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우리 믿음은 헛것이요,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고전15:13-14)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영광!, 부활승리! 은혜로 부활의 증인이 되었으니, 오호라, 우리는 행복한 인간이로다. 물리적 현상이나 세속적 사고방식으로는 입증할 수 없는 ‘부활의 사건’, 자고로 합리적 사고로 모든 것을 대하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해왔던 사건이 성경에 기록된 부활 사건입니다. 모세의 율법, 예언서들, 시편서 등 성경의 핵심 내용은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의 사건입니다. 이 부활의 사건은 도무지 입증할 수는 없지만, 부활의 증인은 시대마다 수 도 없이 많으며, 이 시대에도 역시 부활의 증인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부활주일, 소망인은 부활의 증인으로 참된 인간답게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은 ‘대신(代身) 죽음으로써 사는 것’입니다. 부활의 인생이란 ‘대신(代身) 죽는’ 사랑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죄악 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신(代身) 죽는’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헌신(獻身)하여 십가가에 죽으셨습니다. 십가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입니다. 부활의 주를 만난 우리는 부활의 증인되어 참된 인간답게 ‘대신(代身) 죽는’ 사랑을 실천하며 헌신(獻身)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처럼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부활은 희망이며, 생명입니다. 거대한 떡갈나무도 하찮은 도토리 속에서 숨 쉬고 있었으며, 전 세계 20%의 그리스도인들도 박해 속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의 작은 가슴속에서 숨 쉬고 있었음을 생각할 때, ‘부활의 사건’이 뿌린 겨자씨만한 작은 ‘성령의 씨앗’은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며 생명’이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 약 10km 정도입니다. 스승을 잃고 실의에 찬 예수의 두 제자는 엠마오를 향하여 터벅터벅 걷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천근같은 발걸음의 그들과 동행하기 위하여 누군가가 다가가서 측은하기까지 한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들은 어찌 이리도 기운이 없어 보이는가?’ 그들은 고개를 돌려 처음 보는 듯한 그분을 매우 이상스럽게 여기며 반문하게 됩니다. ‘온 유대가 다 아는 사건을 당신은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까?’ 하며 저들의 스승인 죄 없는 그 분에 대하여 그리움으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끝내 죄인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사실을 슬픔으로,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 장사지내게 된 것을 절망으로, 지난 일을 다 말하고 나서 엠마오에 도착하고 나서야 동행한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간청으로 집에 들여 식사를 대접하는 가운데, 떡을 들어 축사하시고 떼어 주셔서 받아먹을 때, 눈이 열려 그가 바로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예수님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서로부터 시작하여, 예언서, 시편서에 이르기 까지 전 성경에 걸쳐 예수 메시야가 고난을 당하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약속이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며 성경의 말씀을 풀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지며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를 믿게 되고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눅24:30-49).
스쳐지나가는 짧은 경험에 불과했으나 그 순간, 그들은 그리움은 만남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변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부활의 주님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제자들에게, 혹은 기도하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에게, 이방의 사도 바울에게까지 당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이셨고, 그 짧은 순간에 경험하고 체험하는 그들 모두에게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가치’의 터전위에 ‘행복한 인생’을 새롭게 설계(設計)할 수 있는 충분한 은혜를 약속하셨습니다. 이로써 누구든 ‘부활의 증인’이 되며, 부활의 역사는 계속되어지는 역사임을 믿게 하였습니다. 이 ‘부활의 역사는 영원을 시간 속에 심으려는, 다시 말해 거룩한 것을 속된 곳에 모종하려는 하나님의 행복의 섭리’입니다. 부활 행복의 섭리란 어떠한 절망적이고 슬픈 상황 속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또 다른 사실을 발견하게 되며, 모든 것이 헛되지 않다는 ‘새로운 삶의 동기’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어찌 그대들은 그리도 기운이 없어 보이는가?’ 하신 부활의 주님의 말씀과 같이 그렇게 보여지는 삶이 아니라, 힘차고 강한 의지와 믿음으로 노도와 같은 세상을 헤쳐 나가며 희망 앞에 절망이란 있을 수 없다는 당당함과 담대함을 결코 잃지 않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부활의 증인은 행복한 새 인생을 의기소침하지 않고, 당당히 살아나가는 참된 ‘인간(人間)’으로서의 삶을 살아나가게 될 것입니다.
인간(人間), 인(人)보다 간(間)에 참된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저 인(人), 인(人)... 개개 인(人)만 있다면 아무 의미도, 쓸모도 없을 것입니다. 그 인(人)과 인(人)의 사이, 인(人)과 인(人)의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人間)에서 ‘인(人)’보다 ‘간(間)’이 중요합니다. 시간(時間)에도 시(時)보다 간(間)이 중요하고, 공간(空間)에도 공(空)만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나, 간(間)이 합해져 그 사이와 내용이 메꿔지고 채워짐으로 비로소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진리 자체보다 진리가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듯, 예수의 이름보다 예수가 그 이름으로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인(人)과 인(人) ‘사이’, 즉 ‘간(間)’이 합해질 때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참으로 맺어질 때, 비로소 우리 사이, 즉 ‘박목사-이장로, 이장로-김집사, 김집사-박목사’ 간의 관계가 생기며, 그런 관계 속에서만 인간의 참된 의미가 생겨납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서로 마음이 통하고, 정신이 통하고, 영이 통하고, 생각이 통함으로써 서로 화합하여 추구하는 뜻깊은 일들이 있을 때, 비로서 인간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人)과 인(人) 사이의 관계 회복이 행복한 인간이 되는 것에 필수적입니다.
시(時)에도 간(間)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하고, 공(空)에도 간(間)이 있어야 비로소 의미 있게 되듯이,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 인간과 인간의 그 사이가 좋고 뜻 깊어야 합니다. 바로 그 사이를 채우는 내용(content), 하는 일, 목표, 통하여 이루는 역사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이를 과연 어떻게 좋은 사이가 되게 하고 어떤 것으로 아름답고 가치 있게 메꿀 것입니까? ‘ + ’, 십자가의 형상처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어 인(人)과 인(人) 사이의 관계도 회복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죽으신 예수 십자가의 사랑의 관계가 더욱 더 심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와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하늘 하나님 쪽으로 상승하여 올라갈 것인가? 아니면 그 관계가 점점 쇠퇴하고 하락하여 내려갈 것인가? 하늘나라를 향하여 가는 우리 소망인은 ‘대신(代身) 죽는’ 십자가의 사랑의 관계로 점점 더 상승하여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부활의 증인들은 그와 같은 질적 향상의 관계회복으로 부활의 4월, ‘vip초청 행복 플러스 축제’를 통하여 참된 생명의 열매를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참된 인간관계로 참된 인간다운 생명살림의 새 역사, 다시 사는 부활의 새 역사를 이룹시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승리! 행복한 인간을 통하여 부활의 새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