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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도가니에서 융합되어 정금으로 나아오다. 욥기 23:6~17 . 2012-03-04

감사^^* 2012. 3. 13. 17:04

소망의 도가니에서 융합되어 정금으로 나아오다.
욥기 23:6~17    2012-03-04
 
 
사순절, 십자가를 깊이 사랑하라!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7)
 
십자가의 고통(苦痛)은 꼭 필요합니다. 욥의 경우처럼 고통과 인내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고통 속에서 오늘의 우리가 만들어졌습니다. 고통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의 일부가 되었기에 그 고통스런 사건과 사람들을 운명처럼 받아들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우편에 달린 강도를 생각해 봅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너와 내가 오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2-43) 평생 선한 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해본일이 없던 악한 죄인인 그 강도, 십일조도 봉사나 전도활동도 한 적이 없었던 흉악무도한 죄인을 ‘은혜로’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여러 모로 보아 우리가 우편강도보다는 조금은 낫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A Broken Halleluja!’ 애니메이션 영화 ‘슈렉(Shrek)’중에서 슈렉과 피오나 공주가 헤어져 서로를 그리워하며 연모하는 가운데 부르는 노래입니다. 둘 모두 가식적으로 살아왔으나, 괴물 같은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어 수치스럽고 상한 깨어진 마음으로 고통 속에서 부르는 노래 ‘브로큰 할렐루야’!
 
‘주님을 기쁘시게 했던 다윗의 연주는 신비로운 화음이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요~♬ 좌절한 왕은 그렇게 할렐루야를 작곡 했어요~ 그것은 차갑게 일그러진 깨어진 할렐루야(a broken Hallelujah)~♬’
 
‘사랑받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이 거룩해 보이는 일상적 겉모습과 다른 괴물 같은 죄를 범했습니다. 충성된 부하 우리야의 아내와 간통한 후 아이를 낳게 되었고, 이후 우리야를 사지에 몰아넣어 죽게 한 것입니다. 그 사실을 덮어 감추고 지내왔던 갈등과 불면의 괴로운 시간들 중, 선지자 나단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후, 다윗은 하나님 앞에 통회자백하며 죄를 뉘우칩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며 자신이 수치를 그대로 다 드러내 놓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런 고통과 수치스러움의 깨어진 심령에서 나온 찬양 ‘브로큰 할렐루야(a broken Hallelujah)!’ 자신의 죄와 잘못을 낱낱이 고백한 후, 산산이 깨지고 고민으로 얼룩진 심령으로 방황하며, 당장 죽고 싶은 상황에도 깊은 고통가운데 ‘브로큰 할렐루야(a broken Hallelujah)’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더 크게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통을 당할 때, 다윗처럼 죄 때문에 이유 있는 고통도 있는가 하면, 욥처럼 죄 때문이 아니라, 이유 없이 당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고통은 모든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인들은 고통에 관한 그릇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욥의 경우처럼 인과응보(因果應報)적 당연한 죄의 결과로 고통을 부정적으로만 단정하던 욥의 세친구들처럼 더 혹독한 정신적 학대와 상처를 주게 될 수 있습니다. 고통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꼭 필요한 필연적 하나님의 섭리이자 축복인 고통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 진실로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왜 인간에게 고통을 주셨는가?’라는 말은 실은 ‘신이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고통을 준 것이다’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통에는 다음의 세 가지 순기능이 있습니다.
 
1. 보호의 기능입니다 : 고통은 사람을 위험이나 파괴로부터 지켜 줍니다. 고통이 없다면 겨울에 동사하는 사람이 속출할 것이며, 불장난을 하다가 손을 태워버리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고통은 또한 우리 몸 어디에 고장이 났는지를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이 신호 체계가 고장 난 병이 바로 ‘한센병’입니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육적으로 영적으로 고통을 감지하는 것은 축복의 통로라 할 수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고 울며 애통하는 자에게 표를 해서 재앙을 면하게 하라.’(겔9:4)
 
2. 단련의 기능입니다 : 박지성 선수의 옹이 발바닥, 발레리나 강수진의 붕대 발가락을 고통가운데 단련을 통해 가져온 영광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풀무의 도가니에서 고통 속에서 단련되어 정금이 되어 나오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욥23:10).
 
3. 정신적 성장의 계기로서의 기능입니다 : 인류문명의 발전은 한마디로 고난 극복의 역사입니다. 고난과 역경에 대항하여 싸우다 보니 오늘의 문명이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계곡이 깊어야 산이 높듯이 깊은 고통에서 절망하지 않고 일어서서 버티고, 창조하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신의 보다 큰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고통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위대한 정신적 성장을 가져와 오늘의 문명이 생겨난 것입니다. 예컨대, 극한 고통가운데 욥은 말로 할 수 없는 정신적 성장과 영적 성숙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닫고 더욱 더 절대적인 믿음과 온전한 사랑을 갖게 된 축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깊은 고통가운데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신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고통가운데 인내하는 자를 복되다 하리니, 우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처음보다 배나 복 주시는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습니다.’(약5:11) 하나님의 나라의 대표선수들은 안정환 선수처럼 역전승의 환희에 찬 영광의 결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융합(融合)이란 여러 가지 것들이 녹아서 합쳐져 새로운 하나의 독특한 창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연합과 달리 한번 융합되어 섞여 녹아지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풀무불 속에서 ‘소망의 도가니’, ‘성령의 도가니’, ‘사랑의 도가니’에서 융합되어 새로운 공동체로 창조되어 집니다. 고통 속에서 새로운 정금같이 되어져 나오게 됩니다. 소망의 도가니에서 융합되어 정금으로 나아옵니다. 브로큰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Fighting 역전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