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We also rejoice in our sufferings, because we know that suffering produces perseverance; perseverance, character; character, hope’(롬5:3)
마음의 뜻대로 역사하시는 주님의 결정을 따라 생사화복(生死禍福)이 주어집니다. 주의 결정 속에 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복주시기 위해 미리 결정하시고, 끝까지 함께 하시는 주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배경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우리의 ‘신앙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 즉, 원하는 것이나 원하지 않는 것, 좋은 것이나 싫은 것, 처해있는 삶의 자리와 이웃의 사람들, 고난 과 십자가, 생명과 죽음 등....하늘에서 결정되어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받아들여야 사는 거야!’라는 진리를 깨달으십시오.
십자가는 플러스 (+)입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라! 환난과 고난은 인내를 만들고, 인내는 성품(Character)을 만들며, 좋은 성품은 소망을 이루는 까닭입니다. 십자가의 역사는 언제나 결과가 좋은 법입니다. 하나님의 이야기(He story)인 역사의 시간이 지날 때, ‘썩는 것’이 있지만 ‘익는 것’도 있습니다. 썩는 것: ‘부패(腐敗)’되는 것이 있는 반면에 익는 것: ‘발효(醱酵)’되는 것도 있습니다. 즉, 시간이 지나면서 나빠지는 ‘부패적 변화’와 좋아지는 ‘발효적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누룩이 발효되어 주변의 밀가루 서말을 전부 부풀게 하는 발효적 변화를 이루는 것이 천국입니다. 과거보다 더 나아지고 좋아지는 발효적 변화는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바뀌어져 가는 성숙을 의미합니다. 그런 성숙의 변화의 천국을 이루기위해서는 ‘발효의 과정’으로써 ‘부글거리는’, ‘인내(忍耐)의 절대시간’이 필요합니다.
인내속에서 정금(正金)처럼 참되게 만들어지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복된 결말을 보았습니다.’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셔서 ‘알곡’으로 익어가게 하시는 모든 일은 합(合:+)하여 선을 이룹니다. ‘가라지’와 달리 ‘알곡의 인생’은 부패함으로 인하여 썩는 악취가 아닌,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됨으로써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산합니다.(약5:7-13)
무인도에 난파된 한 신실한 신앙인이 구조선을 기다리며 가까스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조개나 소라, 물고기 등을 잡아먹으며 동굴에서 비바람을 피하고, 밤이나 낮이나 자신을 구조할 배가 지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수없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구조선은 오지 않고, 점점 몸은 야위며 건강이 악화되어 이렇게 동굴에서 살다가는 구조되기 전에 죽겠다고 생각해 나뭇잎으로 작은 오두막집을 만들었습니다. 그 날 저녁, 피곤이 몰려든 그는 새로 지은 오두막집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깜빡 잠이 들었다가 불길한 기운이 느껴져 눈을 떠보니...아뿔사! 오두막에 모닥불의 불씨가 옮겨 붙어 불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순식간에 새까맣게 다 불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그는 미친 듯이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기다리던 구조선은 안보내주시고, 이제 내 쇠약한 몸뚱이 하나 따뜻이 할 수 있는 오두막집마저 이렇게 홀랑 다 타버리게 하시다니, 해도 해도 너무 하시는 군요...’ 그의 눈엔 분노의 핏발이 섰고, 얼굴은 붉으락 푸르락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밀려드는 야속함에 약주로 쓰기위해 나무열매로 담근 술을 들이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밤새도록 분에 못이겨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갖은 포악을 행하며 밤을 지새우다 새벽녘이 돼서야 모래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해가 떠올라 먼동이 터오를 때, 시체처럼 쓰러져 있는 그를 깨우는 인기척이 있었습니다. 마도로스 복장을 한 건장한 선원들이 그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당신이 봉화불로 보낸 어제 밤, 구조신호를 보고 이곳에 사람이 있는 줄 알고 이렇게 구조하라 왔으니 어서 일어나시오. 우리와 함께 갑시다.’
‘오두막이 불탄 것이 구조신호가 되어 극적으로 구조되게 되었구나.........!?!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송구하고 죄송하여서....!?!’
의인 욥은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다 날렸습니다. 한 날 자식들도 다 한 장소에서 급사(急死)해 버렸습니다. 아내마저도 저주하며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은 독한 병에 걸려 티끌을 뒤집어쓰고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기왓장으로 피나도록 온 몸을 긁어대었습니다. 친구들이 위로한다고 왔지만 올바른 신앙인이 아니었던 그들은 오히려 마음에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내고, 죄와 허물을 들추어내며 욥을 낙담케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의인 욥은 이런 고난의 한계 상황을 극복하고 툴툴 일어나 주 앞에 서서 결국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런 상상치 못할 극한 고난속에 처해있던 욥이 툴툴 털고 일어날 수 있었던 비결이 있었습니다. 첫째, 욥은 원망(怨望)하지 않았습니다.(욥1:22)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주께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그저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욥은 억울하다 생각하며, 남의 탓 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감사히 받아들였습니다. 둘째 욥의 손에 포학(暴虐)이 없었습니다. ‘이런 지경에도 내손에 사납고 잔인한 포학이 없구나!’ 극한, 절박한, 절대절명의 그 ‘순간’을 ‘극복’해 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욥은 정갈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이상적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며 더욱더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정갈한 기도를 쉬지 않고 하였습니다(욥16:17).
원망하지 않고, 포학을 행하지 않으며, 정갈한 기도로써 욥은 극한 고난을 극복하고 툴툴 털고 일어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내가 고난의 풀무불속에서 정금같이 단련되고 만들어져 하나님 앞에 나아가리이다.’
참된 하나님의 의인이라면 우리도 욥처럼 툴툴 털고 일어서서, 극복하고 추진해야 할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며 쉬지말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욥과 같은 의인으로 할 일을 하며, 가야할 곳, 새하늘과 새땅으로 다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신대륙을 찾아 나섰던 콜롬부스처럼 우리도 지금 ‘천국 길’ 인, ‘신세계’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콜롬부스가 믿는 것는 오직 하나 ‘지구는 둥글다’라는 것 뿐 이었습니다. 그렇게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와 같이 그는 ‘지구는 평평하지 않고, 지구는 둥글다’고 믿었기 때문에 서쪽으로 서쪽으로 신대륙을 찾기 위해 항해할 수 있었습니다. ‘금이 묻혀있는 신대륙을 찾아 함께 떠납시다.’ ‘나와 함께 가고자 하는 사람은 용기있게 나서시오!’ ‘저요, 저요, 당신의 말을 믿고 당신과 함께 가겠소.’ 신대륙을 향한 꿈을 같이 꾸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져 한 무리의 사람들이 콜롬부스를 선장으로 역사적 항해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선장의 확신에 찬 예상과는 달리 한달 반이 지나도 신대륙은 보이지 않고, 여전히 검푸른 바다만 계속되자 선원들은 극심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조건 서쪽으로만 가자니...., 상황은 한달 반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고...이러다가 혹 세상사람들이 생각해온 것처럼 지구는 평평하므로 이 바다 끝 절벽에서 떨어져 바닷물 속으로 수장되는 것은 아닌가?’ 점점 불안이 고조되는 가운데, 딱히 어떤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그를 선원들이 불신하기 시작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급기야 폭동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폭도로 변한 선원들에 의해 돚대 난간에 매달린 선장은 비장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이틀만 더 가봅시다. 이제 이틀 후면 신대륙이 나타날 터이니 이틀만 더...!’ 폭동을 일으킨 선원들은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 좋다 이틀만 더 가보자 하고 선장을 풀어주며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그들은 ‘이틀 뒤’ 지금의 미국, America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America라는 이름이 붙기 전에는 ‘이틀 더’로 불리워졌었습니다. ‘이틀 더!: two days more!’ 신대륙!
신대륙, 하나님의 신세계를 향해 가는 우리도 ‘이틀 만 더’ 가봅시다. ‘오늘과 내일 갈길을 가야하나, 제 3일에는 완전해 질것이라.’(눅13:32-33) 아브라함처럼 ‘막연한 길’ 그러나 분명히 ‘갈 곳’, ‘보여줄 땅’으로 ‘이틀 더’ 가봅시다. ‘내가 앞으로 네게 보여 줄, 약속의 땅으로 가라!’
의미심장하게도 그 선장이 오랏줄에서 풀려나며 혼잣말로 중얼거린 소리가 있었습니다. ‘내가 언제 신대륙에 가봤나?’ 그렇습니다.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길을 가는 그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구는 둥글다’라는 진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진실을 토대로 ‘신대륙을 향해 서쪽으로 함께 항해하자!’고 힘주어 독려했습니다. 저도 천국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언제 천국에 가봤나요? 그렇습니다. 천국 길을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제가 확실히 말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언약하신대로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다’라는 진실뿐입니다. 이 진실을 토대로 기쁨의 복된 소식을 힘주어 전합니다. ‘주의 강림이 가깝습니다. 생각을 바꾸십시오. 천국이 가깝습니다.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십시오. 이제 툴툴 털고 일어나 신세계인 천국을 향해 우리 함께 갑시다.’
이처럼 신세계인 천국은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아니, 내 가슴에 있는 이 믿음은 때때로 고난의 극한 상황에 처하면 겨자씨보다도 적어서 가슴에서 저 발가락 사이에까지 내려가 찾을 수 없을 만큼 적구나 하는 것을 시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천국길은 떠밀려서 간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옳습니다. 떠밀려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전하게 되고, 그렇게 전함으로써 결과된 사람들로 인해 등 떠밀려 가는 천국길입니다. 이제 우리는 돌아설 수 없고, 포기할 수 없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극한 고난가운데 낙심하고 좌절하여 원망하면서 슬픔속에 주저앉아, 안가면, 전파된 진리의 복음을 듣고 천국길을 향해 함께 따라나선 사랑하는 자녀들, 부모형제들, vip들이 가만 두지 않습니다. 한량없는 은혜 속 갈 수밖에는 없는 갈 길을, 뒤따르는 자들에게 등 떠밀려 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드렸던 헌신의 시간들, 헌물들, 생명살림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수고와 정성들.....이것들에 의해 떠밀려 천국길을 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하나님의 신비한 은혜입니다.
천국 길을 가는 우리, 오늘과 내일 갈 길을 가고, 극복하고 추진하며, 제3일에는 완전해질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틀만 더 가봅시다. ‘Two days more(+)’ 신세계를 향해 가는 우리 소망인, 극한 고난 가운데에서도 즐거워 하라는 참된 신앙인의 도를 명심하십시오. 주안에서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며, 항상 기뻐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5:16-18).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는 극한 고난가운데에서 계속 슬픔의 눈물만 흘리고, 낙담하고 주저앉아 의기소침하며, 절망과 침륜에 빠지게 하는 어두움의 영들과 사탄의 궤계와 책략을 단호히 물리칩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종이 가는 곳마다 모든 눈물을 거두어 가신다 합니다. 도무지 감내할 수 없는 육신적 슬픔의 한계를 뛰어넘는 영적 기쁨과 감사와 사랑의 능력으로 극한 고난과 슬픔을 극복할 수 있게 하십니다. 더 큰 기쁨으로 즐거워함으로써 더 이상 울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웃게 만드는 기운찬 소망인은 최후 승리합니다. ‘미소 메이커’, 소망인은 침륜에 빠지지 않고, 오늘과 내일,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의인은 일곱 번 꺽여도, 감사와 기쁨으로 고난과 슬픔을 극복하고 여덟 번 다시 일어나 추진합니다. 신세계를 향해 미래를 개척해가는 행복 공동체여! 원망과 포학 없이, 정갈한 기도 그리고 감사와 기쁨으로 툴툴 털고 일어납시다. 행복 + !, 툴툴 털고 일어나 신세계를 향해 다시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