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의 크신 사랑, ‘마음의 어버이’인 ‘스승’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낳으시고 기르신 어버이의 사랑, 바르거라 참되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리라 다짐합니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지상 최고의 축복이자, 복음의 능력이 지니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모습을 달리하는 만남’이라는 축복 속에서 소망인은 ‘하나님의 집’인 과천소망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가족으로 동고동락하며 ‘스승의 정신’을 승계 받습니다. 도제교육(徒弟敎育)을 통해 현실에 집착하는 ‘의식세계’에서 억지로 배우려 해도 잘 안되는 것을 ‘무의식의 상상세계’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익혀나가므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스승의 정신세계’를 이어 받습니다. 소망인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의 정신세계를 엿보며, 스스로 잠재된 내면(內面)을 강화하면서 ‘도토리에서 상수리나무를 보는 눈을 열어 갑니다. 이로써 영성(靈性)을 일깨워 미래를 바라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아, 사명을 감당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유니크(unique)한 스승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답게, 움킨 것을 찢고, 푯대를 향하여 인생의 정로를 의연히 걸어 나아갑니다.
‘네 무지를 알라!’고 가르쳤던 ‘소크라테스’의 사랑하는 제자였던 ‘플라톤’이 감사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는 세 가지를 하나님께 감사한다. 첫째는 내가 희랍사람으로 태어난 것이요, 둘째로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남자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보다 하나님께 더욱 감사할 일은 소크라테스 시대에 태어나 스승 소크라테스를 만난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감사도 위대한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라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인류의 참된 가르침은 시작되었고, 스승의 역할이 분명해졌습니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로부터 인류정신사의 위대한 유산이 된 ‘이데아(Idea) 사상’을 승계 받습니다. 동굴 밖 세계를 체험한 ‘동굴 우화’의 주인공으로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비유한 동굴의 이야기는 의미심장합니다. 플라톤의 ‘동굴 우화’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동굴 속에 갇혀서 그곳에서 보여 지는 허상인 그림자가 전부인 것같이 살아가는 수인(囚人)과도 같은 음울한 인생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데아, 즉 에덴의 낙원과 같은 ‘동굴 밖의 새 세상’에 대한 희망의 역사에 참여하여 진리에로의 ‘전향(轉向)’을 결단 한 후에, ‘변용(變容)’을 거듭하면서 동굴 밖을 향하여 순종의 발걸음을 옮기다가, 드디어 동굴 밖 태양이 빛나는 곳으로 나와 ‘비상(飛上)’하게 되는 새로운 인생이 있습니다. 허상이 아닌 실상의 복된 약속입니다. 꿈에 그리던 동굴 밖, 빛나는 기쁨과 찬란한 희망과 황홀한 행복을 누리는 부활의 새 인생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전향(轉向)->변용(變容)->비상(飛上)’ 함으로써 하늘에 오르신 ‘엘리야’처럼,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는 자, 즉 그리스도에 참여한 사람은 ‘전향->변용->비상’함으로써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어 부활의 약속을 이룰 것입니다. 언약대로 ‘그리스도가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할 것이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고 깨우치게 할 것이라.’(요14:15-26).
한비자라는 고전에 ‘백락이라는 사람이 있어야 천리마가 있을 수 있다’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천리마는 늘 있지만, 백락은 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백락을 만나지 못하면 아무리 명마라도 노예의 손에 이끌려 짐을 싣고 가는 일을 하면 평범한 말로 어느 이름 없는 곳에서 생을 마칠 것이며, 천리마란 칭호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좋은 인재를 가려낼 줄 알고, 그 능력을 키울 줄 아는 백락 같은 사람과의 만남은 가장 큰 축복이라 하겠습니다. 백락의 예리한 눈, 어떻게 말가죽을 뚫고 그 안에 재능과 가능성을 볼 수 있겠습니까? 이는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백락과도 비교할 수도, 비교해서도 안 되는 한분을 기억합니다. 사람을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지신분. 그 분은, 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볼 수 있느냐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조차 없는 분. 백락이 ‘말’의 전문가라면 이분은 ‘하늘’의 전문가,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이 분이 중요한 것은 백락이 있어야 천리마가 있듯이 이분이 계셔야 마시장에 널려 있는 수많은 말들 중에, 백락이 명마를 찾아내듯, 흩어져 잃어버린 피조물들 중에 하나님의 아들들을 찾아 낼 것이며, 그것만이 영원히 잊혀져가는 희망이 없는 피조물의 미래에 대한 진정한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와서 그 짐을 내려놓고 쉬라. 또한 너희를 얽매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 줄을 끊고 자유하게 하리라!” 인간의 존엄성과 존재이유를 볼 줄 아는 분,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잠재력을 보고, 그 심지에 불을 붙여 꺼져가는 이 모든 것들에 새로운 열정으로 다시 살릴 수 있도록 불을 당겨주실 수 있는 분, 바로 ‘그분의 부르심’이 분명합니다. 백락을 만난 말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십시요. 당신의 앞날은 바뀔 것입니다. 생각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고, 꿈이 달라 질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들에 간섭을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할 곳이 많다는 아버지의 집에서 만일 청소하는 일이 맡겨진다면,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리듯’, ‘베토벤이 작곡하듯’, ‘셰익스피어가 시를 쓰듯’해야 합니다. 위대한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당신은 행복자입니다.
‘보혜사(保惠師) 그리스도’와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 성령’을 만나 참되고 바름을 가르 침 받는 자는 하늘의 은총을 입은 참으로 복된 자 입니다. 이 하늘의 가르침으로 인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고,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깨우쳐, 온리 원(only 1) 으로서의 사명을 감당케 하는, 주의 일꾼 됨을 일깨움 받는 생명의 능력이 임합니다.
스승의 역할과 영향을 다룬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라는 영화가 가슴을 울립니다. :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네 인생을 독특하게 살라!’
‘생명, 존재, 아이덴티티(identity)!, 너 또한 한편의 시(詩)가 된다. 말과 언어와 아이디어는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
이는 대학입시만을 위해 획일화된 교육으로 전통과 규율에 얽매여 기계화된 인간으로 메말라가며, 자신의 정체성과 꿈을 잃어버린 학생들을 변화시켜 자신의 인생을 독특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키팅’ 선생의 특별한 가르침이자 일깨움입니다. 마치 어미 새가 알속의 새끼가 부화할 수 있도록 밖에서 ‘톡톡’ 알의 겉껍질을 깨며 일깨워줌으로써, 새끼 스스로 알의 ‘안막’을 찢고 나오게 하는 것과 같은 역할과 영향을 끼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언어’와 유사하다 할 수 있는 ‘시어(詩語)’를 통하여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는 우리에게 스승의 역할과 영향을 일깨우며, ‘나 라는 존재’의 정체성과 투철한 사명감을 고취합니다.
무상 변천하는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나 라는 존재’입니다. ‘나 @@@’ 는 과거도 ‘나’이고, 현재도 ‘나’이며, 미래에도 ‘나’일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도 ‘나 @@@’이고, 지금도 ‘나 @@@’이며, 앞으로 나이를 먹어도 ‘나 @@@’일 것이며, 천국에 가서도 여전히 ‘나 @@@’ 일 것입니다.
‘나 @@@’는 ‘나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며, ‘only1’ 으로 나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에게 맡겨진 ‘나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처럼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살아야 합니다. ‘나 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그리스도의 일을 감당하는 사명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가 요한이 될 수 없고 요한이 바울이 될 수 없듯이, 진리의 스승으로부터 깨우침을 받은 참된 제자인 나는 나답게, 독창적인 자유자로서 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합니다. 보혜사, 진리의 성령의 역사는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것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위대한 역사입니다. ‘나 라는 존재’는 ‘only1’ 입니다. 소망인 ‘나, @@@’은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자유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