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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이유가 분명한 소망인입니까? 2012-05-20

감사^^* 2012. 6. 27. 17:10

삶에 이유가 분명한 소망인입니까?
베드로전서 3:8~19    2012-05-20
‘기다리게 하는 것은 거절하는 것이 아니다’는 진리를 깨닫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기다려 주고, 끝까지 함께 합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주며 불쌍히 여깁니다. 그러기에 악독한 말을 금하여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원수에게 오히려 복을 빌어줍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고 극복하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랍니다.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죄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가지고 계신 주님은 무능한 배신자요 연약한 행악자인 우리가 어떤 극한 상황 속에 처해있어도 절대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하며 돕고 인도해 주십니다. 바벨론 포로시, 점점 믿음이 약해지고 소망이 사라져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성경은 은유(隱喩) 즉, 메타포(meta:바꾸다+phor:보여주다=바꾸어 보여주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 같으니, 자라나서 추수 때에 알곡은 천국곳간에 가라지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리라.’(막4:20-26;마13:30, 36-43),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하고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44) ‘나 여호와가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비유를 베풀었나니’(호12:10), ‘아버지를 떠났다 다시 사랑하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탕자의 이야기’, ‘영원한 안식과 생명을 누리는 천국의 복과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진다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 ‘다메섹으로 가는 노정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참된 삶의 이유가 생겼던 복음의 증인, 사도 바울의 성령행전이야기’,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으나 주님의 뒤를 따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산소망의 기업을 잇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네로황제의 지독한 박해 속에서도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소망의 삶에 관한 분명한 이유’가 있는 인생이었던 진리의 증인, 베드로 제자의 참된 신앙인의 이야기’(벧전3:8-19) 등등...
 
아버지 하나님의 뜻의 결정대로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이 세상에 나타나 있는 표상(表象)들로 바꾸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과 진실을 이 세상속 일상의 접촉과 만남, 그리고 사회의 사건과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과 지구촌, 우주만물의 여러 이야기를 통하여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역으로 ‘바꾸어 나타내 보여 주시고자 하는 그 본래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의미를 간파하고, 관찰이 아닌 통찰, 성찰함으로써 하나님의 깊은 것을 성령으로 깨달아 그에 합당한 ‘이유가 분명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통하여 나타내 보여지는 그 특별계시의 배후와 이면의 속뜻과 본뜻인 하나님의 진의(眞意)와 진리를 깨닫고 그에 따른 ‘이유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진리의 성령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잘못되어 있는 세상을 책망하여 바로잡습니다. 나와 너, 우리를 ‘위(爲)한’ 하나님, 나와 너, 우리를 ‘향(向)한’ 하나님의 뜻하신 일을 올바로 깨달아, ‘오늘, 여기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던 죽음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만들어져 불리웠던 아니마밈의 영가(song)가 있습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야는 나를 돕기 위하여 반드시 찾아오시리라는 진실을. 그런데 때때로 그 메시야는 너무 늦게 오신다.’ 죽음의 가스실로 들어가며 모든 유대인들이 체념과 절망 속에 불렀던 노래입니다. 하지만 유독 한 젊은 유대인만은 달랐습니다. 그는 그 노래를 이렇게 고쳐 불렀습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야가 나를 돕기 위해 반드시 찿아 오리라는 진실을.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조급하다. 그래서 너무 빨리 믿음을 포기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 나의 메시야는 반드시 오셔서 나를 도와 살리실 것이고, 내 삶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다. 그는 밤마다 모든 유대인들이 죽음의 절망 속에 체념하여 널부러져 있는 그 가운데에서 깨진 유리조각을 갈아 밤마다, 내일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면도를 하곤 했습니다. 이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일하게 그만 살아나 그 일들을 수기형식으로 엮어 희망과 꿈을 불러일으키는 베스트셀러가 된 책을 발간했습니다. 이처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죽어간 사람들’을 연구해 그 두 부류간 생(生)과 사(死)의 이유를 연극으로 극화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마를린 먼로의 남편이었던 극작가 아써 밀러(Arther Miller)입니다. 깨진 유리조각으로 날마다 면도를 하던 정신(精神)이 시퍼렇게 살아있었던 그 젊은 유대인 의사 청년처럼 지옥같이 참혹한 죽음의 ‘아우슈비츠’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연구하던 그가 의미심장한 연구결과를 소재로 연극 ‘비치에서의 사건(Incident at Vichy)’을 만들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아써 밀러의 ‘비치에서의 사건’이라는 연극에서 독일에 사는 저명한 학자이자 부자인 유대인이 나찌를 만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 유대인은 심문실 탁자에 앉자마자 긴 장화를 신은 나찌에게 한 뭉치의 서류를 보여 줍니다. Ph D학위 증명서, 대통령 및 유명인들로부터의 추천서, 은행에 저축되어있는 막대한 재물의 통장 잔고증명서, 화려한 자신의 명예와 권력기관의 장을 역임한 인사기록 등이 촘촘히 적혀있는 그 한 뭉치의 서류를 받아 한 장 한 장 세심히 살펴본 나찌가 그 유대인에게 묻습니다. ‘이것이 당신이 가진 전부입니까?’ 그는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자 나찌는 그것들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좋아요, 자 이제 당신에겐 아무것도 없습니다. : Good! Now, you have nothing!
 
Good, Now, you have nothing! 자신의 삶에 이유, 자신의 삶의 행복과 성공의 목표가 그런 박사학위, 명예, 권세, 재물 등등의 것들이었다면 그것이 쓰레기통에 버려져 없어진 그 순간 그 유태인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게 되었고 그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삶에 이유가 없어진 그는 마음의 병을 얻어 그만 죽어가고 맙니다.
 
당신이 만약 그 유태인처럼 삶의 이유, 자신의 삶의 행복과 성공의 목표가 그와 같은 학위, 명예, 권세, 재물 등 이라면 당신 역시 불쌍하고 불행하게 죽어갈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대로 이 세상의 임금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니, 그런 류의 세상에 속한 가치들은 심판의 불로 태워져, 쓰레기통에 버려진 그 한 뭉텅이의 서류처럼 다 없어져 당신 역시 그 유태인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Good, Now you have nothing! 좋아요, 지금 당신에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어졌으니, 진정한 삶의 이유가 사라져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에게 그런 ‘외적인 힘’들이 다 사라져 없어져도, 여전히 내면에 무언가 남아있는 것이 있다면, 그 내적인 힘이 솟아나 삶에 이유가 분명해 짐으로써 당신은 살아남게 될 것입니다. “Why to live for?!” ‘진리의 복음 전파, 사랑,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생명사림의 사명을 위하여!!’
 
‘삶에 이유가 분명한 사람은 인생의 어떠한 고통이 와도 견딜 수 있다 :He who has a WHY to live for can bear almost HOW.’-니체의 말입니다. 인생을 사는 삶의 이유가 분명히 있는 사람은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법입니다. 아우슈비츠보다 더 극한 상황 속에 처해있던 분들이 아브라함, 욥, 그리고 예수님이셨습니다. 약속을 받았으되 99세가 되기까지 자식하나 없고 사라는 경수가 끊겼던 상황에도, 안정된 고향을 떠나 방랑객처럼 떠돌다 100세에 겨우 얻은 약속의 기업인 아들,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시는 형언할 수 없이 곤고한 흑암과 절망과 좌절의 그 순간에도 아브라함은 삶에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했고 하나님의 언약을 사랑함으로 생겨난 마음 속 부활소망에 관한 삶의 이유가 분명했기 때문에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모리아 산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재물도, 자식도, 잃어버리고 자신의 분신인 부인마저 떠나버리고 건강마저 잃어버린 욥,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의 가슴속 내면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함으로 샘처럼 솟구치는 내적 힘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삶에 이유가 분명했고, 그로인해 아우슈비츠보다도 몇 십 배 극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아 말년에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누리는 행복 자가 되었습니다. 사탄에게 시험받는 극한 상황속의 예수님도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을 경배하리라는 삶에 분명한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삶에 이유가 분명한 사람만이 살아남습니다. 당신은 삶에 이유(Why to live for)가 분명한 신앙인인가?’를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삶에 분명한 이유, 인생을 사는 의미, ‘자신만의 삶이 존재하는 이유’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당신은 살아야 할 ‘산 소망에 관한 이유’가 분명합니까? 그렇다면, 바벨론 포로시, 에스겔 선지자의 외침처럼 ‘피투성이라도 살아야 합니다.’ 옳습니다. 피투성이라도 살아야 할 만큼, 진리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해 ‘하나님을 참으로 하나님 되게(Let God be God!)’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제 3의 종교혁명’으로 ‘거룩한 신(神)바람’을 일으켜야 하는 우리 소망인은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라! 지금 궁핍과 곤경에 처해있어도, 때가 되면 반드시 형편이 나아지고 일순간 좋아지게 되어있는 것이라!’ 비본질적인 물질의 문제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의 문제며 마음가짐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내적인 힘으로부터 말미암는 진정한 삶에 분명한 이유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와 같은 하늘의 종들의 진리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영벌의 형장인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들어가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안식처에서 살게 하는 생명살림의 마중물, 마중불로서의 거룩한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다 쓰레기통에 버려져도 네 속에 남는 것이 있는 사람이, 삶에 이유가 분명한 사람만이, 바로 하나님의 정신을 승계하여 내적 영성이 충만한 소망인만이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아 하나님의 영광된 뜻을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 이룰 것입니다. 우리는 선진 사도처럼 소망에 관한 이유가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네로황제의 지독한 박해 속에서도 베드로는 삶의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대답할 준비되어 있는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소망인의 분명한 삶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진리의 복음의 증인된 삶을 위하여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만나 뵙고 새로운 모습, 죽을 수밖에 없었던 과거가 변하여 복 받을 수밖에 없는 새로운 신분을 거듭난 사도 바울은 진리의 복음의 증인이 되어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아도 삶에 분명한 이유가 있는 신앙인이었습니다. 마틴 루터도 롬1:17의 말씀의 올바른 뜻을 깨닫고 진리의 복음의 증인된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새로운 삶의 이유를 발견한 그는 담대하게 생사여탈권 등 최대의 막강권력을 지지고 있었던 로마 카톨릭의 진리에의 왜곡과 부패에 대항하여 진리의 횃불을 치켜들며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등 세상을 새롭게 바꾼 종교개혁의 불꽃을 점화했습니다. 경천동지의 제3의 종교 개혁을 이룰 이 시대! 진리의 복음의 증인이 필요한 오늘! 약속의 새 역사를 이룰 당신은 소망에 관한 이유에 대답할 준비가 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신은 삶에 이유가 분명한 소망인 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