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anksgiving! 십자가의 사랑을 확장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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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저렇게 붉게 익혀 졌을 게다. 저게 혼자서 둥글어 질 리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땡볕 두어 달, 초승달 몇 달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들어 졌을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욥처럼, 다윗처럼, 베드로처럼, 바울처럼.... 선진사도들처럼 고난의 태풍, 시련의 천둥, 핍박의 벼락, 환난의 번개가 들어서서 우리네 인생이 그리스도의 맛과 멋이 나고, 농익은 생명의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 할 수 있습니다. 고통이 내안에 들어와, 나를 구성하고 만들어가며 나 자신으로까지 되어 진다 하겠습니다. ‘방향 없는 인생’에게 고통이 주어지면 그저 힘없이 무릎을 꿇고 절망하여 스러져 버리지만, ‘방향이 확실한 인생’에게 주어지는 고통은 강력한 의지와 인내력과 열정을 만들어 냅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가는 축복된 고통을 그저 내 인생의 일부로 포용할 수 있는 자는 어떠한 고통에도 무한 감사를 하게 됩니다.
물 한잔을 마실 때에도, 먼저 우물 판 사람들의 수고에 머리 숙여 전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참으로 말로 다 도저히 형언할 수 없도록 많은 감사가 있습니다. 오늘의 나를 만든 수없는 감사할 사건에 감사하고, 주님께 감사하며, 주안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 본문은 특히 주님의 큰 사랑을 받은 바울이 주안의 복음의 동역자들인 데살로니가교회의 사람들의 믿음과 사랑에 감사하면서 주의 재림을 대망하는 ‘사랑화’된 알곡신앙인들의 참된 삶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살전3:6-13). 영생의 열매를 추수하기 위해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고대하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의미심장한 감사의 편지이기도 합니다.
위대한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제일로 기뻐하시는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뿌려진 영생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보람찬 추수 시대!, 알곡의 신앙인으로 천국곳간에 들여질 것을 소망하는 자는 감사의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추수의 계절! 추수할 때가 이르렀습니다. 고통의 태풍, 천둥, 번개, 벼락의 가슴 타는 역경을 감사하며 극복하고, 무서리 내리는 몇 밤, 땡볕 두어 달, 초승달 몇 달의 애간장 녹이는 과정을 극복해야 추수 때, 무르익은 영생의 첫 열매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고, ‘사랑의 딜레마’를 극복함으로써 영광된 열매로 결실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사랑이 품고 있는 딜레마에 관한 오묘한 신비를 깨닫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다음의 ‘장자의 바다 새 이야기’와 ‘아라비안 나이트의 천일야화’를 통해 사랑의 딜레마를 극복함으로써 영광된 첫 열매로 결실되는 알곡신앙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바다새 이야기를. 노나라 임금은 바다에 사는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해주며 소와 돼지를 잡아 대접하였습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합니다.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 아닙니다. 이는 장자가 지극(至極)편에 말한 ‘바다새 이야기’입니다.
노나라 임금은 바다새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까이 두어, 애정을 베풀게 됩니다. 좋은 술 권하기, 고기 먹이기, 궁정음악 연주해주기 등. 어리둥절한 바다새는 슬퍼하다 사흘을 못 견디고 죽게 됩니다. 이런 호의는 임금의 순수한 사랑으로 대접한 것이나 바다새에게는 괴로운 시달림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그 모든 애정 표현들에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분별없이 자기 방식만을 옳다고 고집하는 애정의 표현들은 바다새처럼, 여리고 고운 인간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 그 자체는 순수합니다. 하지만 사랑이 품고 있는 딜레마의 ‘사랑하기 때문에’ 라는 이 말의 의미는 ‘더 이상 사랑일수 없다’라는 새로운 의미가 부여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딜레마가 극복되어야 합니다.
페르시아의 대왕 ‘샤리아’는 사랑하는 아내를 궁중에 두고 사냥을 나갔다가 잠시 돌아와 보니, 왕비가 흑인 노예들과 집단으로 희롱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을 준 아내에게 사랑받기를 바라는 욕망 있는 그의 사랑이 분노로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격노한 왕은 왕비와 노예들의 목을 베어버리고 여자들에 대한 복수를 시작합니다. 매일 밤 아름다운 여자들과 동침을 한 뒤 그날로 다 죽여 버리고 맙니다. 민심은 흉흉해지고 남아나는 아가씨도 없었습니다. 왕은 국무대신에게 새 처녀를 찾아오라고 명령했지만 대신은 끝내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고 자초지종을 물은 끝에 사실을 알게 된 ‘셰에라자드’와 ‘디나르자드’ 두 자매는 왕비가 되겠다고 자청합니다. 재색을 겸비한 셰에라자드는 지혜를 발휘해서 왕과 동침한 후, 왕에게 각 나라의 전설과 역사를 들려주며 밤을 지새우게 했고, 왕은 다음이야기가 듣고 싶어 그녀를 살려둡니다. 그렇게 1001일 동안 계속 이야기를 듣게 되며, 왕의 마음에 사랑이 싹트게 됩니다. 여자를 증오했던 왕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정식 왕비로 맞이하였으며 이후 성군이 됩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천일야화 중에서
사랑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습니다. 사랑은 때로 상상할 수 없는 분노로 모습을 바꾸기도 합니다. 얼음을 녹이는 불이 되었다가도, 불에도 녹지 않는 얼음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모습을 바꾸는 사랑이라는 딜레마를 극복해야만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고통가운데 태어나 고통가운데 살아가고, 고통가운데 마지막을 맞이할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 것입니까?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건’ 살아있음의 증거입니다. 참된 사랑에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그렇습니다. 이젠 예수의 십자가 사랑이 절실 할 때입니다. 사랑이라는 딜레마를 극복한 예수의 십자가 사랑은 끊임없이 주기만 하는 사랑으로, 살리고자 하는 사랑입니다. 욕망이 없는 예수 사랑 확장은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Thanks+giving! 추수감사절, 감사, 감사, 감사하는 당신은 무엇을 나누어 주고 계십니까? 진정 감사하다면 무엇보다도 예수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창피, 수치, 모욕을 당하고 자존심도 버리신 채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못박혀 목숨까지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고통을 당하시며, 댓가없이, 욕망 없는 사랑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사랑의 딜레마에 빠져 노나라 임금처럼 자기위주의 일방적이고 독재적 사랑을 극복한 ‘이타적(利他的) 사랑’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욕망 있는 사랑으로 인해 사랑이 분노로 모습을 바꾸어 셰리아왕처럼 왕비를 죽여 버리고 마는 증오의 사랑을 극복한 그런 참사랑, 십자가 사랑을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아~ 가이없는 십자가 사랑! 우리, 이웃, 가족과 목장원과 부서원, VIP 귀한 사람을 영원히 살릴 수 있는 십자가 사랑! 추수감사절,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는 십자가 사랑을 확장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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