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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 리더십으로 양들을 춤추게 하라! 요한복음 10:1~18. 2011-11-27

감사^^* 2012. 1. 9. 13:34

예수사랑 리더십으로 양들을 춤추게 하라!
요한복음 10:1~18    2011-11-27
 
 

‘사랑하는 자들아, 행인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그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벧전2:11-12). 인생의 여정(旅程)은 나그네 길입니다. 신앙의 여정도 이와 같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의 감동적인 대통령 퇴임연설에서 이런 멋진 말로 감동을 선사합니다. ‘나는 이제 장엄한 일몰로 향하는 인생의 여정을 시작하려 합니다!’ 인생은 끝이 있다는 것과, 인생이란 멈추지 않고 계속 가야 하는 ‘나그네 길’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라코다 인디언 할아버지와 방금 아버지를 여윈 손자 제레미와의 다음과 같은 대화를 통해 인생여정의 나그네 길에 관한 진리를 음미해 봅니다. ‘할아버지,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어요?’. ‘인생은 커다란 여행(旅行)이란다. 잘 살펴보면 그 안에 부닥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어.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양지를 걸어갈 때도 있고 음지를 걸어갈 때도 있지. 넘어져 봐야 언제 일어나야 하는지를 알게 되고, 굶주려보지 않으면 풍요로움에 감사할 수 없단다. 한번씩, 한 순간씩 이겨내다 보면 강해진다. 영웅들도 갈림길에선 갈등을 하지, 하지만 가던 길을 멈추는 일은 없단다.’ 정규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지만 할아버지는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어찌 보면 할아버지의 말처럼 인생의 여정이란 갈림길을 만나 머뭇거리기는 해도 계속 가야만 하는, 운명의 배낭을 짊어지고 가는 나그네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지만 왠지 편안할 때가 있고, 늘 다니던 길이라도 처음 가는 것처럼 낯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힘겹게 길을 걷다보면 누구나 한번쯤은 예기치 않은 갈림길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 ‘어느 쪽 길로 가야하는 가’ 하는 갈등은 예전 인류의 조상으로부터 오늘의 구도자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없습니다. 고향에서 편안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던 부잣집 아들 아브라함은 어느 날, 고향을 떠나 알 수 없는 미지의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대로 안정적인 편안한 삶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 새로운 도전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 수많은 날의 갈등 속에, ‘이렇게 해야 하나 아니면 저렇게 해야 하나’ 하는 갈림길에서의 머뭇거림 속에서, 그는 드디어 알 수 없는 세계로의 도전의 첫발을 내딛습니다. 불가사의한 이끌림에 의해 미지의 인생길로 내딛는 그의 첫걸음으로부터 인류의 위대한 종교가 시작되게 됩니다. ‘출(出)!’,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늘의 더 나은 본향을 향해 떠나는 이 세상 ‘나그네 길’, ‘순례자의 인생 여정’이 기독교의 본질적인 신앙 여정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여정의 나그네 길을 가다보면 누구나 갈림길을 만납니다. 어느 길로 가야하나 갈등하는 그 속에 위대한 좁은 길이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사창가에 버려진 채 다른 사람의 눈길을 피해 쓸쓸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한 여인이 대낮에 물동이를 이고 ‘야곱의 우물’로 가는 길에 나타났습니다. 한 낮, 작렬하는 태양의 무더위 속에 동네 아낙네들을 피해 운명이라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나타난 이 가련한 여인이 우물가에서 물을 길으려 하는데, 한 유대인 청년이 물을 달라고 청합니다. ‘본래 상종조차 하지 않는 유대인께서 사마리아인인 저에게 물을 달라하시다뇨?’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다시 물을 길러 오지 않아도 될 수 있다는 희망찬 그의 말에 그녀는 ‘내게 그런 물을 주소서’라고 간청합니다. 이러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그녀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 말씀하시는 그의 따뜻하지만 위엄이 있고, 조용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음성을 통해 그녀의 인생길에 신비한 변화가 생깁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이 아름다운 정경은 운명이라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길동무도 없이 힘겹게 홀로 걷던 ‘여인의 여정’에 변화를 알리는 은은한 종소리를 연상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알게 하는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가 모두 다 알게 해 주실 것’이라는 그녀에게 ‘내가 바로 그니라!’하시는 그 젊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녀의 영혼은 기뻐 춤추기 시작합니다. 참을 수 없는 기쁨과 환희로 춤추며, 마을을 향해 내달려가는 그녀는 방금 전의 대인기피증이 있던 그녀가 아닌, 새 삶을 살아가게 된 새로운 인생으로 바뀝니다. 기뻐 춤추며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가 오셨으니, 와 보라!’ 외치는 사마리아 최초의 전도자로서의 인생길을 가게 됩니다. 주님과의 이 같은 특별한 만남이 있은 후, 그 길에서는 남의 시선을 의식한 채 힘겹게 걷던 사마리아의 가련한 여인의 모습을 더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인생의 나그네 길을 이제 길동무와 함께 걷기 때문입니다. 길가는 ‘나그네’에겐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 중 하나는 ‘물’입니다. 또 한 가지는 ‘길동무’일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이란 그 외면은 ‘물리적인 육체(肉體)’로 이루어져 있고, 보이지 않는 내면은 ‘정신적인 영(靈)’으로 결합되어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필요한 물에도 ‘육신이 마셔야 하는 물’과 ‘영혼이 마셔야 하는 생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길동무에도 처지가 같고 소원하는 바가 비슷한 ‘인간’과, 갈림길에서 갈등할 때 내면의 소리를 내어줄 ‘영혼의 친구’도 꼭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전자의 물리적인 물이나 길동무는 구하거나 사귀면 될 것 같은데, 후자의 ‘마음이 마셔야 하는 생수’와 ‘영혼의 친구’는 구하거나 사귈 수 있는 대상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매입이 가능한 생수는 아닐 것이고, 찾아 헤맨다고 만날 수 있는 존재도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자에 영혼의 갈증을 풀어줄 생수와 영혼의 길동무는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후자의 경우,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스스로 나타나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그니라’하시며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시지 않으셨다면 그 여인이 알아 볼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나타내 보이시지 않았다면 그녀는 결코 그를 그리스도로 알아볼 수도 없었을 것이고, ‘영혼의 길동무’를 만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세파에 시달리고 순수가 짓밟히는 인생의 나그네 길에서 목적 없이 이끌려 살아가던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의 ‘그 분과의 만남’은 우연이라 하기에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필연적인 은혜의 특별한 만남은 성경에 두 가지의 실례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예정(predestination)’에 관한 말씀입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선과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롬9:11-13). ‘내가 복중에서 이미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도록 정했다’하심으로 야곱을 미리 정하셔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다른 하나는 ‘선물(gift)’로 표현하신 것으로서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일들에 대한 ‘믿음’에 관한 말씀입니다(요4:10,마15:21-28)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은 ‘선물’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물론 이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속에서 영광된 복을 주시기 위해 미리 정해놓으신 은혜의 섭리 안에서 주어지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은혜의 선물’임을 전제합니다. 피부색깔이나 국적에 상관없이 남녀노소나 신분에 구별 없이, 겸손하게, 성령으로 나타내는 ‘하나님의 일’을 믿으면, 그것으로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됩니다. 두 갈래 길에서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나그네 된 우리, 이 순간이야말로 하늘을 향해 더욱 더 크게 소리 높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제가 믿사오니, 인도하옵소서!’ 그렇습니다. 보내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해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소리를 내어 본인의 의지이든, 본인의 의지가 아니든, 옳은 결정을 하도록 도울 수 있는 ‘영혼의 길동무’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를 선물(gift)받으신 당신은 모든 크리스챤들의 자랑이며, 당신 소망인의 인생여정은 영원히 주님과 함께 기쁨으로 춤추며 살아가야 할 행복한 인생입니다. 영원히 함께할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며, 목숨을 바쳐 참으로 사랑하십니다.
 
‘사랑’이란 늘 곁에 있어주며, ‘동행(同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길동무’가 되어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그네 인생길의 참된 목적을 향해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정서적으로 공감(共感)하면서 방법을 터득해 어떤 문제들도 스스로 극복할 수 있게 돕는 것이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비오는 때, ‘우산을 주는 것’보다 ‘함께 비를 맞아주는 것’이야말로 참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김황식 총리와 같이 연평도 희생 장병 추모식장에서 우산을 치워버리고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애통하는 희생자들의 가족들과 함께 진심으로 흐느껴 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 사랑이란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리더, 두 종류의 리더십이 있다 하겠습니다. 바로 ‘양떼 몰이식 리더십’과 ‘예수사랑 리더십’ 입니다. 그런데 이런 ‘양떼 몰이식 리더십’과 ‘예수사랑 리더십’은 그 차원을 전혀 달리 합니다. 신앙의 정상인 시온산을 등정하기 위해서는 회초리 들고, 개 풀고, 강제적으로 몰아가는 양떼 몰이식 리더십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양떼 몰이식 강제적 규제와 강요에 의한 리드는 속성의 한계를 극복해 낼 수 없음으로 정상에까지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방법은 하나뿐 입니다. ‘양들을 춤추게 해야 합니다.’ 함께 기쁨에 겨워 춤추게 되면 고비 고비를 넘어갈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양들을 춤추게 하여, 기뻐하며 자발적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사랑 리더십’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욕망이 없는 사랑, 그런 예수사랑, 십자가에서 기꺼이 죽을 수 있는 그런 참된 예수사랑을 지닌 리더십으로만 양들을 기뻐 춤추게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런 예수사랑 리더십으로만 양들을 시온의 정상으로 인도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선한목자의 참사랑의 음성을 듣게 되는 하나님의 양들은 춤추게 됩니다. ‘어린아이가 장터에서 피리를 불 때 기뻐 춤추지 않는’ 자들은 불의의 세대를 사는 불의의 자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특별한 기능을 갖춘 하나님의 양들, 하나님의 자녀들은 위험에 처할 때 도망가 버리는 삯군 목자의 음성에는 도망하지만, 참된 사랑의 음성을 듣게 되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뜨거운 열정으로 움직이게 됩니다(요10:1-18).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고 사랑은 춤추게 되는 것이라서, 참된 사랑으로 공급되는 생명의 에너지가 분출되어 기뻐 춤추게 되는 것입니다. ‘love is moving, and dancing!’
 
국민영화로 선정됐던 ‘서편제’의 하이라이트가 눈에 선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득음을 한 주인공 ‘송화’와 그의 스승이자 아버지와 함께, 굽이굽이 휘돌아 나있는 남도의 한 고갯길을 흥에 겨워 북에 맞추어 ‘진도아리랑’을 부르면서 춤을 덩실 덩실 추는 장면입니다. 마치 주님과 함께 새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가는 천국 길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민족혼을 일깨우고 겨레의 흥을 돋우며, 한민족을 한 공감대로 묶는 신비한 감동의 힘을 지닌 ‘아리랑’은 본래 그 말뜻을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랑~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나~았~네~~’하며 아리랑 가락이 나오면, 한국인들의 마음은 그저 뭉클해지며 이내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하늘로 부터의 소망 아리랑이 불려지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선한 목자의 참 사랑의 음성이 들려지면 그저 마음에 감동이 차며, 뭔가 모르게 좋고 기쁘고 행복해 집니다. 거역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충동에 이끌림을 당해 함께 동고동락하게 됩니다. 참사랑의 수혜를 받음으로 춤추는 양들이 되어, 참사랑의 전달자가 되는 것입니다.
 
2011회기년도를 마치고, 2012년 새로운 회기년도가 시작되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의 새로운 토대가 마련되는 오늘부터, 양들을 춤추게 하는 ‘예수사랑 리더십’을 확장해 갈 것입니다. 앞으로 2012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하나님의 꿈을 함께 이루기 위하여, 이제 12월1일부터 한 달 동안 기뻐 춤추며 새벽을 깨우는 영혼생명잔치를 벌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육, 복지, 문화의 생명살림 복합단지를 건설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를 소원하는 과천 소망인들이 함께 꿈꾸며, 함께 비전을 갖습니다. 이는 이미 하늘에서 그려진 하나님 성전의 청사진대로 이 땅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하늘 성전, 이 세상의 ‘온리 원(only 1)의 교회’로 열방만국위에 주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입니다.

300의 예수사랑 리더십을 만들기 위해 함께 기도하며, 함께 꿈꾸는 비져너리가 됩시다. 300의 기도의 마중물, 꿈의 마중물, 비전의 마중물이 되기를 소망합시다. 우리 시온의 정상으로 함께 갑시다. 예수사랑 리더십으로 양들을 춤추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