!’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이 땅에서 ‘또 하나의 예수’로 살아가는 가장 멋지고 값지고 행복한 ‘요셉들’이 될 것입니다. ‘더한다.’는 플러스(+)의 이름 뜻을 가지고 있는 요셉!, 예수의 본보기이자, 우리 신앙의 멘토인 ‘요셉처럼’ 꿈을 사랑함으로 함께 꿈꾸는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게 될 것을 확신하면서 다음의 이야기를 음미합니다.
한유의 잡설(雜說)에 나오는 이야기 한토막입니다. 당나라 때, 한 마부가 급전이 필요해 아꼈던 준마를 마시장에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말을 거들 떠 보지도 않은 채 몇 날이 지나던 중, 말감별사인 ‘백락’이 마시장에 나타났습니다. ‘백락이 나타났다. 백락이 나타났어.’ 수군대며 몰려드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락이 그 말곁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말 주위를 돌며 ‘오! 이런 곳에 이런 말이 있다니, 잘 키우면 명마가 되겠군.’하며 그곳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의 무관심속에 버려졌던 그 초라한 말은 순식간에 주목받는 말이 되어 높은 값에 팔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이런 고사가 생겨났습니다. ‘백락이라는 사람이 있어야 천리마가 있을 수 있다.’
그렇습니다. 천리마는 늘 있지만 백락은 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명마라도 노예의 손에 이끌리면 잡일을 하는 평범한 말로 생을 마칠 것이며 천리마란 칭호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좋은 인재를 가려낼 줄 알고 그 능력을 키울 줄 아는 백락 같은 사람은 모든 일에 필요한 ‘리더형’일 겁니다. 백락의 예리한 눈, 어떻게 말가죽을 뚫고 그 안에 재능과 가능성을 볼 수 있을까? 이는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백락과 비교할 수 없는 한분을 기억합니다. 사람을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지신 분. 그분은 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볼 수 있느냐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조차 없는 분. 백락이 말의 전문가라면 이분은 하늘의 전문가, ‘예수’십니다. 이 분이 중요한 이유는 백락이 있어야 천리마가 있듯, 이분이 계셔야 마시장에 널려 있는 수많은 말들 중에 백락이 명마를 찾아내듯, 흩어져 잃어버린 피조물들 중에 ‘하나님의 아들들’을 찾아 낼 것이며, 그것만이 영원히 잊혀져가는 희망이 없는 ‘피조물의 미래’에 대한 진정한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할 일은 많은데 일꾼이 없구나.’ 이 구인 광고로부터 마시장에 모인 말들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광고지의 내용이 특별합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은 와서 그 짐을 내려놓고 쉬라. 또한 너희를 얽매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리라’는 일반적인 구인광고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내용들, 이것은 여러모로 보아 광고 전단이 아닌 초대장이 분명합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존재이유를 볼 줄 아는 분,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잠재력을 보고 그 심지에 불을 붙여, 꺼져가는 모든 것들에 새로운 열정으로 다시 살릴 수 있도록 불을 당겨주실 수 있는 분, 바로 ‘그분의 부르심’이 분명합니다. 백락을 만난 말처럼 예수를 만나십시오. 당신의 앞날이 바뀔 겁니다. 생각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고, 말이 달라지고, 꿈이 달라 질 것입니다.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들에 간섭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만일 청소하는 일이 맡겨진다면 베토벤이 작곡을 하듯,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리듯, 셰익스피어가 시를 쓰듯 하십시오. 초청받은 과천소망인, 과거의 잘못을 돌이킬 수는 없지만 앞으로 더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당신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Jesus Plus(+)! 예수를 만나 뵈면 도움을 얻고, 희망찬 미래가 열립니다. 우리가 예수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찾아 오신 바 된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이기 때문에 결과가 좋은 법입니다. 십자가의 고난도 모두 합하여 결국 선을 이룹니다. 십자가의 복된 과정을 다 지나면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십자가의 도’를 잊지 마십시오.
‘진리의 성령이 오시는 그날에는, 예수가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 또한 보혜사 성령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할 것이라.’(요14:16-20). 예수가 세상을 이겼듯이 우리도 세상을 이길 것이며 ‘여자의 후손’, ‘예수’로 인해 우리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생명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 ‘예수’께서 아시어 ‘부르시는(calling)’ 그 이름들은 복 있는 자들입니다. 복주시기 위해 미리 정한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며, 결국 영화롭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롬8:28). 그런 소명자들은 온 세상에 영광을 나타내는 ‘꿈꾸는 사람들’로 ‘눈물의 과정’을 잘 극복하여 요셉처럼 실제로 총리가 되는 꿈을 성취함으로써 가족과 민족을 살리게 됩니다. 꿈은 ‘혼자 꾸면’ 꿈으로 남아있지만, ‘함께 꾸면’ 현실이 되는 법입니다. 주와 함께 꿈꾸는 자는 ‘폭풍(暴風)이 복풍(福風)이 됩니다.’
올해로 6,25 전쟁 발발 61주년이 되었습니다. 2011년 6월21일자 모 신문기사를 통해 북한 내 기밀문서의 보고 대로 인육(人肉)을 먹는 북한의 처참한 현실, 굶어 죽어가는 동족의 비보를 접합니다. 원래, 61년 전에는 기반시설과 함께 수많은 공장이 즐비해서 남한보다 훨씬 부유하게 살았었던 북한이 오늘날 배가 고파 사람이 사람을 먹는 끔찍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저런 수도 없는 인간사의 문제가 산재해 있기는 해도 남한은 세계 경제대국 10위로 성장해 최 빈민국인 북한에 비해 국민총생산은 무려 44배 차이가 나게 되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수 백 명씩 굶어 죽어간다는 북한 동포의 참상을 전해 들으며 61년간 세월동안 한반도에 나타난 비극적 간격이 실로 안타깝습니다. 가슴 아픈 북한과 남한의 이 차이는 과연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요컨대, 이런 북한과 남한의 차이는 ‘믿음의 차이’, ‘신념의 차이’이며 바로 ‘꿈의 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실로 ‘김일성 주체사상’과 ‘예수 주권 신앙’의 차이 때문에 엄청난 결과가 초래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 ‘망상’에 불과하지만 예수인들의 꿈은 반드시 실현될 참된 이상임을 성경이 증언합니다.
예수 플러스(Jesus plus +)! 요셉의 집들(houses of Joseph) 플러스(Plus +)!, 우리 과천소망교회, 소망인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요셉의 꿈’을 통해 ‘하나님의 꿈’을 이루듯, ‘우리의 꿈’을 통해 ‘하나님의 꿈’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의 과정을 통해 모든 것이 플러스(+) 되어 꿈꾸는 꿈이 성취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웅덩이에 갇혀서 ‘서러움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며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이집트 바로왕의 근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주신 꿈을 사랑했기 때문에 섭섭함과 분노로 자신의 삶을 파멸의 구렁텅이속에 밀어 넣고 무기력하게 허송세월하는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께 인정(認定)을 받으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맡겨진 ‘적은 일에 충성’을 다하다 보니 보디발의 마음을 얻어 점점 더 큰일을 맡게 되다 급기야 창고열쇠를 도맡아 관리하는 청지기가 됩니다. 그러나 이런 노예 출신 청지기로서의 성공과 광영도 잠깐, 보디발 부인의 누명으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요셉은 쓰라린 ‘억울함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꿈을 사랑했던 요셉은 ‘과거는 미래의 발목을 잡을 수 없다’고 확신하며 억울한 상황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는 감옥살이를 하는 자신의 운명을 통탄하며 원한 맺힌 복수의 칼을 갈면서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으로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하루하루의 꿈을 모아 기적을 이룹니다. 꿈은 행동을, 행동은 기적을 만드는 법입니다. 꿈꾸는 사람 요셉은 감옥에서조차 부지런히 할 일을 찾아 일하다가 간수장의 눈에 들게 되고 감방지기로 승격되면서 만나게 된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주게 되었고 그로인해 바로의 꿈을 옳게 해석해줄 수 있는 기회를 잡아 급기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혈연도 지연도 학연도 없는 히브리 노예가 이집트의 최고 권세가인 총리의 자리에 오르는 기적을 창출한 것입니다. 요셉은 이제 놀랍게도 ‘바로의 아버지’,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어 모든 일을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인장반지를 끼고, 버금수레를 타고 행차할 때면 모든 백성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존경을 표하게 되는 스테이터스(status)를 갖게 됩니다. 무엇보다 본문에서와 같이 그의 형들도 그 앞에서 무릎을 꿇어 절함으로써 13년 전에 꾼 요셉의 꿈이, 꿈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과 당신들의 후손들의 생명을 살리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앞서 보내셔서 꿈을 이루게 하셨나이다.”(창45:1-15)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경탄스럽습니다. 하나님은 경배와 존경과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영광과 권능과 존귀와 찬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립니다.
꿈꾸는 사람, 요셉의 역사는 참으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요, 구원의 극적 드라마로서 우리들 ‘인생이라는 연극’의 극적 해피엔딩을 보여주는 감동의 파노라마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그 날, 요셉이 자신을 시기하여 팔았던 형들과 목을 어긋 잡고 환희와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펑펑 흘렸듯이 우리도 그런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그 환희에 찬 감격의 ‘기쁨의 눈물’은 ‘서운함의 눈물’과 다르며 ‘억울함의 눈물’과도 다른, 말하자면 꿈을 이루는 ‘미소 메이커’들이 마지막 날에 흘리게 될 ‘미래의 눈물’입니다.
꿈꾸는 이시대의 요셉들인 우리도 하반기 앞으로 더욱 더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꿈을 성취하기 위해 ‘꿈사랑, 교회사랑, 민족사랑’ 세이레 미소메이커 특별새벽기도회를 7월1일부터 21일간 계속할 것입니다. 2011년 과천 변화의 ‘폭풍(暴風)이 복풍(福風)이 될 것’이라는 백절불굴의 믿음 속에서 우리의 꿈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희망찬 미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요셉처럼 세 번의 눈물의 과정을 잘 극복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으십시오. ‘요셉의 집들’인 과천소망교회의 ‘요셉들’, 요셉!, 요셉!.... 요셉! 산돌이신 예수의 마음에 새겨진 이름, 흰돌에 새겨진 부름 받은 새 이름, 요셉들이여! 요셉처럼 희망찬 미래를 개척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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