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살아갈 용기가 없어질 때, 너 홀로 앉아서 낙심치 말고, 예수님의 품으로 나아오세요. 예수님은 나의 생명 길, 믿음 소망 사랑되시니, 십자가 보혈 자비의 손길로 상처 입은 너를 고치시리라~ 아멘!’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5:13-14) 멸망 길은 넓으나, 천국 길은 좁고 협착합니다. 우리는 돌아오는 길이 없는 천국 길을 가고 있습니다.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그 천국의 정로(正路)를 가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 영생의 정로는 ‘지식’으로 인도되는 길이 아니라 ‘성령(聖靈)’으로 인도되는 길입니다. ‘지식의 길’은 대단한 것처럼 보여도 그 끝은 허무한 것입니다.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마치 바다 깊숙이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점점 더 갑갑해지고 곤고할 뿐, 결과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식의 허영에 매달리지 말고, 운명과 숙명과 팔자 등에 속지 않는 진리의 생명 길을 가야 합니다. 영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은 마땅히 ‘신령(神靈)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성적 판단만을 근거로 지식의 허영에 사로잡혀 머리로 계산하지 말고, 가슴으로, 영혼으로 움직여 가야 합니다. 감성과 영성을 계발함으로써, ‘지식의 길’이 아닌 ‘영의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육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이고 평안입니다(롬8:6). ‘사람의 생각’과 ‘육의 소욕’은 하나님의 역사를 반대하며, ‘성령의 소욕’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하시는 말씀을 따라, 영으로 사는 자들은 좁은 길을 갑니다. 약속의 말씀으로 낳음 받은 ‘약속의 자녀’는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시며 세상에서 핍박과 곤란과 어려움을 당하나, 그 십자가의 길 끝에서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약속을 받은 약속의 자녀는 야곱처럼 험악한 세월을 지낸 후, 좁은 생명 길의 끝에서 영광의 실상을 목격할 것입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꾀 많은 고양이 ‘체셔 켓’이 이상한 나라를 벗어나기 위해 갈림길에 선 엘리스와 이런 말을 주고받습니다. 엘리스: ‘어떤 길로 가야하나?’ 쳇이 되묻습니다: ‘어디에 가는데?’ 엘리스: ‘모른다.’ 쳇: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면 아무데도 갈 수 없단다.’
지금 당신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습니까? 말썽장이, 사고뭉치, 참 힘들게 하는 양 우리를 뛰쳐나간 잃어버린 양한마리를 찾아나서는 주님의 마음!, 세상에서 허랑방탕하며 방황하는 탕자를 용서하고 껴안으며, 주님의 심정으로 지식의 길이 아닌 천국 좁은 길을 가고 있는 당신은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갈림길에서 분명코 정로(正路)를 선택할 것입니다. 천국 좁은 길은 ‘믿음의 신’신고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이성적 판단과 지식으로만이 아닌, 영성과 감성이 계발되어, 뜨거운 가슴으로, 영혼으로 ‘영의 길’을 가야 합니다.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네로 황제가 불타는 로마를 보면서 시상을 떠올리기 위해 로마 시가지에 방화를 하고는 기독교인을 방화범으로 내몰아 핍박을 하던 중에 로마를 피해 도망하던 베드로에게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서 어디론가 가고 계신 주님을 향해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아무래도 내가 로마로 가서 다시 십자가를 져야 할 것 같다.’ 베드로는 화들짝 놀라 깨닫고 다시 로마로 발걸음을 돌려 자신도 주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장렬하게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사람의 생각, 육의 생각’은 ‘영의 생각’과 원수가 되며, ‘육의 소욕을 따르는 길’과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길’은 정반대가 됩니다.
본문은 ‘길’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천국 가는 좁은 길에 관한 ‘십자가의 도(道)’를 나타냅니다. 인생이란 고해(苦海)길입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신앙의 인생이란 마치 폭풍 치는 바다의 물위를 걷는 것과도 같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매일 매순간, 물위를 걷는 것과도 같은 좁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우린 인생의 고해길, 신앙의 고해길을 가는 약속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오라!’ 말씀하시는 주님을 따라 물위를 걷고 있습니다. 물위를 걷는 것, 즉 영생의 말씀이 여는 은혜를 따라 ‘물위를 걷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 위를 믿음으로 걸어가는 가운데, 시험과 환난의 폭풍, 돈, 이성, 명예의 유혹의 광풍이 불 때, 이를 극복하고 물에 빠지지 않고 걸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십 여리를 주님이 물위로 걸어오셨습니다. 폭풍우 치는 갈릴리 깊은 바닷가 새벽 네 시경, 제자들이 타고 있던 돛단배 곁으로 저벅, 저벅, 주님이 물위를 걸어오신 것입니다. 바다 한가운데서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주님을 유령(ghost), 귀신으로 잘 못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그의 하시는 일을 잘 못 알면, 복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을 해를 끼치는 대상으로 오해하게 되면, 그 좋으신 주님이 그만 공포와 무서움의 대상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과 그의 뜻을 온전히 바로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과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복주고, 이롭게 하기 위한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물위를 걸어오시는 주님께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 말라’ 하시자, 베드로가 용기 내어 말합니다. ‘만일 주님이시며,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주님이 오라 하시면 나도 물위를 걸어 주님께 나아가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라!’, 그 즉시,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로 뛰어 들어 한발자국, 두발자국, 세발자국........물위를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물위를 걸은 최초의 사람이 되어 물위를 걸어가다가, 일렁거리는 물결과 무섭게 불어 닥치는 바람 때문에, 움찔~하며 가던 발걸음을 멈춰서서 ‘어~ 내가? 물위를 걷네...’하는 순간 그만 물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다급하게 소리 질러 ‘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어 건져 내 살려내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야, 왜 의심하느냐’하시며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인도하시며 함께 배에 오르십니다.(마14:22-33)
본문을 통해 믿음의 신을 신고 천국의 좁은 길을 가는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1. 고착(固着)을 부정해야 합니다. 물위를 걷는 것과 같은 신앙의 길을 가는 우리는 절대로 가던 길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신을 신고 가던 길을 계속 가야만 합니다. 그 길에서 멈추는 그 순간 물에 빠져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어떤 풍파, 시험, 환난, 고통이 몰아닥쳐도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가야만 할 것입니다. 가던 길에 고착되어 한군데 눌러 붙어서 움직이지 않으면 그 길이 막혀버리게 됩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의 통행이 막혀버려 오도 가도 못하는 불상사가 생깁니다. 고착을 부정하고,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2. 들뜸을 경계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들뜸으로 조급하게 날아가려 하다가는 물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날아갈 수 없는 길이고, 걸어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한 걸음, 또 한걸음씩 정도(正道)로 걸어가야 합니다. 객기를 부려서도 안 되고, 들떠 안정되지 못한 채, 허둥지둥 소란 피우지 말고, 차분하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바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3. ‘나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이 천국 좁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점을 시인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베드로를 붙들어 주님이 구원해 살리셨습니다. 이처럼 영생에 이르는 구원의 길은 사람의 힘과 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만, 오직 주의 능력으로만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이 좁은 생명 길의 처음과 과정과 마침이 다 하나님의 힘과 은혜와 주장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물위를 걷는 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입니다. 물위를 걸음과 함께 동정녀 탄생,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 등, 주님은 인간의 상식 밖에서 활동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이른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라’하신 주님이 말씀으로 여는 길은 인간의 상식 밖의 영적 차원을 지니는 영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주님의 영생의 말씀이 여는 상식 밖의 좁은 길을 가는 우리, 믿음의 신을 신고 고착을 부정하며, 가던 길을 계속 갑시다. 들뜸을 경계하며, 나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에 이끌리어 물위를 걷고 또 걸어 나가면 마침내 영광의 나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가리라. 주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는 좁은 길을 가게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