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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는 이의 뜻을 따라 천지 만물이 예정된 대로 움직여집니다.’(엡1:11). 이 세상에 우연한 일은 없습니다.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고 말한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모든 일은 정해진 계획대로 진행되어 갑니다.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크고 작은 천하의 만사가 필연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족 초청예배를 통한 오늘의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 사건이며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인간 구원을 위한 시나리오대로 모든 일에는 정확한 ‘원인’과 ‘결과’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할 때에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 하십시오. 겸손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자는 행복한 인생입니다.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다 퍼낼 수 없듯이 인간의 좁은 머릿속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다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한량없는 은혜와 어머니의 기도로 위대한 신앙의 사표가 된 성(聖) ‘어거스틴’이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방탕했던 지난날을 참회한 ‘참회록’에서 겸손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좁은 인간의 소견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부인하며 반역했던 것을 용서하소서! 당신은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하겠습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을 섬기도록 인간을 창조하셨고 은혜로 우리를 깨우쳐 기꺼이 당신을 찬양토록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창조되지 않고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천지만물중 저절로 생겨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구원의 섭리를 깨달아 특별한 인생을 사는 자들은 행복한 자들입니다. 창조된 시간 안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새 창조의 인생을 살아가겠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가장 심각한 현대의 도전중의 하나가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은 생명체의 변화의 과정을 말합니다. 진화론은 생명체가 자연발생적으로 진화되어 지극히 작은 미생물에서 저등 생물로 그로부터 고등생물로 종의 분화를 이루어간다는 과학의 한 가설입니다. 진화론의 주창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다.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생명의 나무의 그림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극한 상황에서 생명체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 종족을 번영케 하기위해 자연선택을 함으로써 미생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이라는 가장 고등한 생명체로 진화된 것이다.’ 진화론의 심각성은 모든 변화과정 중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사라져 버린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명체의 시초라 가정한 그 공동조상 이라 하는 원시적 미생물은 과연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일까요? 창조외에는 그같은 사실을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요? 창조주 하나님을 배제하고는 진화론에 관한 그 어떤 논의도 시작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필연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소중하다 하겠습니다. 깊은 산중에서 시계를 발견한 사람이 생각하기를 ‘이게 우연히 만들어져 우연하게 여기에 떨어져 있구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시계는 누군가가 만들어낸 물건이며 그 시계의 소유자가 그곳을 지나다가 분실하여 그 사람이 발견하게 된 것이라고 믿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계보다 천만 배나 더 정교한 원리에 의해 작동되고 있는 이 우주는 결코 저절로 생겨난 것일 수 없습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틀리지 않고 자전하면서 공전해가는 지구 등 이 우주도 위대한 지적존재가 설계하여 만들어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고야 누가 이것들을 창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종의 기원’ 저술을 통해 생명체의 생명의 신비를 ‘생명의 나무’를 그려 설명한 다윈의 진화론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무가치한 미신적 신념으로 격하시킵니다. 단 하나의 종으로부터 다른 종으로 점진적으로 진화해서 미생물로부터 어류, 양서류, 동물, 침팬지로부터 사람으로 진화되었다는 과학적 주장을 펼친 극히 부분적이고 일방적인 견해인 다윈의 진화론이 오늘날 특히 청소년, 청년들의 신앙을 뒤흔들고 가치관을 혼란시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참된 인생을 살아갈 수 없게 만듭니다. 다윈의 진화론에서 설명하는 생명의 나무는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나무라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생명의 기원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의 생명의 나무는 생명을 주는 나무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참으로 생명을 주는 ‘생명나무’라 할 수 있습니다. 옳습니다. 십자가의 사랑만이 죄인 된 인간에게 참 생명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처럼 함께 비를 맞고 함께 울어주고 함께 동행 해 주는 그러한 사랑으로만이 생명을 구하고 살릴 수 있는 법입니다. 예수사랑을 나누는 나눔의 길만이 정글의 법칙이 존재하는 인생의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우리가족 초청 잔치에 새겨봐야 할 이야기입니다. 1980년대 아프리카 중 서부지역에 거대한 코끼리들이 폭주족처럼 광폭하게 이곳저곳을 휩쓸고 다녔습니다. 왜 온순한 코끼리들이 닥치는 대로 부수고 공격을 할까?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인간들 때문이었습니다. 상아에 눈먼 밀렵꾼들이 무분별한 사냥으로 어른 코끼리가 사라진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어른들 없이 자라난 수컷들이 비행 청소년들처럼 거칠어졌고 제 멋대로 흉포해졌습니다. 어른코끼리들이 합류하자 코끼리 사회는 다시 안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아기 코끼리들에겐 본받을 수 있고 어르고 달래줄 존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사는 가정에도 사회에도 이처럼 어른코끼리가 되어 규율을 세우고, 엄마나 이모 코끼리가 되어 달래주고, 언니나 오빠 코끼리가 되어 친구가 되어 주어야 안정적인 가정이나 사회도 유지 되는 것으로 생각 됩니다. 매우 단순한 논리라 이견이 있을 수 없겠으나 현실은 매우 걱정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마치 아프리카의 코끼리 난동을 보는 듯합니다. 매일 일어나는 사건 사고의 보도를 볼 때마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 크리스천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비교적 사회제도가 안정 되었다는 미국의 경우, 살인사건이 연간 1만 4180건입니다. 그 보다도 더 위험한 것은 자살과 의도하지 않은 약물 중독사인데, 연간 자살이 3만3289건이고, 의도하지 않은 중독사가 2만7531건입니다. 대부분 난동 대신 그들이 택할 수밖에 없었던 비관적인 선택이라 하겠습니다. 어른이 없는 사회, 이모나 고모가 없는 사회, 누나나 형이 함께 놀아주지 않는 사회는 건강할 수 없습니다. 2009년 6월 11일자 뉴욕 타임스에는 ‘에디’라는 버거씨병 환자의 이야기가 소개 됩니다. 버거씨병은 말초 혈관에 문제가 생기는 질병인데 주로 발끝부터 시작해서 극심한 통증과 함께 조금씩 위로 진행해서 결국은 절단을 해야 할 만큼 상황이 악화되는 병입니다. 완전한 치료법이라는 것이 아직 없기 때문에 최대한 진행을 늦추는 방법뿐입니다. 진행을 늦추는 방법은 담배를 끊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환자들 대부분이 담배에 중독되어 발병했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끊으라는 의사의 권유에 ‘에디’도 2년이 넘는 동안 무수히 끊으려 했으나 금단의 증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흡연합니다. 결국 손가락 발가락을 계속 잘라내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끊지 못합니다. 정녕 ‘에디’의 앞날의 마지막은 어떨까요?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또한 자살을 선택하거나 약물에 매달리다 죽어가는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다시 도전 할 수 있도록 용기와 새로운 희망을 갖도록 해야 하는데, 이것은 경제적인 지원이나 제도적인 개선으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듭니다. 치료비와 쾌적한 환경에 첨단 의료장비를 보급하는 것도 방법이겠으나, 정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관심을 가져주는 어른 코끼리나 엄마나 이모 코끼리의 어르고 달래주며 누나나 형이 함께 놀아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저들을 살리고 약물에 매달린 줄을 끊고 자살에 대한 생각을 바꾸며, 난동을 막을 수 있는 최선책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역할은 단 한가지뿐입니다. 우리 가슴에 가득 채워져 있는 ‘예수 사랑’을 나누어 주는 일, 그 ‘나눔의 길’, 이것만이 그들에게 남겨 있는 마지막 기회이며 희망입니다. 삶의 광폭한 전쟁터에서 ‘예수 사랑’을 나누는 당신의 손길이 아름답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사랑을 나누는 기독교 신앙만이 생명의 살 길을 열 수 있는 법입니다. 진화론이나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이나 모두 다 ‘변화’를 말합니다. 그러나 진화론은 전체나 근원이 아닌 부분적으로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의 변화의 과정만을 말할 뿐입니다. 바닷물 한 숫갈을 가리키며 이것이 ‘바다’다 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진화론으로 생명의 신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하겠습니다. 진화론은 그 자체의 정의처럼 단지 생명체가 발전해가는 한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과정이나 부분에 국한되지 않고 전체를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각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그 창조한 것들에 대해 ‘진화하라’고 명하신 것에 착안하여 ‘창조적 진화론’을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즉 ‘진화하라’는 말씀을 따라 창조론과 진화론을 함께 아우르는 ‘창조적 진화론’을 명시할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창조한 생명체에 대해 ‘그렇게 진화하라’하신 하나님의 의지를 전제하여 ‘창조적 진화’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화자체가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려는 하나님의 의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창조적 진화론’의 주장입니다.(창1:22-2:1).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는 거룩한 변화를 지향하는 성화의 종교입니다. 결국 참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약속대로 이전과는 다른 새 몸, 즉 그리스도와 같은 ‘신물질(新物質)’로 변화되어 신인류로 새롭게 창조되는 놀라운 역사를 만들 것입니다. 이때 성경에서 또 한 번 듣고 싶은 창조주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질 것입니다.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십자가의 생명나무로부터 생명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인생은 참으로 보기에 좋은 특별한 인생입니다. 밀물의 때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자연의 섭리처럼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 속 구원의 역사가 필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으로 광폭한 삶의 전쟁터에서 당신과 당신의 가정을 굳세게 지키고 올바로 세워야 합니다. 천지만물중 당신은 특별한 인생입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창조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인생으로 살아가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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