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 화면 속 세상만을 보지 말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우리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로다.’ 태풍 볼라벤과 덴빈이 소용돌이 치고 난 후, 맑게 개인 하늘을 바라보며 ‘태풍 지나 듯, 결국은 다 지나가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갈 길을 가고, 할 일을 하리니 제 삼일에는 완전해 지리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정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늘을 고향 삼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그네 인생!, 그를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뒤따라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다 하늘 본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인생의 여정가운데 십자가라는 필연적 과정과 절차를 거친 후에 결국, 영광의 승리에 이르게 됩니다. ‘십자가는 플러스입니다!’ 1800도의 견딜 수 없이 뜨거운 열(heat)과 우리교회크기 만큼의 쇳덩어리 무게가 짓누르는 압력(press)과 압박을 견디어 냈을 때, 비로소 생성되는 찬란히 빛나는 다이아몬드 보석처럼, 하늘의 무게로 짓눌리는 중압감과 이글거리는 불로 연단되어 생성된 하나님 역사의 보석 같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참으로 고귀한 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이아몬드 같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통하여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십자가의 고난을 인내하고 극복함으로써 생명살림의 부활승리, 영광의 새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선진 사도들이나 욥의 예증처럼 고난과 인내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고, 그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신 섭리입니다. ‘원천(源泉)의 세계’에서 결정된 대로 ‘현상(現象)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법을 따라서 하나님의 결정하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결정을 받아들여야 살 수 있습니다. 천하의 모든 일을 마음의 원대로 결정하시는 자의 뜻에 순응하는 자가 영생복락을 받을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결정은 인류의 전역사 뿐만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인생사 생사화복(生死禍福)까지도 속속들이 다 주관하십니다. 하늘에서 정하신 이 모든 결정은 궁극적으로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될 당신의 자녀를 위하여 내리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 뜻과 원대로 마시고, 하늘 아버지의 뜻과 원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하여 좋은 결과를 이룰 줄을 확신합니다. 어떤 일을 만나든 태풍 지나듯 결국은 지나는 것이고, 좋은 일들이 다가올 것입니다. 태풍을 지나면서 강하고 성숙된 참 그리스도인의 형상과 모습과 향취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공생애의 사역을 돌아보며 이루시는 하나님 역사의 큰 뜻을 가슴에 새겨봅니다. 결정하신 뜻대로,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지상에서의 사명인 십자가의 사역을 완수하시고 ‘다 이루었다’하시며,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Number 9(No. 9)의 신비스런 비밀’이 음악의 세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교향곡 ‘No 9’을 만든 음악가는 누구든 그 즉시 하나님이 하늘로 데리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마에스트로가 시험 겸, 자신이 작곡한 교향곡에 ‘No.7’으로 명명했더니 괜찮았다 합니다. 그 후, 온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교향곡에 ‘No. 9’을 붙이자마자 그는 소천(召天)하였습니다. 베토벤도 교향곡 ‘No. 9’을 만든 직후,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가셨습니다. ‘No. 9’이란 이 세상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 더 이상 이룰 수 없는 것, 다시 말해 그를 통하여 할 수 있는 온전한 것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목적 있는 삶으로 태어난 그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의 의미를 부여하는 ‘No. 9’을 붙이는 순간 그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이루셔야 할 것을 다 이루신 하나님이 그를 다시 하늘로 불러가는 것입니다. 이 같은 ‘넘버 9의 신비스런 비밀’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결정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에 보내신 사람들이 자신의 사명을 온전히 다 이루면 다시 하늘로 불러 가신다는 심오한 섭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 십자가상의 최후의 말씀을 하시고 주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다 이루시고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시면서 성령의 역사를 약속하셨습니다. 당황스럽고 두려우며, 근심과 슬픔에 찬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면 보낼 진리의 성령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뜻하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며 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가운데 유익된, 좋은 일이 생길 것입니다. ‘너희는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가지 않으면 그가 오지 않을 것이요. 내가 가면 그를 보내리니,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며, 내 것을 가지고 내 영광을 드러내리라.’(요16:13-16)
영원한 하늘 거처로부터 시간속의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님은 33세 짧은 인생동안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고 하늘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그와 같이 주님을 뒤따라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또 하나의 보내신 자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인생입니다.
힘들고 지칠 때, ‘밤마다, 이제 그만, 내일 새벽에 눈뜨면 하나님 나라에 옮겨져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비겁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이라는 귀한 선물을 받아 이렇게 오늘도 살아있음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직 주안에 살아있게 하심은 오늘, ‘나를 통하여’ 이루셔야 할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 해야 하는 십자가의 사역을 다 이루면, 그 때 하나님이 하늘의 영원한 처소로 우리를 불러 가실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주어진 이 땅에서의 사명을 온전히 다 이루면, 임시거처인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와 하늘의 영원한 거처에 이르게 되던지, 아니면 주님의 꿈을 이룰 때가 찬 그날이 되면, 우리의 썩을 몸이 그리스도의 몸처럼 변하여 영원한 세계에서 안식하게 될 것입니다. 나도 그리스도가 되고, 너도 그리스도가 되며. 우리 모두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성경의 본질적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나뭇가지를 더욱 힘주어 꽉 물고, 기도합니다. 하늘을 나는 거북이처럼 다시 힘을 내어 진리의 성령으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굳게 믿고 바라며, 사랑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 아니, 궁극적으로 우리네 인간의 인생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인생의 정로를 발견했으니 애굽으로 도움을 청하려 가지 말아야 합니다. 필연적으로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고 마셔야 하는 길이지만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네 뒤에서 나는 소리가 이르기를 ‘이 길이 정로니, 이 길에서 주의 승리와 영광을 보리라!’ 인생은 과연 어디에서 왔다가, 어떻게 머물며,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참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참으로 인간은 무엇이며,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지를 반문해 봅니다.
“나는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유감스럽게도 신학까지도 속속들이 연구하였도다. 그러나 지금 여기 서있는 난, 가련한 바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만 알게 되었구나.”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독백입니다. 파우스트는 학문에 대한 한계를 느낍니다. 알면 알수록 더 많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하는 끝없는 ‘지성의 터널’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는 무기력해진 인간의 무능을 비탄합니다.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의 도움으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욕망을 채우며, 각종 쾌락에 탐닉하지만,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욕망을 채울수록 더 불안해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이며, 과연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이란 말입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존재적 가치에 대한 의문에 한번쯤은 매달리게 됩니다.
성경 속 솔로몬왕은 하나님께로부터 지혜와 분복을 받은, 최고의 인생이었습니다. 지혜로우니 정신적으로도, 국왕이니 신분으로도, 창고에 보화가 가득하니 재물로도, 미남에다 균형 잡힌 몸매, 700여 아리따운 부인들, 그야말로 더 이상 부족할 것 없는 분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일생동안 쾌락이 어떤 것인지 알까하여, 무엇이든지 내 마음과 눈이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않고 모두 취하였노라. 이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하리라 생각했는데 헛될 뿐이고, 바람을 잡으려는, 천하에 무익하고도 우매한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니, 헛되고 참으로 헛되도다.’(전2:3-11) 솔로몬도 만족할 수 없는걸 보면 인간에 내재 되어있는 본성을 거스를 수는 없는가 봅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솔로몬과 파우스트의 공통점은 모든 쾌락과 탐욕 등은 오직 자신만을 위한다는 것으로 타인을 위한 배려의 조항이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신만을 위하여 전념하는 것은, 마치 거울 없이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는 것과 같아 끝없는 노력만 필요할 뿐, 인간의 진정한 행복과 만족한 결과를 얻어낼 수는 없습니다.
반면에, 연구하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단번에 인간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들도 있기는 합니다. 젖을 잔뜩 먹고 곤하게 잠든 아이를 보는 엄마의 눈길은 사랑스러움으로 가득합니다. 한밤중에 무턱대고 눌러대는 아들놈의 초인종 소리가 듣기 싫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늦게라도 탈 없이 들어온 것을 고마워하며 이어 잠을 청하는 아버지, 아끼던 옥합을 깨어 그리스도의 발등을 적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한 여인의 터질 듯한 감동...
그녀는 예수님을 너무도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눈물로 발을 씻기고, 머리칼로 닦으며 옥합을 깨어 향유를 부었습니다. 저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지... 하는 손가락질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발에 입을 맞추며 향유를 발에 부음으로, 이제 있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일을 기리게 된 그 일로 칭찬을 받으며, 그녀의 많은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게 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사랑으로 인한 가슴 가득한 감동적인 삶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죄의 빚을 탕감 받은 그녀는 적게 탕감 받은 그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의 보내신 아들을 진실로 믿었고, 참으로 더 많이 사랑했습니다(눅7:35-50). 보내신 자를 믿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렇게 그녀의 가슴에 가득 채워진 예수 사랑으로 인해 그녀는 또 하나의 예수가 되었고, 댓가 없고 욕망 없는 ‘예수 사랑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참된 만족과 행복을 누리는 참된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에 내재 되어있는 본능적 욕구의 만족은 사랑스러움, 고마움에 대한 감동 등, 작은 듯 하나 이런류의 실재들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내면적으로 닮은 인간 본성은 ‘물질적인 부유’나 ‘심리적인 안정’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도에 따라 성실한 실천적 삶을 살아갈 때,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길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가르침과 달리, 사람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행복과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은 사랑하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베풀며 부유해지고, 나누며 늘어나고, 비우며 가득 차는’ 성공적인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는 것만이 인간본성에 부합하는 것이며, 이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인생의 정로! 오직 한 길,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 사랑의 삶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