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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복잔치를 베풀다. 누가복음 14:15~24 { 2011-09-18

감사^^* 2011. 11. 19. 17:10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복잔치를 베풀다.
누가복음 14:15~24    2011-09-18
 
지도자 한사람, 한사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의무교육을 주도한 ‘이승만’, 산림녹화를 주도한 ‘박정희’, IT강국을 주도한 ‘전두환’. 인류사의 기적의 아이콘으로 세계 242개국 중 경제10위의 선진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을 일군 3명의 지도자로 일면 평가되는 한사람, 한사람, 한사람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중심에 앞장 선 리더가 있는 법입니다. 하늘의 뜻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추수의 역사에도 앞선 일꾼 한사람, 한사람으로부터 위대한 기적이 시작됩니다. ‘바벨탑사건’으로 흩어졌던 하나님의 씨앗들이 추수시대의 일꾼들을 통한 ‘알곡모음의 대역사’로 모아지고 있습니다. 약속의 성령 받은 우리는 진리와 사랑으로 영생받기로 작정된 자를 모으려고 행복잔치를 베풀고자합니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인간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명왕성에 갈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웃을 마음대로 다닐 수 없는 자를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리 속에만 행복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며, 진리의 본질인 사랑으로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제 고향은 알제리입니다. 하지만 전 이제 고향에 갈수가 없어요. 그곳에선 저와 제 가족 모두가 협박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단 하나에요. 맨다리를 드러낸 채 달렸기 때문이지요. 이슬람 국가에서 여자가 다리를 드러내는 것은 금지되어있기 때문입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500m, 여자 육상경기 금메달 시상식 인터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동안 수상자 ‘하시바 불메르카’, 그녀가 울먹이며 한 말입니다. 우리는 추측합니다. 수많은 모욕과 살해 위협, ‘지켜야 하는 것과 믿어야 할 것’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한 여인의 영혼의 절규를. 그리고 상식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 종교의 척박하고도 인색한 사회풍토를 보며, 반사적으로 일종의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 안에 꿈틀거리는 도덕적 자각능력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온 천하에 다리를 드러내고 달린다니, 미쳤군! 우리 종교를 모독하다니, 달리는 즉시 죽여 버리겠다.” 육상 경기에서 맨다리를 드러낸 채 달리는 모습이, 종교를 모독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그들의 정신세계라니..., 금메달을 목에 걸고 국위를 선양한 그녀를 살해하는 것이, 그녀에 대한 보상심리라니..., 올림픽 이후에도 살해 위협은 계속되었고 결국 다른 나라로 망명, 지금도 해외에서 아랍여성선수들의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아랍 최초의 금메달리스트 ‘하시바 불메르카’, 그녀에게 찬사와 박수로 마음을 보태봅니다.
 
지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학문으로서의 종교에 대한 ‘관심’, 자신이 믿는 교리나 신념의 ‘내용’, 자신이 속한 종교와 다른 사람들이 믿는 종교와의 ‘차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구분’ 등에 관련된 지식이 사랑과 진리를 대변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사상적 자원을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끌어내어 그것을 학습하거나, 혹은 자연의 형식논리를 체계화하여 그 논리로 인간이 가는 길을 밝힌다 해도, 여전히 척박함과 인색함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겠습니까? 의문에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곳엔 사랑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지성이 여는 길은 지구를 도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쳇바퀴의 한계를 보일 뿐, 하늘가는 밝은 길을 보이지 못하며, 인간은 그런 길을 가는 것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빌라도가 예수한테 던진 질문입니다. 모든 철학 사조와 종교는 진리를 추구합니다. 진리는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교리의 근간이며, 교리는 역사와 문화적 상황에 따라 모습은 달리하나 그 근간은 하나입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을 떠난 진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켜야할 제도’들은 그것이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 어떤 제도이던 ‘지키는 자’와 ‘지키지 않는 자’를 구분합니다. 그리고 지키지 않는 자를 분리한 후에 배제하고, 그 후엔 억압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사회적 현상일 뿐입니다. 마치 금기를 깨뜨리고 맨다리를 드러낸 채 달렸던 여자 육상선수를 ‘사랑 없는 기준’인 그들만의 교리로 분리하고 배제하고 억압하려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어머니라는 글씨를 써놓고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동물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도덕적 자각능력을 지닌 인간은 어떠합니까? 어머니라는 글씨 앞에서 어깨를 들먹이며 울지 않습니까? ‘사랑의 힘’에 흔들리는 ‘인간의 감성’에서 희망을 봅니다. 구분이나 배재나 억압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을 믿는 우리 크리스천은 행복합니다. 내 영혼과 상대의 영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진리뿐이며, 사랑은 진리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53년을 일기로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간 야구의 전설, 최동원은 무엇을 남겼습니까? 하늘로 돌아갈 당신은 이 땅에 무엇을 남기고 계십니까? 전사의 영웅이라는 ‘카이사르’는 이름을 남겼고, 로마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대리석으로 덮인 로마를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무엇을 남기셨습니까?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것, 사랑을 남기셨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이성적 사랑이 아닌, 멈출 수 없는 영원한 사랑, 감성적이며 인간의 본질적 사랑,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 말입니다. 그 사랑은 긍정적이며 상대의 장점을 봅니다. 나누고 용서할 줄 압니다. 모든 것을 극복하는 가운데, 언제나 인내하며 믿고 바랍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로마를 정복했고, 그리스도의 의지대로 멈춤이 없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제 사망이라는 원수를 무릎 꿀릴 것입니다.
 
인류정신사의 중심축을 이루었다하여 ‘축의 시대’라 일컫는 2500여 년 전, 동양사상과 철학의 근간을 만들었던 ‘공자’와 ‘노자’, 그리고 강력한 국가종교, 이슬람교의 ‘마호멧’과 비교할 때, 하늘로부터 사랑을 가지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확실히 그 차원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말이 있습니다. 공자는 인간을 면밀히 관찰한 후, 인간에게서 사상의 근원을 끌어냅니다. 공자는 도덕적 자각능력이 있는 인간을 잘 학습시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면 모두가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사회를 이루며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천능력을 함양하기 위한 ‘학습의 결과’는 전혀 예상치 못한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인, 의, 예, 지의 이상적이고 행복한 유교사회를 만들기 위해 학습함으로써 ‘배운 자’와 ‘못 배운 자’가 나누어지게 되었고, 배운 자는 못 배운 자를 괄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배운 자는 지배계급인 양반으로 우대되고, 못 배운 자는 피지배계급인 상놈으로 분리된 후, 양반으로부터 배제되고 억압되기 시작함으로써 이조 오백년 조선사회와 같이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불평등 계급사회로 전락되어 그 폐해가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당시 사람취급을 하지 않는 여성이나 천민들의 인권은 철저하게 유린되어 사람답지 못한 저급한 인생으로 살아가게 됨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공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저급한 사회가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반면 이런 공자의 사상을 넘어서는 노자는 자연으로부터 무위자연의 사상을 끌어냅니다. 자연의 형식논리를 체계화하여 인간들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하라고 독려합니다. 이 노자의 사상은 공자의 학습의 맹점을 예리하게 파악하여 인위적으로 학습하거나 교육시키지 말고, 자연스럽게 그대로 내버려두며, 자신이 바라는 것을 하게 하라는 사상입니다. 하지만 노자의 이런 사상에 따라서 아무런 규제가 없이 각자가 좋아하며 바라는 일들을 하게 내버려둔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도 삽시간에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게 되어 개판 같은 세상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이처럼 공자와 노자의 사상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분리되고 배제하며 억압하게 되는 것이고, 사랑이 없으므로 질서가 무너져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공자의 유교, 노자의 도교, 마호멧의 이슬람교와 사랑이 있는 그리스도교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땅에서 난 이들의 사상, 철학, 종교적 신념과 그리스도의 사랑은 차원을 달리합니다. 하늘로부터 가지고 온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참된 행복의 나라를 건설하는 그리스도교는 유니크(unique)한 가치를 지닌 여타의 그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 하겠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교만 행복잔치인 천국잔치를 배설할 수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행복해 질 수 있으며, 진리의 본질인 사랑으로만 행복잔치를 베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을 찾으려 애쓰는 인간은 밭을 사기도 하고, 소를 소유하기도 하며, 시집가고 장가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행복의 욕구로 밭을 산다고, 자동차를 구입한다고, 결혼을 한다고 해서 진정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와 상대의 영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진리와 그 진리의 본질인 사랑으로만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천국잔치인 참된 행복의 잔치에 초청받은 유대인들이 그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절했습니다. 헛된 행복의 표상, 이 땅 안의 부위영화, 결혼 등의 이유로 참된 행복의 표상인 그리스도가 남겨둔 사랑의 능력으로 베풀어지는 참된 행복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한 것입니다. 인자의 임함은 노아의 때와 같아서 홍수가 나서 다 멸하기 까지 사고 팔고,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만을 계속합니다. 행복의 새세계로 가는 방주를 짓는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방주 타는 일을 거절합니다.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참된 천국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구약의 시대를 지나 신약의 시대에서 추수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제, 그리스도의 참 사랑으로 이제 바야흐로 사거리 전도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참된 행복의 잔치인 천국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옛 이스라엘백성에게는 구분되어 배제된 후, 억압받고 천대받을 이방인인 한국인인 우리가 이 천국 행복잔치에 참여케 되는 참된 사랑을 입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make ...come in)’함으로 이 행복잔치에 참여된 바 된 것처럼, 우리 또한 아직도 돌아와야 할 사람들을 강권하여 간곡히 설득하여야 할 것입니다. ‘길과 산울타리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14:15-24)
 
이를 위해 과천소망인들이 영혼의 고향에서 9월24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복잔치를 베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