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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스승과 함께, 새 사명으로 기쁨의 참 길을 열라! 2014-05-11

감사^^* 2014. 6. 26. 16:54

진리의 스승과 함께, 새 사명으로 기쁨의 참 길을 열라!
에스더 9:20~32    2014-05-11

 

‘아빠(abba), 하나님이 저는 참 좋습니다..... 그냥 우리 아빠 아버지가 좋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좋으신 아버지... 사랑합니다.’ 

주사랑 안에서, 오늘 이렇게 태어나 존재하게 해주신 육신의 어버이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사랑과 존경의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드립니다. 논에 우렁이, 어미 속살을 다 파먹고 자라난 새끼 우렁이가 논에 둥둥 떠다니는 속빈 어미 우렁이를 보며.. ‘야~ 울엄마 수영 잘 하네.... ’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는 효도하는 참 자식이 되겠습니다. ‘진리의 자식’, ‘약속의 자녀’답게 회개의 열매를 맺겠습니다. 참된 사명자의 삶의 결실로 그 크신 은혜, 가없는 사랑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이시라.’ 그리스도 보혜사 스승, 마음의 어버이와 함께 새로운 사명으로, ‘영원의 세계’, 회복될 ‘에덴의 낙원’으로 가고 싶습니다. 아침에 기도하고, 점심에 찬양하며, 저녁에 회개하는 자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은 ‘새 사명(使命)’을 주십니다. 새 사명을 받은 새로운 참 사명자여!, ‘원수는 흐르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 잊어 버려야 할 것은 제발 잊어버리고,...새출발, 새 사명자로서, 진리의 자녀답게 효도하며, 크신 은혜를 갚아가게 하옵소서!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 ‘사명자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사명을 다 이루기 전에 결코 스러질 수 없습니다. 영원한 세계를 건설하는 건축자,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뿐이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일 것이며, 부활 그 성화의 극치가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입니다. 공자의 수제자 안현의 질문: ‘스승님,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하여, 인의예지(仁義禮智)로 살아가다 죽으면..., 죽음후의 세계...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야, 이놈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일도 잘 모르는 데, ...죽음 후의 다음 세상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이냐...헛소리 말고 이 세상일에나 똑바로 관심을 가지도록 해라,...’

새로운 세상, 새로운 생명을 사는 ‘내세(來世)’가 있어야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내세(來世)가 없는 유교(儒敎), 결코 종교일 수 없습니다. 현세의 시간 속에서 윤회론(輪回論)을 말하는 불교(佛敎) 역시 엄밀하게 말하자면, 시간 밖의 영원한 세계인 내세가 존재하지 않기에 종교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세를 증거하는 참된 종교인 기독교: 천국과 영원한 생명, 부활의 몸, 에덴의 낙원의 회복을 선포하는 기독교의 참된 신앙은 그 어떤 이념과도 비교될 수 없는 위대한 생명의 참 길입니다.    

그리스도가 뿌리신 ‘영생의 씨’가 때가 차매, 무르익어 ‘영생의 열매’로 천국 곳간에 거두어 질 때가 되었음에 온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영원한 생명의 열매로, 알곡으로 무르익는 이때를 분별하고 준비해야 삽니다. 하나님이 익었나 안 익었나...젓가락으로 찔러보십니다. 그러기에 ‘가시’가 없는 사람이 없고, ‘속앓이’를 하지 않는 자가 없는 법입니다. 그렇게 익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밥이 다 익어서....‘뜸을 들이고 있는 때’입니다. 깨어서, ‘무르익은 때’, ‘추수의 때’, ‘마지막의 마지막 때’를... 분별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금나와라 뚝딱, 은나와라 뚝딱’ 하며 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의 말씀이 무르익어, 언약의 실상!, 모든 인류와 신앙의 선진들이 꿈꾸고 바라던 ‘환희의 극적 피날레’에 이르기까지...거쳐야만 되는 통과의례의 때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장하고 성숙하여 ‘자라기까지’, 이다지도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꿀인 줄 알고 속아, 먹어도 보았습니다. 똥도 먹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익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 욥과 함께 기도하고, 에스더처럼 새 사명자로 완숙되어, 선택 사항이 아닌 통과의례를 극복하며, 생명을 ‘살리는’ 살림의 역사를 완성할 것입니다.    

왕권강화, 인재양성, 신분철폐등 조선 최고의 개혁군주 ‘정조’의 왕권찬탈을 둘러싼 극적 이야기를 그린 ‘역린(逆鱗)’이라는 영화가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정조는 정쟁의 희생양으로 뒤주에서 처참한 죽음을 당한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역적의 자식은 왕이 될 수 없다’라는 명분으로 인해 끊임없이 살해의 위협 속에 살아가는 비운의 대왕입니다.  ‘안과 밖, 매순간..나를 죽이려는 자들의 살기...너무나 두렵고 불안해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구나...’

정조 1년, 1777년 7월 28일. 24시간 동안, ‘정유역변’의 숨 막히는 ‘엇갈린 운명’이 극화되어 펼쳐집니다. 
‘죽이려는 자’, ‘살아야 하는 자’ 그리고 ‘살리려는 자’가 뒤엉켜 빗어내는 활극입니다. 죽여야만 하는 ‘살수(殺手)’였던 ‘갑수’, 내시로 왕의 최측근 상책인 ‘갑수’가 변하여 살려야만 하는 생수(生手)로 바뀌어 정조대왕을 살려냅니다. ‘금일살주(今日殺主)’의 지령을 받으나, 그는 지극히 적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정조에 감동되고, 연민의 정에 더해져,  생명을 살리는 ‘생수(生手)’가 되는 것입니다. 

‘지극히 적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정성이 생기고, 정성을 다하면 겉에 배어나고, 겉에 배어나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상대를 감동시키고, 감동되면 변하고, 변하면 생육한다. 그러므로 지극히 적은 일에 정성을 다하면 나와 세상이 변한다......바뀔 수 있다!’

역사적 실화를 극화한 영화 ‘역린(逆鱗)’, 한비자에 소개되는 역린이라는 의미는 용의 목에 난 ‘거꾸로 난 비늘’로서 절대 건드려서는 안되는, 건드리면 반드시 죽음을 당하게 되는 치명적 금기를 뜻합니다. 유순하여 무엇이든 다 용납하는 용이나 오직 한 곳, 그 역린을 건드리는 자는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맙니다. 왕위를 찬탈하려 모반을 벌이는 것도, 역린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역린(逆鱗)을 건드려서는 안됩니다. 따먹지 말라는 때, 하나님의 프라이버시 가운데 있던 ‘선악과를 먹은 일’, 역린을 건드린 아담과 하와는 그만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아~진노의 자식으로 죽을 비운의 운명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에덴의 실례를 통해서 첫째 아담처럼 역린을 건드려 죽임을 당하지 말고,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처럼 죽기까지, 죽음을 불사하고 순종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생명살림의 역사를 이룰 진리의 스승과 함께하는 소망인이여!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에서, 관계가 깨어지고 멸망당하지 않기 위해서 결코 역린을 건드려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와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 ‘죽기까지’ 살리는 일에 참여하여 영원한 생명을 결실하는 생수(生手)는 복이 있습니다.  

‘죽이려는 자’, ‘살아야 하는 자’ 그리고 ‘살리려는 자’...이 엇갈린 운명의 극적인  드라마가 에스더 본문에 그대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죽이려는 자, ‘하만’이 유다인들을 모두 죽이려 획책하고, 제비를 뽑아 살육의 날, 아빕월 십사일을 정하지만, 살리려는 자, ‘에스더’를 통하여 살아야 할, 유다인들이 극적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만든 높은 장대 끝에 달려 자신이 죽음을 당하게 되는 엇갈린 비운을 맞이합니다. 부림절, 그 때,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며,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습니다(에9:20-32).

살리려는 자, ‘모르드개’가 유다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에스더에게 청합니다. ‘에스더, 네가 왕후가 된 것은 이때를 위함이 아니냐...네가 유다사람을 살리는 이 일에 동참하지 아니하면....네가 아니더라도...하나님은 유다사람들을 다른 방법으로 구원과 놓임을 얻게 할 것이나, 너와 네 아버지 가족은 멸망을 당하게 되리라!’(에4:14).  

다 익어서, 이제 뜸만 들이면 되는 이 때, 필요한 에스더와 같은 사명자! ‘죽으면 죽으리라!’ 사즉필생. 생명의 역설적 진리. ‘주를 위하여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 생수(生手)! 죽음을 각오하고 죽고자 대드는 자는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 때, 이 생명의 참 길 끝에서 약속된 실상, 주의 영광을 기쁨으로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의 스승, 보혜사와 함께, 이 때 기쁨의 참 길을 열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