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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사랑으로! 새생명 공동체가 영광의 성산을 완등한다. 2012-06-24

감사^^* 2012. 6. 27. 17:16

히브리서 12:14~29

주의 사랑으로! 새생명 공동체가 영광의 성산을 완등한다.
히브리서 12:14~29    2012-06-2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니라.’(갈2:20)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한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새생명으로 사는 자입니다: ‘Mortificatio, vivificatio!’ 이런 신비한 새생명으로 살게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우리도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살아나서 ‘새생명 공동체’로 살게 되었습니다.
 
주(主)님을 받아들인 후, 주님이 내 삶의 주인(主人)이 되셨습니다.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우리의 전생애를 인도해가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찾으셔서, 부르심의 은총을 베푸심으로 인해 새인생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부(漁夫)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이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하시며 ‘새인생을 살아가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이는 가족만 돌보지 말고, 더 큰 하나님의 가족을 돌보라는 뜻이며, 가족의 생계만을 위하여 일평생 생선을 다듬는 일과 차원을 달리하는 위대한 생명살림프로젝트의 목표를 위하여 함께 일하고, 보다 더 큰일을 하며 새롭게 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거품같은, 부평초처럼 허무한 인간으로 그런 세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한 ‘그 나라와 의를 위한’ 큰 일을 하며 살아가는 업그레이드된 인생을 살라고 부르심의 은총을 베푼 것입니다. ‘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주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받아들여 새인생을 살게 된 베드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치있는 위대한 삶을 산 ‘주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르심의 그 순간부터 베드로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 부르심의 순간부터 베드로의 소유는 없어져 버렸습니다. 베드로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 살든지 죽든지, 전체가 다 주님의 거룩한 소유가 된 베드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새인생을 살았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한 생명안에서 ‘새생명으로’ 다시 사는 반석된 베드로는 인생의 참된 목표가 생겼고, 꿈꾸는 희망의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집에 도둑이 들면 빨리 경찰을 불러야 합니다. 흉기를 들고 몰래 침입한 그 도둑을 잘못 다루면 해코지를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신속히 경찰이 와서 그 도둑을 쫓아내야 합니다. 이 비유로 ‘대체(代替)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뇌는 두가지 반대 감정을 가질 수 없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사람의 뇌안에는 한 개의 의자만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 의자에 먼저 절망이 앉아버리면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절망적이 되어 갑니다. 부정적이고 불행해져 갑니다. 그 절망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빨리 희망을 대체하여 그 의자에 앉히는 방법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대체의 법칙’입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주님 또는 세상, 생명나무 또는 선악과, 하나님 또는 돈, 희망 또는 절망....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우리는 생명나무, 하나님, 희망... 주님을 우리 마음속 하나뿐인 의자에 먼저 앉힙니다.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절망과 불행을 치유하는 유일한 치료제는 희망뿐입니다.’
 
우리의 삶속에 ‘대체의 법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그 하나뿐인 의자에 절망, 부정, 불행을 대체하여 희망, 긍정, 행복을 앉혀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 의자에 주님을 앉혀야 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이제까지는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내 생각대로, 내 뜻대로, 내 육신의 소욕대로, 육의 부정적 속성대로 내 맘대로 살아왔지만,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한 후에는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주님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마땅히 ‘주님의 생각과 의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 삶의 주인이 되신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일을 하며 새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이제부터 내안에 주님이 사는 새인생으로 주님이 나의 전체의 소유주, 영원한 주인이 되는 새생명을 살아나갑니다.
 
새생명으로 사는 자는 언제 어디서나 함께 계시는 ‘새로운 삶의 주인’과 대화하며 상의합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지?’ 항상 주님 생각을 하며, 곁에 계신 은혜속에서 함께 살아갑니다.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새생명 공동체는 ‘갈 곳이 있습니다.’ 분명한 삶의 목적이 있고 희망찬 목표가 있습니다. 이루어야 할 꿈과 비젼이 생겨서 ‘거북이처럼’ 그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여 성취합니다. 불가능한 꿈에 도전하여 기필코 이루어냅니다.
 
새언약의 중보자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새생명으로 사는 자요, 장자들의 총회, 하늘의 예루살렘, 보혈의 능력이 역사하는 곳, 시내산보다 더욱 더 복된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 시온산에 이른 자는 분명한 인생의 목표를 갖게 되고, 그 목표를 위해 위대한 등반을 감행합니다(히12:18-29).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를 비유하여 신앙의 위대한 등반에 관한 감동적인 실화가 있습니다. ‘느린 것을 두려워 말고, 멈춘 것을 두려워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은 산책이 아닌,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등정하는 등산과도 같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쉽게 시작하지만 갈수록 조금씩 힘이 들다가 99%의 크리티칼 포인트인 임계점에 이르면 죽을 만큼 힘이 듭니다. 그러나 죽고자 대들어 임계점을 극복하는 자는 정상에 서게 됩니다. 말 한 그대로, 행한 그대로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오는 ‘메아리의 원리’를 가슴에 담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거북이처럼 목표를 향해 한걸음씩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자가 영광의 정상에 이르게 됩니다.
 
1953년 5월 29일 11시30분. 세계최초로 인간이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밟았습니다.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의 두 번째 공격에 의해 마침내 세계최고봉이 정복된 것입니다. 이 에베레스트의 등정 성공기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습니다. 정상을 불과 몇 발자국 앞에 두고 힐러리가 그만 호흡곤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앞서갔던 텐징은 힐러리가 호흡곤란에서 회복될 때까지 정상의 몇 발자국 앞에서, 추위와 굶주림과 사투를 하면서 30여분 기다려 몸을 추스린 힐러리를 부축하여 함께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서는 등반가의 꿈을 이룹니다. 힐러리는 후일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한번도 영웅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다. 하지만 텐징은 예외였다. 그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그는 비천하게 시작해서 세계 최고에 올랐다.’
 
진정한 영웅 텐징은 기자들로부터 세계최초로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밟은 소감을 물어보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할 말을 산의 정상에 두고 내려왔기 때문에 할 말이 없습니다.’ 재차 소감을 물어도 똑같은 대답을 하는 그에게 이번에는 이제껏 아무도 오르지 못했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습니다. ‘나는 적을 물리치는 ‘기력’이 아니라, 어머니 무릎에 오르는 ‘아이의 사랑’을 갖고 산을 올랐습니다.’ 뒤쳐진 사람을 기다리며 영광과 기쁨마저 함께 나눈 진정한 서번트, 텐징의 이 말의 의미를 하나님의 사람들은 음미해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떨기나무에 번지지 않고 불타는 ‘불’을 경험한 후, 출애굽의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불일치의 산에서 거룩한 사명을 받은 모세는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말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만을 전하게 됩니다. 그가 할 말, 그의 말을 그 산에 두고 내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중보의 새인생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도 출애굽의 ‘일시적 구출’이 아닌, ‘영원한 구속’의 생명살림 프로젝트의 대업을 맡아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중보의 사명자로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대언하셨습니다. 주님처럼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천사들과 새언약의 보혈로 대속받은 장자들의 총회, 하나님의 성, 거룩한 시온산에 이른 하나님의 자녀도 마땅히 이제 자기 자신의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만을 대언하는 중보의 새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말을 잘하는 것보다 ‘잘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섞어 자기의 말을, 마치 진리의 복음의 말씀과 같이 전함으로 초대교회 진리가 왜곡되어 생겼던 성만찬 오해사건 등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그리하면 죽어도 살리라’(요6:53-59)는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기독교인은 사람의 고기와 피를 먹고 마신다’ 와 같은 터무니 없는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그래서 그로 인한 부정적인 결과가 생기지 않도록 진리의 복음만을 ‘잘 말해야’ 할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달아 진리의 말씀만을 잘 말하는 사람들은 진리의 복음으로 ‘새로난 사람들’로서 새로운 참된 삶의 목표가 생깁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써, 옛사람은 죽고 새생명으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는 ‘새로 난 본능’으로 위대한 인생의 고지를 등정하게 됩니다. 이런 위대한 등반가는 어머니의 무릎에 오르는 아이의 사랑으로, 거룩한 산의 정상에 오를 수 있게 됩니다. 아이의 본능처럼 성령의 새본능에 따라 중단없이 가다보면 어느덧 정상에 서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등산길을 가는 우리 어머니의 무릎을 기어오르듯이 하나님의 성산을 완등합시다. 기력이 아닌 사랑으로! ‘보라, 그리스도와 함께 정상에서 새노래를 부르는 자들을 복되다 하도다.’ 주님이 삶의 주인이 되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새생명 공동체’가 시온의 정상에서 승리의 노래, 영원한 생명의 노래를 외쳐 부를 것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여 삶의 주인 삼은 ‘새생명 공동체’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도 영원히 살 것입니다. 받아들이면 사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불가능한 일도 감당하며 감히 꿈꿀 수 없는 꿈도 이루고, 목표도 달성할 것입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정한 목표와 꿈을 위해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입니다. 5년 후, 당신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양적 목표, 질적목표 그리고 영적 목표와 그를 위해 필요한 물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꿈을 꾸고 있습니까? 꿈꾸는 목표 달성을 위해 어떤 계획을 세우며 2012년, 마음으로 결심한 꿈과 비젼 성취를 위해 오늘 어떤 구체적 스케줄을 따라 실행하고 계십니까? 새생명 공동체는 갈 곳이 있으며,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습니다. 히말라야 완등코스인 14봉우리처럼 거룩한 시온 성산, 주님의 새생명 공동체, 은혜의 산인 이 곳 하나님의 교회에서 완등해야 할 목표들이 있습니다. 2012년이 5개월여 남은 이번 주간에, 우리 소망인은 올해의 목표를 새롭게 점검해고 수정 보완해야 합니다. ‘느린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멈춘 것을 두려워 하며’ 거북이처럼 주변 토끼와 비교하거나 의식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한걸음씩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속에서 기력이 아닌 사랑으로 나아갑시다. 불가능한 꿈(Impossible Dream)에 도전하여 꿈을 성취하고 목표를 이루어 냅시다. 주의 사랑으로! 새생명 공동체는 영광의 성산을 완등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