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 글
1. 용서, 세상에서 제일 하기 어려운 일
세상에서 제일 하기 어려운 것 두 가지를 들라면, 그것은 죄를 안 짓는 것과 내게 상처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일 것이다. 죄를 짓지 않는 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인간이 육신을 지니고 있는 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흙으로 빚어졌기에 쉽사리 부서지는 존재이다. 우리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고행성사를 보지만, 어느 고해신부도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죄를 안 짓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은 용서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체험을 통하여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다. 인간이 아닌 다른 피조물들은 자연 그대로 살다가 아무 원한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느데 인간만은 그렇지 못하다. 용서할 수 없는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다가 그 한을 그대로 안고 죽어간다. 이런 얘기가 있다.
어느 도시에 경쟁관계에 있던 장사꾼 두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의 가게는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이들은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망하게 할까 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보다 못한 하느님께서 어느날 천사를 한쪽 상인에게 보내셨다.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천사는 이런 제안을 하였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큰 선물을 내릴 것이오. 그대가 재물을 원하면 재물을, 장수를 원하면 장수를 자녀를 원하면 자녀를 줄 것이오, 단 조건이 하나 있소.” 천사는 잠시 말을 멈춘 다음 말을 계속했다. “그대가 무엇을 원하든 그대 경쟁자는 두 배를 얻게 될 것이오. 그대가 금화10개를 원하면, 그는 금화 20개를 얻게 될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천사가 미소를 지으면서 “이제는 화해하시오. 하느님은 이런 방법으로 그대에게 교훈을 주려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천사의 말을 들은 상인은 한참 생각하더니, “제가 무엇ㅇ르 바라든지 다 그렇게 이뤄진다는 말씀이지요?” 하고 물었다. 천사가 그렇다고 하자 상인은 크게 숨을 쉬고는 결심한 듯이 말하였다. “그럼 제 한쪽 눈을 멀게 해주십시오.”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려 해도 “나”를 버리기 전에는 힘든데, 하물며 내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 사람,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 나에게 원수가 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라는 자아를 철지히 죽이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다.
용서 못 한다는 것은 마음이 오그라졌다는 것이다. 달마 대사는 “마음, 마음, 마음이여, 참으로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하나 꽂을 자리가 없으니” 라고 한탄을 했다. 용서 못한다는 것은 마음이 옹졸해졌다는 것이다. 마음이 옹졸해진 것은 옹졸해지고 싶어서 옹졸해진 것이 아니라 상처를 받으면서 오그라진 탓이다. 우리가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중 대다수는 한때 얼마나 우리와 다정한 사이였던가! 상처는 친밀감을 먹고 산다고, 한때 다정했던 사람, 신뢰했던 사람이 상처를 주었기에 이제는 바늘조차 꽂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오그라든 것이다.
어느 잡지에서 신년 특집으로 유명 인사 몇 사람에게 새해 소망을 물으면서 한 가지 이상한 질문을 하였다. 그것은 새해에 제발 죽어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까 놀랍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 마음을 가장 솔직히 드러내는 질문일 것이다. 인간 심보 안에는 은근히 죽어주었으면 하는 원수들이 있다. 내게 상처를 안겨준 원수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가운데서 부정적 감정이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된 것이 상대방이 죽기를 바라는 것이다
2. 그래도 하느님은 용서하기를 원하신다.
용서란 그토록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수많은 성인들이 용서를 강조한 것은 무엇때문일까? 그리고 필자 역시 용서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그것은 용서를 주님의 지상 명령이기 때문이다. 용서란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d라고 실행해야 할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외우며, 용서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일을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죌르 용서하시고........:" 주님 앞에서 서로 용서하며 살겠다는 결심이 담겨 있는 이 기도는 그저 입으로만 암송하면 끝나는 기도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용서 사상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구약성서를 통해서 강조하신 용서 정신과 일치한다. 집회서에는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라. 그러면 네가 기도할 때에 네 죄도 사해질 것이다. 자기 이웃에 분노를 품고 있는 자가 어떻게 주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으랴” 라는 내용의 말이 나온다. 하느님이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이웃을 향한 우리의 용서가 선행되어야 우리를 위해 주어진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용서에 관한 하느님 아버지와 구세주 예수의 가르침은 절대적이다. “만약” 이라든가, “하지만” 이라든가 하는 핑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또 ‘상대가 준비가 되면’ 이란 식의 조건도 붙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명하였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란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이다. 성서 숫자에게 일곱은 완전수이다. 일흔 번에다 곱하기 일곱을 하는 것이니, 이는 절대적인 완전수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신 근거는 당신 자신이 우리를 무조건 용서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어느 수도원 성당 고해소 위에 달려 있는 십자가의 예수님은 오른팔이 축 늘어져 있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오래전 이 고해소에 어느 신자가 와서 엄청난 죄를 고백하였는데, 이때 신부는 다른 죄는 다 용서할 수 있어도 그 죄만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바로 그때 고해소 위에 걸려 있던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오른팔이 움직이면서 그 신자의 죄를 무조건 용서하라는 뜻으로 십자를 그었다고 한다. 그후부터 이 십자가의 예수님 오른팔이 늘어져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예수께서 우리에게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시는 까닭은 무엇일까? 하느님의 나라는 용서의 나라이고, 하느님 나라의 통치방식은 용서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점은 구원사업의 정점이었던 십자가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용서의 기도를 청한다. 예수께서 하신 기도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유다, 최고법정, 그리고 빌라도 이다. 유다는 배반하여 스승 예수를 팔아넘겼고, 유다는 배반하여 스승 예수를 팔아넘겼고, 최고법정은 자국의 동포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식민 통치자인 빌라도에게 넘겨 배반하였고, 빌라도는 로마제국법에 따라 정의와 공평 속에서 예수의 무죄를 선언해야 했건만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예수를 처형하도록 병사들에게 넘김으로써 배반하였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당신을 배반한 자들, 당신의 죽으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이들을 용서해 주기를 청하셨다.
하늘 나라의 왕이신 주님께서 하늘 나라에 들어가시기 전에 무조건적인 용서를 베푸시는 것이다.
용서의 왕이신 주님께서는 당신 오른편에 매달린 사형수에게도 용서를 베푸신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살아 생전 좋은 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사형수에게 예수께서는 무조건 용서를 베푸시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보여주신 이 사건들은 하느님의 왕국이 어떤곳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곧 하느님 나라는 용서의 나라요, 그 나라의 통치 방식은 용서인 것이다. 우리는 하늘 나라의 시민들이기에 용서의 나라 시민들이다. 그런데 용서의 왕국의 시민권자가 되어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용서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가 진정으로 하늘 나라 시민이기를 원한다면 우리에게 잘못한 이웃과 원수들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요구하신 절대적 용서를 살아간 이들, 곧 용서의 왕을 그대로 본받아 살아간 이들은 우리가 용서를 하며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어 준다.
아기 예수님의 거룩한 탄생ㅇ르 기념하고 나서 바로 다음날 기억하는 성인은 스테파노 성인이다. 왜 하필 스테파노를 성탄 다음날 기념하는 것일까? 스테파노는 자기를 돌로 쳐죽이는 이들을 위해 주님께 용서를 빌면서 순교하였다. 또 용서의 주님을 본받은 이가 있으니 토머스 모어이다. 그는 자기 목을 자르는 일을 위로하며 말하기를 “여보게, 날 죽이는 것을 언짢게 생각지 말게나, 우리 모두는 다 천국에서 기쁜 마음으로 만날 것이니.”
이렇게 용서를 살아간 구체적 인물을 본받는 것은 용서하려는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저들도 용서했는데, 내가 용서 못 할 이유가 무엇인가?
언젠가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읽었다. 살인죄를 저지르고도 10년 넘게 잡히지 않고 살아온 자가 자수하였다. 경찰은 그를 의심하지도 않았었는데, 스스로 자기 죄를 고백한 것이다. 그가 자수한 것은, 자기가 죽인 할머니의 마지막 기도 때문이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돈을 빼앗고 자기를 죽이려는 강도에게는 뭐라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께 만 “주님 제가 지금 당신께 갑니다.”라고 여러 번 외쳤다고 했다. 할머니의 그 마지막 말이 그 살인자의 마음을 지난 10년간 괴롭히다가 끝내 자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날은 전문가가 존중받는 시대다. 하느님의 전문은 용서이다. 우리가 용서의 전문가인 하느님을 존중하고, 그분의 용서를 받으면서 살아가기 위하여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평화의 기도’를 하신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용서의 도구가 되어 살아가야 한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
3.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길
a.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첫째 이유는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용서해야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라는 말을 하고 또 듣는다. 용서하기가 얼마나 힘들면 이러겠는가? 설사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행실을 고친다 해도 마음이 그 용서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상대가 조금도 뉘우치는 마음이 없을 때는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가도 재빨리 사라진다. 용서의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신앙의 요구 앞에서 용서하고 싶지만 실제로 우리 마음안에 쌓여가는 것은 화, 분노, 적개심뿐이다. 하지만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용서는 상대방이 뉘우쳤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분노, 화, 적개심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가득차게 되면 무엇보다도 우리 몸이 견디지를 못 한다 열이 나고 , 가슴이 답답해지고, 심장이 아프고, 소화가 안되고, 잠을 이룰 수 없고, 안절부절못하고....
가슴에 가득차 있는 적개심, 분노, 화는 우리의 몸과 영혼을 죽이는 독소들이다. 이러한 독소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여가는데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화병이란 무엇인가? 정신 의학에서 말하는 화병, 울화병은 화날 일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가슴에 화가 부글부글 끓고 신체에 이상이 생긴는 병이다. 남대문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고, 우리가 가슴에 쌓인 분노를 올바른 방법으로 풀어내지 못하면 엉뚱한 곳에다 화를 내게 된다. 설거지하다가 애꿎은 그릇을 내던진다거나, 강아지를 발길로 찬다든가,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나 사건을 머리에 떠올린 순간 화가 나서 욕을 해대는 것 등이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오래 살기 위해서라도 용서를 하여야 한다. 화를 많이 내면 심장에 좋지 않으며, 생명을 단축할 수도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하버드 대학의 미틀만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심장마비를 일으킬 위험이 두 배나 높다고 한다. 또 듀크 대학의 레드퍼드 윌리엄스 박사는 100여 명의 변호사를 택하여 화와 생명단축과의 관계를 조사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학창시절 화를 잘 낸 변호사들은 비교적 화를 안 낸 변호사들과 비교해서 50대의 사망률이 무려 다섯 배가 높았다고 한다.
내가 상처받은 것도 억울한데, 화병에 걸려서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암에 걸리고, 그래서 일찍 죽는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이 세상에 상처를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나만 화병에 걸려 일찍 죽는다면 그처럼 딱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자신의 잘못을 기억하지 못한다. 용서를 청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상을 뜬 경우도 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상대는 우리에게 용서를 청할 수 없다. 상대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해도 용서를 해야 하는 이유는 용서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 에 그러하다. 우리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b. 용서를 해야 하는 두 번째는 다른 이들에게 피곤한 사람으로 찍히지 않기 위해서이다. 함께 지내기 가장 어려운 사람은 늘 불평 불만에 차 있는 사람이다. 부정적 감정이나 생각만큼 전염성이 강한 것은 없다. 한 사람의 마음이 우울하면 그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도 어두워진다. 늘 화를 내는 사람 옆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화를 먹으면서 살아가는 셈이다.
만일 당신이 불행했던 지난날을 붙들고 살면서 이웃을 탓하고, 가족을 원망하고, 늘상 분노에 차 산다면 처음에는 당신의 아픔을 진심으로 헤아려 주고 힘이 되어 주고자 왔던 사람들마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멀어져 갈 것이다. 만일 당신이 입만 열면 원망과 증오에 찬 말을 내뱉는다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짜증이 날 것이며 나중엔 당신을 될 수 있으면 피하려 할 것이다. 단순히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분노와 적개심이 주는 전염병이 무서워 피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상처는 아물기는커녕 더 심해질 것이다.
내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면 미워하는 그만큼 증오심이 쌓여가게 된다. 용서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내 마음 안에 증오심을 굳히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굳어진 증오심은 파괴적인 행위를 유발시킨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상처난 마음을 아물게 하기 보다는 그 상처를 키우면서 살아가게 된다. 마치 꽃에다 물을 주듯이 상처에다 미움이라는 물을 주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과거에 받은 상처로 인해서 화를 끓이면서 그위에다 매일 같이 증오심의 물을 주면서 내게 상처준 그 사람이 내 마음속을 다 치지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 인생의 귀한 시간을 그 미운 사람이 다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미움은 악순환이다. 그러면서 나는 벗들이나 가족들에게 피곤한 사람, 늘 불만에 차 있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영성학자들은,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곧 마귀에게 자기 마음을 내주는 것이라 한다.
일단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마귀가 그를 움직인다는 것이다. ‘마귀의 운동장’에서 놀지 않으려면 다른 이들에게 피곤한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미움이라는 악순환에서 뛰쳐나오는 수밖에 없다. 상대방이 뉘우치기를 기다리면서 ‘마귀의 운동장’에서 헤맬 것이 아니라 그 운동장을 뛰쳐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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