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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목표를 향하여, 사랑의 가슴으로 동감하며 행진하라! 2013-01-20

감사^^* 2013. 1. 28. 10:41

거룩한 목표를 향하여, 사랑의 가슴으로 동감하며 행진하라!
신명기 26:1~11    2013-01-20
 
@거룩한 목표를 향하여, ‘사랑의 가슴으로’ 동감(同感)하며 행진하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말씀은 제1의 창조적 기능을 갖습니다. 그 말씀에의 순종은 제2의 창조적 기능을 갖습니다. 잘 이해할 순 없지만 하시는 말씀에 순종하여 가다보면 나병(문둥병)도 낫게 되고, 저주도 축복으로 변하여지며, 고난이 변하여 영광이 되고, 슬픔도 변하여 기쁨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기뻐하며 순종함으로 나아가면 그가 너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 영광 할렐루야!
 
속도(速度)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方向)’입니다. 세속적인 인생의 목표와는 차별되는 ‘거룩한 목표’를 향(向)하여 사는 인생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하여 거룩한 행진을 계속하라!’ ‘너희는 먼저 거룩한 목표인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여 줄 것이라!’
 
회교국의 영적 지도자이며 신비주의자인 ‘파리드’가 ‘아크바르’왕을 만나기 위해 왕궁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마침 ‘왕’이 기도 중이어서 기다리던 ‘파리드’가 기도를 끝내고 나온 왕을 만나자 이렇게 물었습니다. ‘왕께서는 방금 전에 무슨 기도를 하셨습니까?’ ‘나는 세 가지를 신에게 기도했소. 첫 번째는 성공을, 두 번째는 부를, 세 번째는 장수를 달라고 기도했소!’ 왕의 대답에 안색이 굳어진 ‘파리드’는 왕궁을 서둘러 빠져 나왔습니다. 당황하며 쫒아 나오는 수행원에게 파리드가 속삭였습니다. ‘내가 왕을 만나러 온 줄 알았는데 ‘걸인’을 만나고 가는구먼!’ 저런 기도는 걸인이나 하는 기도지, 왕으로서는 할 수 없는 기도야! 왕이 되었으면 가장 성공한 것인데, 성공을 구하다니? 이 나라에 왕보다 부자가 누가 있다고 부를 구해? 오래살기위해 왕궁의 각종 좋은 것들을 드시는 분이 장수하기를 구한다? 이는 왕의 신분에 맞지 않는 왕답지 못한 기도요, 걸인이나 구할 법한 것이지..오늘 나는 왕을 만난 게 아니라, 걸인을 만나고 가는군..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혹시 ‘왕의 기도’를 해야 할 우리가 ‘걸인의 기도’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내일을 걱정하며 입신양명과 부귀영화, 무병장수를 구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가르쳐 주시며 ‘올바른 기도법’을 계몽하셨습니다. 올바른 기도란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올바른 삶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무엇보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올바른 ‘의의 관계’를 형성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분별하고 점검하며 올바르게 살아가게 해야 합니다: ‘지금, 나는 예수님과 이상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나님 종의 말씀대로 행동하고 있는가? 주의 공동체에 유익된 일꾼이 되어 화해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가?’
 
이처럼 기도를 통하여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면 필요한 모든 것은 덤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솔로몬’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것, 즉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구하지 않은 ‘성공과 부와 장수’를 ‘덤’으로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합시다. 신앙이 없는 이들도 또한 무당들도 ‘성공, 부, 장수’를 구합니다. 이런 것은 ‘보상’이 아닌 ‘은총과 은혜의 선물’로서 덤으로 주어지는 것이니, 하나님 자녀의 기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속의 ‘응어리’를 배출하는 출구가 기도일 수 없다는 점 또한 명심해야 합니다. 기도를 계몽해야 합니다. 기도에 관한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기도의 방법과 내용을 바꾸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자녀답게 기도하며, 작은 그리스도로 ‘십자가의 진실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걸인의 기도’를 업그레이드시켜 ‘왕의 기도’를 합시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오니, 내 뜻대로 마시고 거룩한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
 
왕의 기도처럼 거룩한 기도를 하며, 거룩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인생은 거룩한 목표가 있습니다. 거룩한 목표를 향하여 주님과 같이 ‘거룩한 행진’을 함으로써 거룩한 복지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거룩한 목표를 향하여 거룩한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이 하나 되어 동감(同感)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공감(共感)과 동감(同感)은 다릅니다. 공감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수긍은 하지만, 정작 ‘같이 가자’ 할 때에는 자신의 볼 일을 보러, 자기 길로 가버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동감은 에녹처럼 한마음이 되어 어디든 같이 동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공감하면 그것으론 동행할 수 없습니다. ‘동감’(同感)해야 ‘동행’(同行)할 수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으셨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달라 해도 내 자식 아브라함은 그렇게 할꺼라 믿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도대체가 말도 안되는, 이율배반적인 지시인 아들을 죽여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몸부림치면서도, 처절한 갈등을 극복하며, 아브라함은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동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던 이삭이었지만 이삭 역시 진실로 사랑하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동감했기 때문에, 같이 주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함께 ‘공감’하는 것을 너머, 같이 ‘동감(同感)’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몸 같았던 아브라함과 이삭은 하나됨으로써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감’(同感)해야 ‘동행’(同行)할 수 있고, 같이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동감할 수 없다면 결코 동행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하여 노예생활을 했던 애굽에서 출애굽의 역사를 이끌었던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로서, 거룩한 대열의 맨 앞에서 이제 목표로 한 거룩한 약속의 복지를 향하여 ‘거룩한 행진’을 시작합니다. 맨 앞에는 유다지파, 잇사갈, 스불론. 그 다음 열에는 르우벤, 시므온, 갓. 그 다음 열에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그 다음 열에는 단, 아셀, 납달리 지파를 두어 대열을 유지한 채 대열을 유지한 채 나아갑니다.
 
민수기(numbers)의 내용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다 센 후, 각 족속마다 성막을 중심으로 한 거룩한 질서 가운데, 호와 열을 맞추어, 각자의 거룩한 위치를 부여하여 거룩한 행진을 할 준비를 갖춥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신호에 따라서 제사장의 나팔소리에 맞춰 일사분란하게 각자의 거룩한 직위대로 거룩한 역할을 하며, 약속의 땅, 거룩한 목표를 향하여 거룩한 행진을 해나갑니다. 성령의 북소리에 발맞추어 나아가듯, 모두가 한 마음으로 동감함으로써 일사분란하게 앞으로 진군하게 됩니다. 아모리, 아말렉, 모압...등 안팎의 적들이 간악한 간궤로 저주를 퍼부으려 획책해도, 선두에서 이끌어 나가시는 거룩한 하나님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게 하시며 저주 조차도 축복으로 바꾸어 가시며, 복락의 행진을 하게 하십니다. 거룩히 빛나는 별을 향하여 거룩한 목표를 향하여 행진하는 가운데, 엄청난 뇌물로 매수한 발락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라는 간청을 받은 발람을 통하여 저주를 바꾸어 축복하고, 축복하고, 축복하는 ‘축복 + ’ 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민24:8-19). 반면에 모세를 대적한 고라와 반역자등, 공감은 하나 동감하지 못하는 자들은 끝까지 거룩한 행진을 다하지 못한 채, 그만 중도에서 다 엎드러지고 넘어져 멸망하고 맙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물질(物質) 과는 질적으로 다른 특성을 지닌 영혼, 정신, 마음 그리고 하나님 등, ‘비물질(非物質)’은 변하지 않습니다. 한 하나님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변치 않으시고 여전히 하나이듯, ‘하나님의 참 백성’,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 ‘이삭의 씨’ 들 또한 여전히 변하지 않고, 하나님과 하나 된 영혼과 정신, 하나 된 마음을 지니고 동고동락하는 가족공동체로 동행합니다.
 
공감(共感)이 아닌 동감(同感)이 중요하며, 동감은 ‘하나 됨’의 근거입니다.
공감과 동감의 차이는 예컨대, 동산에 여러 나무들이 서로 교감하는 차원을 공감의 수준이라 한다면, 한 나무 안에서의 뿌리와 줄기, 가지와 잎, 꽃, 열매들 간의 교감하는 차원을 동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분리되어 나뉠 수 없고,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한 몸 공동체요, 운명공동체로서, 언제 어디든 같이 갈 수 밖에 없는, 하나됨의 관계속에서만 동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공감이 아닌 동감이야말로 신앙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합니다. 옳습니다. 동감할 때에만 동행할 수 있습니다. 주와 동행하다 하늘로 들려 올라간 에녹, 산중턱에 배를 지었던 노아와 그 가족, 아브라함과 그의 약속의 씨, 이삭, 모세와 출애굽의 여정을 끝까지 같이 했던 이스라엘 백성 등 모두 동감함으로 하나 되었기 때문에 하늘의 놀라운 플러스(+), 플러스(+), 플러스(+)의 ‘+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동감함으로써 거룩한 행진을 감행하는 가운데 저주, 고난, 슬픔이 축복, 영광, 기쁨으로 바뀌는 놀라운 은총과 사랑을 직접경험으로 느끼고, 체험하며 삶의 간증으로 증언합시다. 드러내자, “하나님의 영광을!” 거룩한 목표를 향하여, 불타는 사랑의 가슴으로 동감하며 행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