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구원과 능력과 영광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돌리세! 영광 할렐루야! 아멘(Amen) 할렐루야(Hallelujah)! 영원토록 만세!’(계19:3-7)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듣는 자’는 복이 있고, ‘믿는 자’는 더 복이 있으며, ‘지키는 자’는 더 더욱 복이 있습니다. 이런 복된 자들에게 진리의 약속의 말씀을 통하여 신기한 능력이 나타나며 신비한 깨달음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자, ‘아버지의 뜻’인 ‘진리’보다 앞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의 사랑’을 받는, 구원 얻을 그리스도의 자녀는 참으로 행복한 인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너는 그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나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원복음의 약속대로 언약의 자녀, 그리스도 공동체는 필연코 영광의 승리를 이룰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약속하신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질 것을 믿는 ‘언약의 자녀’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 날, 시온의 정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환희에 차 감격에 겨워 ‘아멘 할렐루야! 만세!’ 영광의 승리의 함성을 외칠 것입니다. 승리할 언약 공동체는 진리의 칼을 날카롭게 준비하여 진리의 양날인 ‘복음’과 ‘심판’의 불타는 날선 검을 만들어야 합니다. 주의 도우심안에서 불붙은 진리의 검으로 무장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정의는 이루어 질 날이 있고, 진리는 따르는 자가 있는 법입니다.
미국의 맨하튼 시의 시장의 초청으로 휘황찬란한 선진 문물을 견학하고 돌아온 알래스카의 에스키모 추장은 놀라운 경험담을 쏟아냈습니다. 수십 층의 고층건물, 오색 네온사인과 전등, 수 천 명을 태운 배..등등 형언할 수 없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롭고 놀라운 세상을 본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을 전했다는 이유로 그 부족에서 거짓말쟁이로 따돌림을 당하고, 왕따가 되어 급기야 추장직에서 밀려나고 새로운 추장이 선출되었습니다. 십년 후, 새 추장 역시 맨하튼 시장의 초청으로 똑같은 것을 보고 돌아 왔습니다. ‘이전 추장의 경이로운 보고가 참으로 옳은 것 이었구나’ 라고 수긍하면서도, 그와 똑같이 혹독한 대접을 받고 쫒겨 나기는 싫고 또 두려웠습니다. 심각한 고민 끝에 그는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적당히 바꾸어 자신의 부족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럴 듯하게 각색해 전달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본 것은 그저 우리 얼음집보다 조금 더 큰 집들이 여러 채, 우리 호롱불보다 조금 더 밝고 큰 불들, 서너 사람이 타는 우리의 카누보다 조금 더 큰, 그저 열댓 사람 탈 수 있는 배들... 그제서야 부족들은 ‘그럼 그렇지, 전 추장은 역시 거짓말쟁이였고 그를 쫒아낸 것은 참 잘한 일이였지.. 당신 말이 과연 맞고, 당신이야 말로 우리의 참된 리더요.’ 하며 환호했으나 그 추장은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진정 기쁘고 행복함을 맛보지 못한 채, 일생 어둡고 괴로우며 떳떳치 못한 불쌍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떤 에스키모 추장이 진정으로 행복한 참된 인생이겠습니까? 에스키모 추장이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첫 번째 추장은 그대로, 그 다음 번 추장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적당히 바꾸고 각색해서 전했습니다. 이는 진리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빙자해 그의 제자 플라톤이 ‘동굴의 우화(寓話)’로서 에덴의 낙원, 이데아의 참 실상의 새 세계를 소개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진리를 ‘진리 그대로’ 받아들여, 믿음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진리에의 전향(轉向)-변용(變容)-비상(飛上)’합니다. 동굴 밖의 새롭고 참된 세계를 향하여 담대하게 나아가며, 용기 있게 변용을 거듭하다, 드디어 동굴 밖의 새 세계에서 비상하게 됩니다. 동굴안의 수인(囚人)처럼 침침한 음울한 곳에서, 그렇게 짐승처럼 노예처럼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낙원에서 참으로 사람답게 진리의 태양아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희망과 용기와 지혜와 결의에 찬 사람들, 바로 영생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회복의 복을 주시기 위해 선택하여 부르심을 입은 언약의 자녀들이 남아있습니다.
구약(舊 約)과 신약(新 約), 성경의 말씀인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의 일관된 주제인 ‘낙원 상실’과 상실된 ‘낙원 회복’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아담이 잃어버린 낙원을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이자, 약속입니다. 성경의 이 책에 기록된 진리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 그대로 다 이루어짐으로써 언약을 성취합니다. 이 예언하신 언약의 말씀에서 하나라도 더하면 이 책에 기록된 재앙을 더 할 것이고, 이 말씀에서 하나라도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릴 것입니다.(계22)
창세기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이는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들려주신 하나님의 음성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에 있는 지, 선악과를 따먹고 나무 뒤에 숨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그의 마음까지 다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는 하나님 음성의 의미는 ‘아담아, 네가 미션을 잘 감당하고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고 있습니다.
‘@@@야, 네가 어디에 있느냐?’ ‘@@@야, 네가 미션을 잘 감당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감당해야 할 미션이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도 감당해야 할 미션이 있습니다. 부름 받은 선진 사도들에게도, 오늘 부름 받은 우리에게도 감당해야 할 미션이 있습니다. 이 미션은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하는 ‘회복의 미션’으로 통합됩니다. 회복의 미션을 감당하고 완수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계시고, 우리를 도우셔서 ‘진리의 사랑’으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회복의 미션도 감당할 수 있게 하십니다.
기원전 오백년을 중심으로 석가, 노자, 공자, 소크라테스 등 인류의 정신적 기초를 놓은 ‘축(軸)의 시대’에 품격 있고 가치 있게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필요 요건으로 ‘자비(慈悲)’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인간사회에는 폭력만이 난무한 짐승의 세계와 같은 약육강식의 시대가 지속되었었습니다.
망아지는 애기보를 찢고 나오자마자, 쭈뼛 대며 곧바로 걷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두발로 일어나 걸어서 어미의 궁둥이 밑으로 들어가 젖을 빨아대며 생존하며 살아나갑니다. 사람과 흡사한 침팬지도 갓 태어나자마자 앙상한 손가락으로 어미 침팬지의 털을 필사적으로 꽉 움켜잡습니다. 그리고는 안간힘을 다해 어미의 가슴팍으로 기어 올라가 젖을 빨아 생명을 이어갑니다. 반면에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사람은 어떠합니까? 엄마의 모태로부터 태어난 직후 그저 울기만할 뿐 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털이 없어서 침팬지처럼 털을 움켜잡을 수도 없기에 무언가 붙잡지도 못한 채, 꼼짝 못하고 누워 있기만 할 뿐 입니다. 엄마가 아기를 안아서 젖을 물려주어야 그제서야 젖을 빨아 생명을 유지 존속할 수 있게 됩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사람은 걷는 데만 대략 이년이 소요됩니다. 한걸음씩 걸음마를 옮길 때면 온 집안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기뻐하곤 합니다. 사람은 홀로 그대로 두면 죽어버리고 맙니다. 끊임없이 도와주고 보살펴 주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도와주고 보살피고 돌보아주는 이것이 자비입니다. 그래서 자비를 베풀어야 인간은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으므로, 반드시 도움의 손길과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비의 실체인 사랑을 하늘로부터 가지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로부터 언약의 신앙이 그 실체가 분명해졌습니다.
언약신앙이란 회복의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손상된 심령과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 일그러지고 불완전한 가정 그리고 교회, 사회까지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회복(回復)’될 가능성을 믿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이는 만유가 회복됨으로써 우리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하심이라.’ 그리스도의 역사와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이 성취되어 에덴의 낙원을 회복하는 ‘복락원’을 상속받는 언약공동체가 있습니다.
언약의 공동체여! 회복의 미션을 감당하고 있느냐?
먼저 언약의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네가 미션(mission)을 잘 감당하고 있느냐? 미션수행을 위해 먼저 주시는 시련을 극복(克服)하고, 연단으로 형성된 품성과 정신으로 해야만 할 일을 추진(推進)해야 합니다. 선택된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바벨론 유수사건’등, 주님 오실 예루살렘이 황폐해진 이런 일이 어찌하여 이런 일이,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지? 이해되지 않으나 그때도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는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오시는 주님을 준비하여 내면적 영성을 충만케 함으로써 회복의 가능성을 확증해 준 역사적 실례입니다. 지난 후에야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합하여 ‘회복의 미션’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십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셔서 회복의 가능성을 남겨두셨습니다. 때가 이르매 약속의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진리로 깨우치시고 회복의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신 참된 안식과 행복의 약속이 남아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뿌리신 영생의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극치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피조물들이 고대하던 영광의 해방과 승리의 날이 이를 것입니다.
회복의 가능성이 현실화 됩니다. 언약의 자녀를 통하여 회복의 미션이 완성될 것입니다. ‘아담이 쫓겨났던 그 길,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타는 검으로 지키고 있는 그 길을 통해 에덴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저가 에덴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로 나아가며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아담아, 네가 미션을 잘 감당하고 있느냐? @@@, 네가 회복의 미션을 잘 감당하고 있느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원한 생명의 복된 낙원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의 승리의 함성이 외쳐질 것입니다. 하나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과천소망교회 만세! 아멘 할렐루야! 언약공동체 만세, 회복의 미션을 완성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