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이 부활(復活)의 메시지로부터 참된 기독교가 시발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 세상의 모든 희망의 근거가 된 ‘예수 부활’을 찬양합니다. 금번 부활절 예배를 통하여 부활의 소망으로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 진정한 희망이 선사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예수 부활’이야말로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희망의 사건입니다. 그러하나 옛 부터 지금까지 이 ‘부활의 사건’은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만을 수긍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들, 특히 지성인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어 왔던 사건이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에 대하여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의 진위를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부활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부활의 증인’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야고보, 도마, 바돌로매, 스데반, 글로바, 브리스길라, 아굴라, 루포,.. 토마스, .....주기철..등 교회사를 빛낸 하나님의 사람들이 담대하게 부활을 증언하다가 사자 밥이 되기도 하고, 목이 잘리고, 십자가에 처형되고, 감옥에서 옥사하기도 하며, 사회에서 매장도 되었지만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증언을 결코 철회하거나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그리고 끝까지 그 부활을 참된 사실로 선포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코 부활은 역사적 진실입니다. 진실이 아닌 거짓 것을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성경의 약속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사흘 만에 실제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진리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참된 인생의 길이 있습니다.
이 부활의 사건은 시대마다 ‘부활의 증인’을 요구합니다. 절대가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혼돈의 이 시대, 바로 우리가 부활의 증인으로 부름 받아 산 순교의 믿음으로 참된 희망을 전파할 자들입니다. 우리 부활의 증인들로 인해 ‘기독교가 참으로 기독교’가 되고, ‘교회가 참으로 교회’될 수 있습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정체성이자, 영원한 희망입니다. 부활이란 영원을 시간 속에 심는 것이며, 속된 이 세상 속에서 거룩함의 모판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서 망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이 세상사람 중에 가장 불쌍한 인생일 것이나, 부활의 진리위에 새 인생을 설계하는 사람마다 결코 망하지 않고 흥왕하며 영광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고전15:12-19).
이스라엘 민족을 속량하는 해방자로, 국가적 지도자로, 권세를 잡으면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으로 기대했던 ‘나사렛 예수’가 갑작스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낙심하고 절망에 빠진 채, 슬픔에 잠겨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이십오리 되는 엠마오라는 고향으로 가는 도중 슬며시 그 두 사람사이에 끼어드셔서 성경에 약속된 말씀을 설파하셨습니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풀어 설명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토라와 예언서와 시편의 여러 말씀을 통하여 ‘예수 메시야’와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일러주실 때에 두 제자의 가슴은 뜨겁게 불타올랐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몸’-이제 우리도 그렇게 부활하신 주님의 몸과 같은 ‘신물질(新物質: 物質도 非物質도 아님)’로 변화될 것임-즉, 부활의 몸으로 나타나셔서 그들이 알아보지 못한, 그러나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주님이 떡을 떼어 줄 때, 새로운 모양의 주님을 보아 알게 된 그들은 희망찬 새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신비롭게 부활의 주님을 체험한 그 순간부터 그들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차며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터질 듯한 감동과 불타는 가슴으로 견딜 수 없었던 그들은 엠마오로부터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부활의 증인된 새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부활의 희망찬 ‘굿 뉴스(good news)’를 온 몸으로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눅24:13-35)
할렐루야!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부활은 ‘희망’입니다. 이런 ‘부활희망’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생이야말로 나이를 불문하고 청춘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파상의 ‘목걸이’라는 소설에서 알려진 대로, 목걸이가 가짜였던 것처럼 만약, 부활이 거짓이라면 우리 인생은 가장 쓸모없는 불쌍한 인생일 것이겠지만, ‘부활’은 역사적 진실이므로 부활을 희망하는 사람은 늘 푸른 청춘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인생은 비록 스무살 젊은이라도 노인이라 할 수 있겠고, 희망을 지니고 있다면 팔십세 노인이라도 청춘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란 시가 이렇게 희망찬 청춘 인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장밋빛 뺨, 앵두 같은 입술, 하늘거리는 자태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을 뜻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물에서 오는 신선한 정신, 유약함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를 뿌리치는 모험심, 그 탁월한 정신력을 의미한다.
때로는 이십의 청년보다 육십이 된 사람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늙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나 꿈,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서 늙는 것이다. 세월은 우리의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진 못한다. 근심과 두려움, 자신감을 잃는 것이 우리 기백을 죽이고 열망을 땅에 파묻으며, 비로써 마음이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예순이건 열여섯이건 가슴속에는 경이로움을 향한 동경, 아이와 같은 미지에 대한 왕성한 탐구심, 삶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법. 그대와 나의 가슴에는 남에게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간직되어 있다.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아름다움, 희망, 기쁨, 용기, 영원의 세계에서 오는 힘을 간직하고 있는 한, 그대는 언제까지나 청춘일 수 있다.
영감이 끊어져 정신이 냉소하는 눈에 덮히고, 비탄이란 얼음에 갇힐 때, 그대는 스무 살이라도 늙은이가 된다. 그러나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이란 파도를 탈 수 있는 한 그대는 여든 살이어도 늘 푸른 청춘이다.’
부활신앙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부활을 희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부활희망이 있는 그리스도인은 부활청춘으로 영원히 새로이 살아가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청춘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영원한 청춘이여, 부활하라!
부활은 ‘대신(代身) 죽음으로써’ 살길을 여는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의 죽음(death of death)’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지니고 사는 사람은 어떠한 고난, 죽음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새 삶을 꽃피웁니다. 음침함, 슬픔, 거리낌, 곤고, 고통,.... 무덤 속 경험 가운데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여 부활의 열매를 맺어갑니다. 이 시대 부활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산 순교자들입니다. 각각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위해, 주의 교회를 위해, 영적 물질적 목표를 위해, 죽고자 결심하는 소망 공동체여! 그대, 부활의 희망을 지닌 부활의 청춘으로 새로이 살아가십시오. 오늘 여기에서, 부활의 생명이 나타나는 삶으로 부활의 영광을 증언하십시오.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