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이란 참으로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룻’과 ‘보아스’의 만남처럼 일상 속에서 ‘우연’과 ‘마침’의 만남이라는 오묘한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행복 플러스 잔치’를 통한 소중한 만남으로 좋은 소문이 퍼져 나가는 가운데, 영혼의 고향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여 행복을 플러스(+)하였습니다. 영원으로부터의 신비스러운 힘에 이끌려,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을 되찾는 ‘회복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습을 달리하는 만남 속, 행복 플러스 잔치를 통해, 작은 소자에게 한 것 곧 주님께 드려진 것과 부지불식간에 천사를 대접하게 하심에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립니다. 아멘, 할렐루~야!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손길에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영광을 드러내며, 필연코 승리합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잘못되지 않고, 모든 것이 플러스(+)되고 합(+)해져,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더 좋고 선한 결과를 이룹니다. ‘God raise me up more than I can be.’ 하나님께 사로잡혀 불가사의한 충동으로 이끌림 받는 의인들은 영화롭게 되면서 궁극적으로 ‘잃어버리고 있는’ 인간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되찾게 됩니다. ‘신비스러운 힘’에 사로잡혀 회복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깨달아야 하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옛날 내가 어렸을 때는 편의점이 없었다. 과자가게에 가면 주인아주머니가 눈깔 사탕하나를 덤으로 입에 넣어주었고 심부름으로 무 하나 사러 가면 본적도 없는 아저씨가 무를 건네주며 ‘꼬마야, 무 많이 먹고 얼른 커라’하며 격려해 주었다. 이제 마을에는 더 이상 사람들의 그런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사진작가 후지와라 신야의 말입니다.
그곳에는 이제 쇼핑몰과 편의점, 패스트 푸드점과 자동판매기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물건을 사고 팔 때도 훈련된 행동과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기계적 소음’을 듣게 될 뿐,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던 그 시절의 따뜻한 정서를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더 나아가 그곳에서 더는 인간다움을 맛볼 수 있는 인간관계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요즈음 컴퓨터, 모바일 기기 등 IT의 편리함을 떠난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으로 느끼게 되는 ‘불편함의 본질’에 대해 세계적인 스승들은 우리가 자주 경험하게 되는 지적 불편함이 ‘노화’ 때문이 아니라 IT가 주는 ‘편리함의 부작용’ 때문이라 주장합니다.
오늘날 현대인은 기계적 도구의 편리함에 중독된 삶으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가장 소중한 인간적인 것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보체계와 관련된 기술력은 하루가 다르게 끝없이 확장되고 있으며, 우리는 이미 그 편리함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 대가로 우리는 우리의 능력들 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인 것들 즉, 이성, 인식, 기억, 감정 등 이런 것들을 소외하고 있습니다. 도구들이 열어주는 ‘가능성’ 때문에 동시에 도구들이 가져오는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측면’의 소중한 가치를 폄하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키보드와 키패드를 사용하고, 학교에서는 필기 강의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우리 문화에서 이미 수기능력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자판을 두드리고 스크린 상에 마법처럼 글자가 새겨지는 것을 보는데 흥미를 느낄수록, 자기의 생각을 자필로 옮기는 능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누구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마치 농부가 기계식 써레와 쟁기를 사용하게 되면서 토양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되며, 동력 직기가 개발되어 방직공들이 수작업을 하는 것보다 많은 옷을 만들 수는 있지만, 섬유에 대한 감각과 그동안 숙련된 손재주의 일부를 잃어가고 있음을 아쉬워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깊은 생각에 잠겨 ‘지식의 본질’을 끌어내는 노력대신 오히려 ‘정보를 찾기 위한 경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본인의 체험보다는 타인의 것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으며, 스스로 만들기 보다는 만들어진 것들을 골라 사용하는 것의 편리함에 감동받고 있습니다. 도무지 불편한 것으로부터 취득해야 하는 어느 것도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도구가 주는 삶의 변화의 그 끝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자못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존 컬킨(John culkin)의 말과 같이 ‘우리는 도구를 만들고, 그 후에 도구는 우리를 만든다.’라고 경고하고 있는데, 그 말의 본질적 의미는 도구가 가져다주는 한계의 위험을 지적한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배꼽시계에 의존하던 옛 정취와 여유는 다 사라지고 없어졌습니다. 시계를 만든 후, 우리는 시계에 끌려 다니고 있고, 컴퓨터를 만든 후 컴퓨터가 우리를 부리고 있습니다. ‘편리함에 중독’되면 자기도 모르게 인간적인 것들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악한 영들이 교묘히 획책하는 이 시대! 사람의 사랑과 격려의 소리가 사라져버리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점점 더 삭막해지고 인정사정없어지며 ‘기계화’되어가는 이때 우리 크리스천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거창한 일은 아닙니다. 과자가게 주인아주머니와 같이 사랑스러운 손길로 눈깔사탕 하나를 덤으로 아이의 입에 얼른 넣어주는 일이며, 야채가게 아저씨처럼 아이에게 무를 건네주며 ‘꼬마야, 무 먹고 얼른 커라’하는 격려의 소리를 내는 일입니다. 요즘 듣기 어려운, ‘사람이 내는 사랑과 격려의 소리’가 만들어 내는 신비스러운 힘은 낮과 밤을 살아가는 인생에서 느끼는 ‘하나님의 손길’ 입니다.
기계적 도구는 규칙이나 매뉴얼을 따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떠합니까? 새롭게 규칙을 제정하기도 하고,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하면서, 타협하기도, 절충하기도 합니다. 순간뿐인 인생에도 영원을 꿈꾸고, 기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로봇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닙니다. 인간은 짐승과도 다릅니다. 인간은 신이 될 수도 없습니다. 인간만이 번뇌합니다. 이성과 감성, 이 둘이 끊임없이 다투고 갈등하기 때문입니다. 감정만 있는 짐승은 번뇌하지 못하고, 신성만을 지닌 신에게 번뇌라는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인간은 규칙대로,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닙니다. 기계적 도구와 다른 인간이기 때문에 감정도 인정사정도 없는 삭막하고 척박한 기계화, 로봇화가 되면 안 될 것입니다. 악의 영들의 계략으로 인해 인간성이 말살되는 이 시대에 무엇보다 필히 인간성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성을 회복하는 ‘사람다움으로의 변화’의 현장이며, 참된 인간미와 인간 멋이 풍기며, 살맛나는 인간의 맛과 정취가 물씬 배어있는 참된 인간을 만드는 모태(母胎)와 같습니다.
룻기 본문은 ‘헤세드’라는 중심어로 인간미, 인간 맛, 인간 멋이 물씬 풍겨나는 사람다운 사람들의 삶의 정취가 묻어있는 성경 중 가장 인간적인 휴먼 스토리라 할 수 있습니다. 룻기를 통해 헤세드 : 사람에 대한 정겨움, 즉 사랑과 인애의 의미를 지닌 헤세드의 손길로 인도받으며 헤세드의 삶을 살아가는 따뜻한 사람다움의 인생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는 나오미가 룻에게 베푼 따뜻한 헤세드의 손길, 그로 인한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베푼 정겨운 헤세드의 손길, 그로 인한 좋은 소문으로 말미암아 룻에 대하여 보아스가 베푸는 헤세드의 따뜻하고 정겨운 손길들이 어우러져 ‘다윗의 혈통’과 ‘그리스도의 가계’가 만들어지는 신비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풀 스토리는 당신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정겨운 헤세드의 손길로부터 비롯되어, 전개되며, 결과 되어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헤세드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도 일상의 삶속에서 나오미, 룻, 보아스처럼 헤세드의 정겨운 손길을 베풀므로써 그리스도의 신비한 역사를 이루어야 할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사람이 내는 따뜻하고 정겨운 사랑과 격려의 소리가 ‘신비스러운 힘’을 만들어 낸다는 진리를 잊지 마십시오. 사람다운 사람의 목소리와 일상의 삶속에서의 인간미 넘치는 진실 된 몸짓 속에 참으로 행복한 새 세상을 만드는 신비한 힘이 플러스된다는 진실 또한 명심해야 합니다. 고통과 병과 눈물과 사망이 없는 사람다움이 온전히 회복된 새 하늘 새 땅을 꿈꾸는, 영혼의 고향 과천소망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헤세드의 손길로 이 시대, 우리의 강퍅해지고 삭막해진, 로봇화 된 마음을 어루만져야 할 것입니다. 인간성이 말살되는 이 시대, 헤세드의 따뜻한 손길로 인간성을 회복합시다. 도구의 편리함에 중독되어 가장 소중한 인간적인 것들을 잃어버리는 21세기, 기계화 시대, 헤세드의 정겨운 손길로 하나님의 사람다움을 회복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