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
‘성령으로’ 천지창조의 일로부터 미래의 될 일까지 보게 하시고, 깨달아 알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송을 드립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있는 자는 깨달아 알게 됩니다. ‘과학’이나 ‘철학’을 훨씬 앞서 미래를 대비하는, ‘영성’이 충만한 소망인은 깨달은 바를 실행으로 옮기어 튼실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천지창조는 기독교의 시원(始原)입니다. 기독교는 천지창조로부터 시초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첫 째 날, 둘 째 날, 셋 째 날,..... 순서대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천지창조를 진행하시기 위하여 우선, 시간을 만드셨습니다. 태초에 카오스(kaos)의 혼돈가운데, 시간을 창조하심으로써 질서 있게 천지창조의 대업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시간에는 ‘우주적(宇宙的) 시간’과 ‘순환적(循環的) 시간’이 있습니다. 전자의 ‘우주적 시간’이란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이른바, ‘영원(永遠)’의 뜻을 지니는 시간입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간(間)’이 없이 그저 ‘시(時)’로만 존재하는, 움직이지 않는 절대적인 시간 즉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전자와 구별되는 후자의 ‘순환적 시간’이란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순환되어 흘러가는, 끝이 있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입니다. 달력이나 시계로 표현되는 이 ‘순환적 시간’중에 특별한 시간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개입(介入)하시는 시간’입니다. 자연의 순리대로 순차적으로 흘러가는 ‘순환적 시간’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말씀하시는 뜻대로’ 이루어 갑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그 순간부터 ‘진리의 대하(大河)’를 이루어, 이 세상의 권세나 자연의 섭리를 따라 움직여지거나 영향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의지대로 말씀에 따라 실행되어집니다.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 중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시간의 예가 성경에 무수히 많습니다.
일례로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로서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시간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너는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될 것이라!’하신 말씀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순환적 시간 속에서 가을이 되어야 자연적 섭리를 따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시간 속에서는 말씀하시는 뜻대로 지금, 열매를 맺게도 하고 맺을 수 없게도 합니다. 그 무엇보다 우선되고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시간 속에서, ‘말씀하시는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십자가, 곧 생명나무에 접붙여진 생명나무의 가지가 되었으니, 이제 생명수 강가에 심겨진 생명나무의 가지로서 달마다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계22) 말씀하신대로, VIP 초청 ‘행복 플러스 잔치’를 통하여 생명의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오늘 ‘금과 은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말씀하신 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생명살림의 역사의 위대한 기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성전 미문에 쭈그리고 앉아 구걸하며 연명해가던 구차 하고 한 많은 인생살이, 단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뛰며 춤추며 감격하여 하나님께 영광의 찬양을 드렸듯,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소망교회와 소망인은 일어나 감격에 겨워 춤추며 하나님께 영광의 찬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행3:1-16). 약속의 자녀 누구나의 삶의 현장에서 마술적 현실세계를 체험합니다.
이제,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이 능력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소망인 모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놀라운 주님의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그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특별한 은총이 베풀어져 누구나 금년 내에 소망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攄得)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신앙생활을 해오는 가운데 녹아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떠올리십시오. 새벽으로 저녁으로 열과 성을 다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던 순간을 더듬어 찾아보십시오. ‘아! 그렇지. 그 때 하나님이 그렇게 분명히 응답하셨었지. 죽을 수밖에 없던 지경에서 극적으로 개입해주셔서 신기하게 살아났지. 참으로 감사를 드려요. 그 순간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지?..!!!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이 영광스럽게 나타났지?..!!!’
부모의 간곡한 요청으로 병약한 어린 아이를 품에 앉고 기도하던 중, 그만 품안에서 아이가 죽어버린 뼈아픈 체험을 목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아이의 부모의 상처뿐만 아니라 목사님의 상처 또한 말할 수 없이 크고 깊게 사무치는 일이었습니다. ‘아! 나는 하나님의 종의 자격이 없나보다. 예수님은 당신의 품에서 죽은 자를 살렸는데, 나는 내 품에서 산 자를 죽였으니....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런 일이... 나 같은 게 뭘 하겠는가? 살 가치도 없고, 더, 이상 목회를 할 자신도 없고..이제 목회를 접고 교회를 떠나야 하겠다.’ 또 한 켠의 마음구석에서는 ‘하나님이 도대체 이러실 수가 있으신가...’ 원망 섞인 마음으로 성전에 돌을 던지며 그렇게 갈팡질팡, 패닉상태에 새벽녘, 하나님의 주시는 크신 깨달음으로 큰 깨우침을 얻습니다. ‘그 순간 그 아이를 품에 안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아이가 살아났었다면 너는 교만해져 하늘 끝까지 높아졌을 게다. 아마 너는 흉칙한 괴물이 되고 말았을 것이야. 이 모든 일은 네가 하는 게 아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행하는 일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지.’
성공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20이라면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것은 80이라 합니다. 뼈아픈 실패를 통해 생명의 크신 가르침을 가슴에 새깁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나 겸손은 생명의 법도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앉은뱅이 이 사람을 낫게 한 것은 내 힘과 내 경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 불쌍한 사람을 낫게 하고 살리셨도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약한 자를 강하게도 하시고, 슬픈 자를 기쁘게도 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힘과 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겸손한 자에게, 생명을 살리는 궁극적 가치의 일을,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임이 자명합니다. 교만하여 자기 의와 영광을 위하여 사랑이 아닌 시기와 증오와 아집으로 상대를 죽이는 일에는 결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 내려놓고 겸손한 중심으로 진실 된 사랑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자는 진정 생명살림역사의 마중물, 마중불이 될 것입니다. 하늘의 시민권자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닌 소망인이여!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행사하십시오. 겸손히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여 미래를 대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