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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가족은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행동을 같이하는 사람들이다[ 에베소서5:33~6:12 ]

감사^^* 2012. 6. 27. 17:08

언약의 가족은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행동을 같이하는 사람들이다[ 에베소서5:33~6:12 ]
에베소서 5:33~33    2012-05-06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랑!, 가족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실화 바탕 가족 영화 ‘존 큐’의 주인공 아버지처럼, 심장병으로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심장을 주는 다함이 없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소망인은 ‘그리스도의 심장’을 이식받아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 사랑으로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전령’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빌1:8) 핏줄보다 더 진한 언약(言約)으로 맺어진 가족에 대한 하늘 아버지의 사랑으로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 생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은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생명의 주(主)’입니다. 암(癌)이 우리의 생명을 앗아갈 순 없습니다. 암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운명을 같이 할 뿐...! 생명을 주시는 분도, 생명을 가져가시는 분도 오직 하늘의 아버지 한 분이므로, 암은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빠(abba)’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우리 소망인은 오늘도 살아있게 하신 분명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게 할 것이라 죽는 것도 유익하나, 아직 육신으로 있는 것이 더 유익하고 필요하기 때문에’(빌1:20-24), 이 땅에서 생명 살림의 선한 도구로서의 뜻 깊은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언약의 가족들을 포기하지 않고 살리는 우리 소망인은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생명을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가족 초청예배’를 통하여 ‘가족’의 의미를 깊이 새겨봅니다.

 
이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지만 달콤한 잠은 살 수 없고, 여자는 살 수 있어도 사랑은 살 수 없으며, 집은 살 수 있지만 가족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황금만능(黃金萬能)’이란 말은 틀린 말입니다. 행복한 ‘가족 공동체’를 만들어가려면 황금만능이 아닌, 상대의 감정과 정서를 내 것처럼 느끼는 ‘공감’이 형성되어,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1980년대, 아프리카 중 서부지역에 거대한 코끼리들이 폭주족처럼 광폭하게 이곳저곳을 휩쓸고 다녔습니다. 왜 온순한 코끼리들이 닥치는 대로 부수고 공격을 할까?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인간들 때문이었습니다. 상아에 눈먼 밀렵꾼들이 무분별한 사냥으로 어른 코끼리가 사라진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어른들 없이 자라난 수컷들이 비행 청소년들처럼 거칠어졌고 제 멋대로 흉포해졌습니다. 어른코끼리들이 합류하자 코끼리 사회는 다시 안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아기 코끼리들에겐 본받을 수 있고 어르고 달래줄 존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느 공동체이든 조화롭게 그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절제를 가능케 하는 힘이 있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사는 가정과 사회, 교회에도 이처럼 어른코끼리가 되어 규율을 세우고, 엄마나 이모 코끼리가 되어 마음을 달래주고, 언니나 오빠 코끼리가 되어 친구가 되어 주어야 안정적인 가정이나 사회도 유지됩니다. 매우 단순한 논리라 이견이 있을 수 없겠으나 현실은 걱정 걱정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마치 아프리카의 코끼리 난동을 보는 듯합니다. 매일 일어나는 사건 사고의 보도를 볼 때마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 크리스천, 우리 소망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비교적 사회제도가 안정 되었다는 우등국가인 미국의 경우, 살인사건이 연간 1만 4180건입니다. 그 보다도 더 위험한 것은 자살과 의도하지 않은 약물 중독사라는데, 연간 자살이 3만3289건이고, 의도하지 않은 중독사가 2만7531건이랍니다. 한국의 경우 매일 42명이 자살합니다. 대부분 난동 대신 그들이 택할 수밖에 없었던 비관적인 선택이라 하겠습니다. 어른이 없는 사회, 이모나 고모가 없는 사회, 누나나 형이 함께 놀아주지 않는 사회는 건강할 수 없습니다.

2009년 6월 11일자 뉴욕 타임스에는 ‘에디’라는 버거씨병 환자의 이야기가 소개 됩니다. 버거씨병은 말초 혈관에 문제가 생기는 질병인데 주로 발끝부터 시작해서 극심한 통증과 함께 조금씩 위로 진행해서 결국은 절단을 해야 할 만큼 상황이 악화되는 병입니다. 완전한 치료법이라는 것이 아직 없기 때문에 최대한 진행을 늦추는 방법뿐입니다. 진행을 늦추는 방법은 담배를 끊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환자들 대부분이 담배에 중독되어 발병했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끊으라는 의사의 권유에 ‘에디’도 2년이 넘는 동안 무수히 끊으려 했으나 금단의 증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흡연합니다. 결국 손가락 발가락을 계속 잘라내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끊지 못합니다. 정녕 ‘에디’의 앞날의 마지막은 어떨까요? 또한 자살을 선택하거나 약물에 매달리다 죽어가는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다시 도전 할 수 있도록 용기와 새로운 희망을 갖도록 해야 하는데, 이것은 경제적인 지원이나 제도적인 개선으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치료비와 쾌적한 환경에 첨단 의료장비를 보급하는 것도 방법이겠으나, 정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관심을 가져주는 어른 코끼리나 엄마나 이모 코끼리의 어르고 달래주며 누나나 형이 함께 놀아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저들을 살리고 약물에 매달린 줄을 끊고 자살에 대한 생각을 바꾸며, 난동을 막을 수 있는 최선책입니다. 이 역할은 단 한가지뿐입니다. 우리 가슴에 가득 채워져 있는 예수 사랑을 나누어 주는 일, 그 ‘나눔의 길’, 이것만이 그들에게 남겨 있는 마지막 기회이며 희망입니다. 황금만능의 삶의 광폭한 전쟁터에서 예수 사랑을 나누는 소망인의 손길이 꼭 필요합니다.

 
황금만능의 이 세상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돈으로 침대, 집을 살 수 있지만 잠, 가족을 살 수는 없습니다. 생명, 믿음, 사랑, 성령, 가족...등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가족이란 내게 해가 미쳐도, 행동을 끝까지 같이하는 사람들입니다.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같은 길을 끝까지 함께 가는 ‘사랑의 동반자’입니다. 사랑의 동반자로서 끝까지 동행하기 위해서 ‘가족 공동체’는 감정을 절제하고 서로 공감하며 ‘욕망 없는 예수 사랑’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부간, 남편은 부인을 사랑하고, 부인은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말씀으로 훈육하고 양육해야 하며 믿어주고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엡5“33-6:12).
 
예수 사랑이 사득한 가족 공동체가 되기 위해 장자의 달생(達生)편에 나오는 ‘목계(木鷄)’이야기를 명심합니다. ‘투계(鬪鷄)’를 좋아했던 왕이 당대 최고의 조련사인 ‘기성자’에게 훌륭한 싸움닭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며 닭 한 마리를 맡겼습니다. 한 달이 지난 후에 기성자에게 왕이 묻습니다. ‘싸움기술을 잘 가르쳤나? 어때 이제 훌륭한 싸움닭이 되었는가?’ ‘아직 멀었습니다. 싸움기술을 익혀 힘이 생겼다고 허세를 부리고 교만하여 자기를 과시하려하니...’ 한 달 후 왕이 다시 묻자 ‘아직도 멀었습니다. 허세는 좀 가라앉았는데.. 지나가는 닭을 보기만 하면 날개를 퍼덕이며 싸우려고 덤빕니다.’ 한 달이 더 지난 후에도 그는 ‘아직도 더 조련해야 합니다. 싸움 기술도 조금 더 익혀야 합니다. 아직도 상대 닭이 소리치고 다가오면 민감하게 깃털을 세우고 계속 노려봅니다.’ 그리고 한 달이 더 지나서야 기성자는 드디어 이제 최고의 투계가 되었다고 답합니다. ‘그래, 어째서냐?’ ‘예, 아무리 주변에 닭들이 다가와서 시비를 걸고 위협공격을 해와도 마치 나무로 깎아 만든 닭처럼 태연하게 평상시처럼 행동합니다. 목계처럼 되었으니 이제 최고의 싸움닭이 된 것입니다.’
 
예수사랑이 가득한 가족 공동체를 만들려면 목계(木鷄)처럼 초연하게 감정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애증(愛憎)의 관계로 점철된 가족 관계야 말로 어렵고 힘든 관계로서 상호간 내재된 상처들이 깊습니다. 싸우고 화해할 줄 몰라 더욱 상처는 악화되는 불행한 현실적 문제를 치유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감정(感情)’을 잘 조절하고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성(理性)’과는 달리 조절하고 절제하며 잘 달래기가 어려운 ‘감성(感性)’이 상하면 관계가 파괴되고, 수 십 년 공든 탑이 일순간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 교회, 사회 등 어떤 조직, 어느 공동체이든 감성을 계발하여, 공감(共感)을 만들어야 화목하고 행복한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상대의 고통의 감정을 내 것처럼 느끼어 감정을 공유하는 공감이 중요합니다. 공감이란 타인의 정서를 내 것처럼 느끼는 것, 더 정확히는 타인의 경험이나 생각, 감정상태 등을 상대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느끼는 감정적 공유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공감이란 독일어로는 ‘아인 필롱(Ein f^ullung : 아인-하나, 필롱-느낌)’, 영어로는 ‘엠파시(Em pathy)’이며 ‘앙-파토스 : 앙-안, 파토스-고통 감정 : 타인의 고통 안에 같이 머무는 것’)입니다.
 
같은 길을 끝까지 함께 가기위해 마음이 하나가 되고, 뜻이 하나가 되려면 서로의 고통도, 기쁨도 함께 나누어 갖으며, 함께 울어주고 함께 웃어주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공감’이 참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의 공감’이 유지되지 않으면 가족, 교회, 사회 공동체는 분열되고 안정되게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합니다. 목계처럼 어떤 극한 상황에도 상대의 쪼아대는 비난, 모욕 그리고 따가운 시련과 핍박 속에서도 의연하게 감정을 절제하며 이겨내야 합니다. 초연하게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자만 하늘 아버지의 상속을 얻으며 하나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포기할 수 없는 예수사랑으로 가족 공동체를 살려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소망 공동체요, 언약의 가족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끝까지 우리와 행동을 같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와 고통도 함께하고 기쁨도 함께 하며 끝까지 행동을 같이합니다. 말씀하시는 교회와 끝까지 행동을 같이합니다. 언약의 가족은 동고동락하며 끝까지 행동을 같이 하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