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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행복한 기적 공동체가 긍정의 새지평을 열다. [로마서 13:11-14:12]

감사^^* 2013. 9. 3. 20:24

주의 행복한 기적 공동체가 긍정의 새지평을 열다. [로마서 13:11-14:12]
로마서 13:11~14    2013-08-25
 
‘주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조카 롯을 구원하시고!’ ‘주여, 나를 생각하소서!, 너와 내가 오늘 낙원에 있으리라!’
‘Thinking -> Making’ : 주의 Thinking 이 원천(源泉)이 되어, 그 본질로부터 Making 되어 나타나는 현상(現像)이 생겨납니다. Thinking!, Thinking!, Thinking! 잘못된 것을 옳게 생각하라! 좋은 것을 더 좋게 생각하라! 어떻게 하면 잘 될까, 생각하라! 생각이 바뀌면 세상이 변합니다.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설국열차(雪國列車)’는 지구온난화라는 심각한 문제에 대해 Thinking!, Thinking!, Thinking! 생각에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 ‘앞으로 이럴 것이다’라는 추측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추측함에 있어서, 추측의 근거는 숫자나 논리적 과학에 근거하거나 또는 기적(奇蹟)에 근거합니다. 숫자로 계량화할 수 있거나, 논리적인 과학적 사실에 근거해, ‘앞으로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지는 기적(奇蹟)에 근거해서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기적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기적에 근거하여 추측하면, 고정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생각의 여유로움으로 인해, 경직되고 고착화된 잘못된 생각을 바꾸어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습니다. 
    
옛것이 변화되어 새로운 생각으로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존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딸깍’ 하고 전환되는 하나님의 축복이 부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지식’이 딸깍하고 ‘지혜’로!, ‘상상력’이 딸깍하고 ‘창조’로!, 전환되기를 소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생각이 딸깍 하고 바뀌어 인식의 전환이 있기를 꿈꿉니다.
    
하버드대에서 발표한 21세기 최고의 발견처럼,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변한다.’ ‘잘못된 내 생각을 바꾸면 온 세상이 변한다.’ 인류의 발전은 생각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져왔으며, 잘못된 생각으로 패가망신을 당하며 멸절하기도 합니다.
    
‘인식적 오류(cognitive misunderstanding)’가 우울증을 유발하다 급기야 안타깝게도 자살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자들은 나름대로의 부정적 논리가 확실합니다. 잘못된 생각으로 인하여 20층 높이에서도 뛰어내리는 그 파괴적 에너지를 전환해 줄 수만 있다면 엄청난 생명역사의 새로운 반전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어 사고를 바꾸며, 인식을 전환하는 것이 근본적인 치료법입니다.
    
인식적 오류의 대표적 예는 ‘당위적 사고’의 오류입니다. ‘Should : 마땅히 그리 되어야 한다는 당위.’ 이는 완벽주의를 초래하는 교묘한, 부정적 인식오류의 전형으로서, 이런 부정적 측면의 당위적 사고의 오류에 빠지면 참으로 불행한 일을 당하고 맙니다. 이는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잘못된 생각에서 발원합니다. 그런 인식적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10인회의 정치적 암투를 그린 유명한 오페라, ‘포스카리의 두남자’를 연출했던 극작가 ‘베르디’의 말처럼 ‘사람은 반은 신이며, 반은 흙’입니다. ‘인간은 하늘을 날 수 없다. 흙이 땅으로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간은 흙속에서 개, 돼지처럼 살 수도 없다. 영혼이 하늘로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경계선상을 살아가는 인간은 하나님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이 되려 하는 생각’, 그 인식적 오류 때문에 인간은 병들고 파멸하고 만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같이 완전하다면, 완벽한 그를 하나님이 굳이 구원할 이유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완전하다면 하나님은 라이벌의식을 느껴 구원하실 리도 없습니다. 오히려 불완전한 인간은 점진적으로 변화되는 답답함과 부글거림 속에서 언제나 어느 상황 속에서나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 되면 좋겠네~’ ‘그럴 수도 있지~!’
    
또 과잉 일반화(over generalization)의 오류가 있습니다. : 한 가지 일을 가지고, 그것을 과잉 확대 해석하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번에 실패했으니 난 이제 틀렸어. 앞으로 모든 일에 실패할 것이고 난 끝났어. 틀렸어.’ 사람은 3000번 넘어졌다 일어나야 걸을 수 있다 합니다. 순진하여 속기 잘하는 의인은 7번 넘어지지만 그러나 8번 일어나며, 77번 짓밟히나 88번 극복하여 나아갑니다. 라이트 형제는 99번째 다시 시도하여 하늘을 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진리대로 결국 모든 것이 합하여 잘 될 것입니다. 앞으로 이전 보다 더 잘 될 것입니다. 한번 실패와 실수가 영원한 실패요 실수일 수 없다는 긍정적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로써 ‘이분법적, 흑백논리’의 오류도 극복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회색지대, 그 경계와 사이를 보지 못하고 흑 아니면 백이라는 극단적 생각을 고쳐야 합니다. ‘선택적 추론’도 속기 쉬운 인식적 오류입니다. ‘공부 잘하는 자가 성공한다.’ 공부 잘 하지 못해도 성공하는 예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지금 여성 대통령시대에 큰일 날 시대착오적 부정적 발상입니다. 그저 무심코 받아들이는 전통적 의식, 사회적 통념속의 간계도 꿰뚫어 바로 잡아야 합니다.
    
‘성씨 성격론’이나 ‘혈액 성격론’에 대한 인식적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우린 모두 예수님의 가족이니, ‘예’ 씨이고 그리스도의 ‘그’ 씨이라 예수님의 성격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혈액 성격론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A형, B형, O형, AB형이 식사 중에 갑자기 AB형이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그러자  A형이 ‘나 때문인가 봐~’하고 어쩔 줄을 모르자, O이 A형을 뒤따라 나갑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여전히 B형은 아랑곳하지 않고 밥을 먹습니다.‘ ..... 혈액에 따라 성격이 형성된다는 혈액성격론은 과학적으로도, 실험적으로도 전혀 논증도 입증도 할 수 없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일본에서 퍼져 일본과 우리나라에만 통용되는 허무맹랑한 왜곡! 젊은이들이 배우자를 선택할 때 참으로 우매한 이 같은 인식적 오류로 인해 일생이 잘못될 수 있는, 잘못된 생각의 예로서 바로 고쳐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어둠의 옷을 벗고 예수로 옷 입으라!’ 권면합니다. 이 참된 의미는 죄악된 굴레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처럼 사랑으로 변화하라는 것일 것입니다. 변화란 본질적으로 생각의 변화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옛 사람의 옛 생각, 이전의 부정적, 잘못된 내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생각, 예수의 긍정의 생각으로 변화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롬13:11-14:12).
    
답답하지만 점진적으로 거룩한 변화를 거듭하는 그리스도의 약속 안에서 기적을 경험하는 기적공동체는, 예수 긍정의 생각으로 새로운 지평을 엽니다. 주의 성령을 통하여 영적 섭리가운데에, 자연스레, 여유 있게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질 때, 경직되어 딱딱한 마음이 풀어지고, 돌짝밭 같고 가시덤불 같은 마음이 기경되고 좋은 마음이 됨으로써 마음이 열리고, 생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아니 되어도... 괜찮아, 다음엔 잘 될 수밖에 없을거야!’ ‘그럼, 그럴 수도 있지~.’
잘못된 생각이 고쳐지는 발효적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사회학과 교수가 강의를 듣는 학생들 에게 볼티모어의 빈민가에 사는 청소년 200명을 대상으로 생활환경과 그들의 삶을 조사하고 그들의 미래를 평가하여 제출할 것을 과제로 주게 되었습니다. 정규 대학을 다니는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에 버려진 그 청소년들에 대해 제출된 과제엔 하나같이 ‘이 아이들 에겐 전혀 미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상황에선 어떤 기회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다른 사회학 교수가 당시 제출된 학생들의 과제물을 우연히 읽게 됩니다. 그로부터  평가 대상이 되었던 빈민가의 청소년들에 대한 미래가 교수와 학생들에 의해 추적 조사되기 시작합니다. 과제물에 기록된 청소년들의 주소록을 확인하고 조회한 결과 다행히 200명 중 주소를 이전했거나, 사망했거나, 행방불명된 20명을 제외하고는 180명 모두가 여전히 마을 가까이 살고 있는데, 그들 중 176명의 신분을 확인하고는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변호사, 의사, 사업가 등으로 성공하여 안정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당시에 미래가 없다고 사회학과 학생과 교수가 평가한 비참한 환경에 버려졌던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교수는 내친김에 일일이 방문하여 이토록 어려운 환경을 어떻게 극복하고 변화된 삶을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었는지 일일이 방문하여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사회학 교수로서는 더없이 소중한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공담을 들으리라 했으나 예상외로 모두의 답변은 한결 같았습니다. 교수는 직접 물어봅니다.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여 선생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의혹은 더욱 증폭했습니다. 여선생을 찾아야 합니다. 대체 무엇으로, 빈민굴과 다름없고 범죄의 온상 같은 곳에서 아이들을 끌어내어 신분상승은 물론 성공적인 삶을 안겨주었을까? 그들을 변화시킨 마법 같은 공식은 과연 무엇일까? 수소문 끝에 여교사를 찾아 온 경위를 설명한 후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기적적인 교육방법으로 아이들을 그곳에서 이끌어 내셨습니까?” 늙었으나 아직 빛나는 눈을 간직한 여교사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말 간단한 일이었지요. 난 그 아이들을 사랑 했답니다.”
    
정신세계를 성숙시키고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한 방법의 지식 전달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논리에서 볼 때. 본질의 변화에는 부패하여 쓸 수 없는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발효되어 이전보다 더 나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여선생의 사랑은 불운했던 청소년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발효제이었음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 13:33>
여선생의 사랑이 미래가 없고, 기회가 없는 청소년들을 부풀렸습니다. 변호사로, 의사로, 사업가로, 또한 그들의 사회적인 신분을 상승시켰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비교될 수도 없는 또 하나의 ‘위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신의 자녀로 부풀리는 ‘거룩한 성화’ 입니다.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사랑의 빛, 말씀의 빛이 비추어 질 때, ‘답답.., 부글부글...의 과정’에서 발효되어 이전 보다 더 좋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나쁜 것도 고쳐지고, 잘못된 것도 더욱 더 좋아지는 것도 있지만, 반면에 ‘답답.. 부글부글...의 과정’에서 부패되어 버리게 되는 안타까운 일도 있습니다. 마음의 밭에서 딱딱하게 경직, 돌들, 가시덤불들을 제해버림으로써 옥토 밭으로 기경해 인식적 오류를 제거해 좋은 마음, 좋은 생각으로 30,60,100 배의 결실을 맺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 마음의 생각이 바로 그 사람이다.’(잠23:7) 생각대로 되어 질 것입니다.
하늘을 날겠다고 생각해야 비행기를 만들 수 있듯이, 천국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찌 천국이 이루어질까. 하늘에 사다리를 놓는 것은 기적을 믿고 긍정적으로 추측하지 않으면 할 수 없을 것이나,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진다는 기적과 마법을 믿는 자에게는 긍정의 새 지평이 열릴 것입니다. 생각이 바뀌면 세상이 변합니다. 영원토록 주께 속해 있는, 주의 행복한 기적 공동체가 긍정의 새 지평을 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