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입니다(히11:1). ‘성령의 안약’을 넣고, ‘사랑의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믿음의 말’로 바라는 것을 실제로 얻어내며 위대한 기적을 창조하시기를 소원합니다. ‘마음의 녹’을 걷어내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려 버리며, ‘밀어내야 할 것’은 밀어내기를 소망합니다.
이성적 동물이라는 인간들, 그러나 ‘이성(理性)’은 설득의 중요한 논리를 제공할 뿐,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감성(感性)’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성’과 ‘감성’이 공존합니다. 둘은 본래 ‘같은 편’입니다. 감성이 방향을 제시하면, 이성은 그 근거를 제시합니다. 고로 ‘이성은 감성의 시종’일 것이라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의 명제가 옳습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그러나 이성은 도구에 불과하고, 욕구와 감정에 따른 수단일 뿐이며, 이성이 그 목적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데이비드 흄
요컨대 감성은 ‘느끼는 것’으로서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성은 그에 대한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그 감성적 방향성을 지속하고 강화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흄의 말처럼 인간의 이성은 감성을 써포팅(supporting) 하여 돕되, 그 ‘폭이 좁아서’ 이 세상에서의 인간관계에 관하여 돕는 일에만 제한되어 활동합니다. 이성은 ‘신의 세계’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이성으로는 하나님과 그에 속한 신비한 영역을 헤아려 알 수도 없고,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판단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성으로 신령한 역사를 펼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또한 그의 하시는 일을 연구하여 알 수 있겠습니까?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의 사건’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설명하거나 논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성은 신비한 영역에서는 그 무엇도 도울 수 있는 처지가 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감성은 느끼는 것으로서, ‘폭이 넓어서’ 신비한 영역 까지도 감지할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성적 판단으로 근거와 이유를 대고,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는 없어도 그저 감성적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겠습니다. 바로 이 감성의 영역이 느끼는 신비한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성적 판단 대신, ‘믿음’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감성이 무디어지고, 감성적 느낌이 메말라가는 ‘기계화’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감성을 일깨워, 살려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비한 영역 속에 일어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감지하여 참여할 수 있기 위하여,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이성이 아닌 감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크리스천의 중차대한 의무로서, 미움에 가려진 사랑을 회복하여, 감성의 기능을 되살려 내야 합니다.
프랑스 파리 미라보 다리위에서 구걸로 하루 10유로 남짓 버는 맹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지나가던 노신사가 그를 가엽게 여겨 몇 글자의 ‘메시지’를 적어 남겨줍니다. 그 후 맹인의 수입은 다섯 배로 껑충 뛰었습니다. 걸인의 동냥그릇 옆에 세운 푯말의 메시지 내용 때문입니다. ‘봄은 오건만, 여러분들이 보시는 이 아름다운 봄날을, 저는 볼 수 없습니다.’
이 글을 읽고 지나가던 행인들의 마음이 흔들립니다. 이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이 봄날을 못 보는 사람도 있구나. 아! 이런 사실을 잊고 살았는데...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일깨워지며, 왠지 앞 못 보는 걸인에게라도 무언가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과 행동이 걸인의 소득을 증대시킨 원인이라 하겠습니다. 감성을 자극한 메시지는 걸인에게는 도움의 손길을, 지나가던 행인에게는 새로움을 일깨워 감사하는 마음에 눈을 뜨게 합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감성이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정 화백은 가끔 돌출 행동을 하는 유파가 다른 후배, 이 선생을 매우 싫어합니다. 그 미움이 얼마나 심한지 정화백은 사석에서 이 선생을 언급할 때면, 입에 달고 지칭하는 말이 ‘그 새끼’이었습니다. 어느 때에 미술공모전이 열려 이 선생도 작품을 출품했는데, 마침 그 대회에 심사위원장으로 정 화백이 선임됩니다. 심사가 진행되어 두 작품이 최종심의에 오르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이 선생의 작품입니다. 규정에 따라 심사위원장인 정 화백이 대상을 선정하게 됩니다. 정 화백과 이 선생의 껄끄러운 관계를 잘 알고 있는 심사위원들의 예상은 뻔했습니다. ‘이 선생 탈락.’ 아니나 다를까? 정 화백은 이선생의 작품 앞에서 한참동안이나 벌레 씹은 표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란히 놓인 또 다른 작품을 바라보다가 다시 이 선생의 작품을 반복하여 감상하기를 수차례, 마침내 결심이선 정화백은 몸을 획 돌리며 내뱉었습니다. ‘개새끼!’ 그 뒷말이 걸작입니다. ‘그래도 그림 하나는 잘 그린단 말이야!’ 대상을 이 선생이 차지한 것은 물론입니다.
이것을 걷어내면 그것이 보이는 법입니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바는, 바로 가슴 넓음인 ‘금도(襟度)’입니다. 즉 단점과 장점을 나누어 받아 드리는 도량입니다. 이성적 판단에 의하면 이 선생의 돌출행동은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행동입니다. 독선적이며 배려함이 없고, 분위기와 동떨어진 행동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이성은 제공합니다. 그렇게 쌓이고 고착된 ‘미움을 잠시 밀어내면’ 그 뒤편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성적 판단에 의해 가리워져 있던 것을 밀어낸 후, 드러나게 된 진정한 그것을 심사위원장 정화백은 감동을 느끼며 보는 것입니다. 작품은 본래 감상하는 것이며, 감성의 기능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사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믿음도 미움에 휘둘리지 않는 정 화백 같은 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미움을 밀어내고 사랑할 것을 찾아내는 정 화백의 눈길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그 눈길에서 예수를 봅니다. 긍정의 눈길만이 미래를 만들어 갈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실천해야하는 사랑의 계명이 있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사랑은 명령을 한다고 해서 실천할 수 있는 업무가 아닙니다. 사랑할 이유를 찾을 때, 비로소 진정성이 있는 사랑을 원수에게도 줄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원수에게서 찾지 말고 예수로부터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만이 복수심을 밀어내고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을 아십니다. 예수 안에서 이성은 설득의 중요한 논리를 제공하나,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감성이라는 진실을 깨닫습니다. 감성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화면 속 세상만 볼 것이 아니라, 하늘을 보게 하는 것도 우리 소망인이 해야 할 일들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본문의 주님의 말씀처럼, 어린아이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해도 함께 슬퍼하지 않는 ‘감성이 무디어 진’ 세대가 바로 오늘 우리의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성적 판단에 짓눌린 감성을 자유롭게 살리는 일입니다(눅7:24-35).
유대인의 고정관념, 바리새적인 이성적 판단에 의한 경멸과 미움이 감성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아닙니까. ‘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청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참람되다. 유대법상 신성모독이야, 십자가에 달아 죽여야 한다.’ 유대적 전통 속 삶의 현장에서, 바리새인들의 고착화된 이성적 판단이 감성을 가리고, 감성적 느낌을 억눌러 마비시킴으로 감성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성적 판단으로 인한 경멸과 미움에 가려져 하나님의 아들의 진정한 실체가 드러나지 못하게 됨으로써, ‘감성의 기능을 살려’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구세주(Christ)를 사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참 사람이 되기 위해 감성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감성을 일깨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며,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감성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사회의 통념 속에서 도덕적 잣대, 이성적 판단이 감성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감성을 도와야 할 이성이 역기능을 해, 오히려 감성을 억압하고 족쇄를 채워 억누르는 역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21세기 기계화의 시대, 도구의 편리함에 중독되어 인간성이 상실되어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이 시대는 감성이 무디어진 시대입니다. 어린아이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슬퍼하지 않는 무감각한, 감성의 센서티브가 상실된, 영적 한센씨병에 걸린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감성을 일깨워 신비한 영역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 말씀의 역사를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자가 건강한 신앙인일 것입니다. 이성적 판단에 의해 가려진 것을 밀어내야 합니다. 미움을 밀어내고 사랑할 것을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수심을 밀어내고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감성이 메마르지 않고 무디어지지 않고, 풍부해져서, 감성의 기능을 되살려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100% 순도 있게 믿을 수 있는 자가 영생 받을 참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브라 카타브라!’ 말씀대로 되어 질 줄 믿습니다.
‘암(癌)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운명을 같이 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땅에서의 수명을 다 마치면 하나님께서 다시 불러 가시는 것이지, 암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지, 그 무엇도 그 어떤 것도 감히 그 신비한 영역을 침해하거나 해칠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生命)!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살라(生)! 명(命)’하시면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 카타브라! 암은 병도 아닙니다. 아브라 카타브라! 암도 병입니까? 마음먹기에 따라 더 이상 암은 병이 아니니,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질병, 모든 암은 극복되었습니다. 아브라 카타브라! 어떤 문제든, 마을의 문제든, 공동체나 개인의 문제든, 생명살림의 영적 문제든, 생명살림복합단지 건설의 물적인 문제든, 죽음이든, 권세자이든, 깊음이든 낮음이든 그 어떤 문제든 극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소망인은 모든 문제와 장애를 극복하고 불안의 꽃을 피우므로 심금을 울리는 명품악기처럼 감성이 풍부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무디어진 감성을 일깨워 살립시다. 사람을 움직이는 건 감성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