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이 바로 ‘축복 자체’입니다. 약속이라는 복 자체가 ‘복된 과정’을 거쳐 ‘복된 결과’를 이룹니다. 약속을 받은 자는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온유하고, 긍휼히 여기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며,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8가지 ‘복된 과정’을 통과하여 눈물과 병마와 사망이 없는 영생복락의 ‘복된 결과’에 필연적으로 이르게 됩니다(마5:3-12). 영생의 약속대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복된 유업을 받게 되는 하나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약속은 결코 파기되지 않습니다. 언약대로 정녕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나 하늘의 전략을 지시받은 여호수아의 지시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침묵 속에서 일사분란하게 일곱 바퀴를 돌라는 지시에 단순 복종함으로써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 복지에 입성함 같이 언약이 성취될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마음가짐에 갈렙의 마음가짐이 합해지고 또 한사람, 또 한사람, 또 한사람의 마음가짐이 합해져 승리의 함성을 외침으로 마지막 원수인 사망이라는 난공불락의 성이 무너질 것이며 영광중에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주안에 한 몸 공동체로서 존중되어져야만 하는 각기 다른 은사가 있습니다. 주안에서 서로 다름이 틀림으로 비하되지 않고 우리로서 존중될 때, 균형 있게 조화로운 하모니를 이루며 주께서 뜻하시고 원하시는 일들을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각기 다른 은사는 진실로 존중하되, 어떠한 정황 중에도 마음만은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가짐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 하는 마음가짐에 따라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필연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다른 마음가짐에 따라서 그에 따른 필연적 결과가 나타나는 법입니다.
수많은 석공들이 분주하게 돌을 다듬고 있는 현장에 유난히 눈에 띄는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른 석공들과는 달리 어찌나 몸놀림이 빠르고 유연한지 일하는 모습만으로도 구경거리가 될 만합니다. 여행객인 한 젊은이가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건넵니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나요?” 셋 중의 한사람이 귀찮은 듯 대답합니다. “겨우 일당 3리라를 받기위해 이렇게 힘든 일을 하고 있소.” 또 한사람의 석공은 이마에 땀을 훔치며 대답합니다. “보시다시피 돌을 쌓고 있습니다. 제가 해야 하는 일은 잘 다듬은 돌들을 튼튼하게 쌓는 것이지요.” 나머지 한사람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제가 다듬는 이 돌들이 모여 머지않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당이 이 마을에 생긴다는 것 아닙니까.” 한낱 석공이 마치 건축주라도 되는 듯이 자랑스럽게 대답합니다. 젊은이는 같은 질문에 대한 세 사람의 대답이 너무나 다른 점을 깊이 생각해 봅니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 현장을 다시 찾게 된 그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당을 돌아보며 돌을 다듬던 세 사람의 석공들이 눈에 밟힙니다. 수소문 끝에 그들에 관한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됩니다. 하루 일당에 불만을 품은 채 마지못해 일하던 석공은 이내 돌 다듬는 일을 그만두고 떠돌다 행방을 감춘 지 오래되고, 또 한사람의 석공은 솜씨 좋은 성실한 석공이 되어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며, 마지막 한사람의 석공은 훌륭한 건축가로 성공해 인근 도시에서 장엄한 교회당을 건축 중에 있다고 합니다. 마음가짐대로 필연을 만듭니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리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돌들이 모여 가장 아름다운 교회당이 생긴다는 것 아닙니까”하며 의욕에 찬 그의 일하는 모습과 마음가짐에 가슴 뭉클합니다.
모방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저 느끼어 터득함으로 얻게 되는 특별한 방법입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최고가 되는 길이 있습니다. 즉, 스승의 집으로 들어가 한 가족이 되어 집안일을 돕기도 하며 무시로 배우는 것입니다. 전래의 이 교육제도는 스승의 집을 왕래하며 정해진 시간만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특별한 교과 과정입니다. 그것은 현실에 집착하는 ‘의식세계’에서 억지로 배우려 해도 잘 안 되는 것을, ‘무의식의 상상세계’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익혀나가는 중세시대의 ‘도제 제도’와 같은 가르침의 하나입니다. 도제 교육의 본래목적은 보이는 ‘텍스트’ 보다 보이지 않는 ‘스승의 정신세계’의 승계(承繼)를 우선시합니다. 스승의 정신세계를 엿보며, 스스로 잠재된 내면을 강화하는 것으로 자신이 다듬는 돌들을 보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교회당을 미리 보는 눈을 여는 것입니다. 석공에게 “무슨 일을 하나요?”하며 건네는 여행객의 단순한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인간 각자에 내재된 각기 다른 영성(靈性)을 봅니다.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191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12명의 아랍인을 데려왔습니다. 생전 처음 외국여행을 하게 된 아랍인들은 투숙한 호텔 목욕탕 수도꼭지를 보고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단한번의 작동으로 물이 쏟아졌으니 그럴 법도 했습니다. 그들은 마음껏 목욕을 즐겼습니다. 정말 당황케 한 사건은 그들이 귀국한 다음날 터졌습니다. 수도꼭지가 물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알고 가져가기 위해 수도꼭지를 뗀 것입니다. 그들은 물을 만들어 내기위한 보이지 않는 거대한 메커니즘(machanism)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저수지-수도관-파이프-수도꼭지 등’... 그렇습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영성’이라는 거대한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내재된 영성은 때로 잠든 세상을 깨우고 놀라게도 합니다. 그래서 과학이 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간직한 세상은 교회의 종소리를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마음가짐, 정신세계를 아우르는 영성이라는 거대한 메커니즘이 있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수도꼭지만 가지고는 물이 나올 수 없는 것같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메커니즘 가운데 생명수의 수원인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바로 그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저수지’로부터 ‘그리스도의 수도관’을 통하여 ‘약속의 성령의 파이프’를 거쳐서 소망교회라는 수도꼭지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생명수의 말씀이 공급되고 있습니다(계22:1-5). 아멘 할렐루야!
보이지 않는 영성이라는 거대한 메커니즘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수의 말씀이 하나님의 집인 과천소망교회에서 쏟아지고 있으며 목마른 자는 누구나 값없이 믿음으로 얻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스승과 함께 하나님의 집에 수년, 수십 년 기거하며 하나님의 정신(뜻)을 도제교육을 통해 익힙니다. 그리스도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게 만들어 주심으로써 약속대로 시온의 정상에서 환희에 찬 승리의 새 노래를 목 놓아 부르게 될 약속의 자녀가 있습니다.
산책길이 아닌 등산 하는 것과도 같은 신앙인들은 등산에서 많은 것들을 깨닫고 배웁니다. 등산은 처음에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출발하는데, 정상을 향해 갈수록 점점 더 힘들어 집니다. 정상을 바로 앞둔 99%의 지점을 통과할 때가 가장 힘든 법입니다. 죽을 만큼 힘든 임계(臨界)점, 크리티컬 포인트(critical point),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를 죽고자 대들어서 극복함으로 99%의 지점을 통과해야 정상에 오르게 됩니다. 마지막 시련을 잘 이겨내면 앞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니라’
집을 떠나 세상에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며 방탕하며 떠돌던 둘째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에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탕자와 같은 우리도 오늘 돌아온 하늘 아버지의 집에서 새 출발을 하여 요셉처럼 실제로 꿈을 이룰 것입니다. 쓰라리게 구덩이에서 흘렸던 눈물, 통분하며 감옥에서 흘렸던 눈물과는 질적으로 다른 애굽 궁정에서 흘렸던 그 환희와 감사의 요셉의 세 번째 눈물과 같은 눈물을 흘리며 형제들과 온가족의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할 것입니다. 그 날, 여리고 성이 무너지듯 사망의 성이 무너지고 눈물이 없으며, 아픈 것이나 곡하는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고 사망이 없는 영광의 나라! 의인이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시온산의 정상에서 그런 황홀한 세계를 경험할 등정자는 바위에 걸려 넘어지는 법은 없고 발밑의 하찮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 있으니, 돌부리를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메아리의 교훈도 가슴에 깊이 새기며 등정해야 할 것입니다. 등산을 하는 등산객들은 누구나 ‘야~호’를 외칩니다. 그 소리는 어김없이 메아리쳐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칭찬을 하면 칭찬의 말로 메아리쳐 다시 돌아오는 법이며 악하고 나쁜 말을 하면 그렇게 고스란히 자신에게 되돌아 오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은총의 큰 틀 속에서 ‘악보(樂譜)’가 아닌 ‘총보(總譜)’라 할 수 있는 두루마리 속에 기록된 약속성취의 필연적 말씀대로 ‘보상의 원리’인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악한 자는 그대로 악한 일을 하게 될 것이나, 우리 하나님의 정신을 이어받고, 그리스도의 마음가짐을 승계한 소망의 의로운 성도들은 그대로 의를 행하고, 그대로 거룩하게 행해야 할 것입니다(계22:6-21).
하늘 아버지의 집에서 수많은 세월동안 아픔과 고통도 기쁨도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특별한 도제교육을 받아온 우리 소망인은 하나님의 정신으로 충만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가짐으로 투철한 인생들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내가 다듬는 돌이 하나 하나 모여 앞으로 세계 최고의 위대한 예배당이 될 것이라’는 의욕과 꿈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참된 실재인 오늘, 소망인은 최선을 다해 맡은 바 생명살림역사의 소임을 다하는 영성 충만한 약속의 자녀입니다. 약속의 새날, 약속의 자녀는 영성을 강화하여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