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번째 할 일 /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하기
"나, 결혼해."
3년 전, 겨울은 몹시 추웠다.
수은주마저 얼어터지는 것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뼛 속까지 추위가 파고드는 날이 이어졌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예고도 하지 않고 불쑥 찾아왔다.
"너한테는 이걸 직접 주고 싶었어."
청접장이었다.
펼쳐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신부 자리에 그 여자 이름이 적혀 있을 테니까.
"들어올래? 양송이 수프 끓여줄께."
"아냐, 됐어. 바빠서 그냥 갈게."
이내 돌아서서 움추린 채 걸어가는 그의 어깨가 한
뼘도 안 돼 보였다.
그는 양송이 수프를 무척 좋아했다.
이래전, 그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방에 웅크리고
있을 때, 그의 몸을 따뜻하게 녹여준 음식이 양송이
수프였다.
그의 홀아버지가 싸늘하게 식은 채 발견된 지
나흘만의 일이었다.
걸어가던 그가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걸어갔다.
아버지가 거나하게 취한 다음 날이면 그의 얼굴에
어김없이 훈장이 달려 있었다.
퍼런 멍 자국. 그런 아버지였지만 그래도 이별은
슬펐다.
내가 만든 양송이 수프를 호호 불어 먹으며 그가
말했었다.
"아…맛있다!"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문 앞에 서 있었다.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해 겨울, 내 마음은 얼어붙다 못해 마침내
터져버렸다.
나 자신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자존심이 대체 뭐란 말인가.
3년 전 그날처럼 매서운 한파가 세상을 덮쳤다.
코트 깃을 여미며 집에 돌아왔을 때, 누군가가 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오늘도 예고 없이 찾아왔다.
3년 만에 만난 그는 파랗게 질려 있었다.
얼마나 기다린 것일까?
"널 기다렸어."
"날씨가 추워. 어서 들어와."
사람들에게 간간이 그의 소식을 듣곤 했다.
"안쓰럽다" 는 사람도 있었고, "그래서 분에 넘치는
신분 상승은 버거운 것" 이라고 서슴없이 내뱉는
사람도 있었다.
남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기란 쉽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 얼마나 큰 피멍이 맺혀
있는지 그들은 관심조차 없을 것이다.
불을 켜자 추레한 한 남자의 모습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언뜻 그의 아버지 모습이 떠오른다.
술에 절어 퀭한 눈과 툭 튀어나온 광대뼈. 눈물이
찔끔 난다.
`사람을 저 모양으로 만들어놓다니... 나쁜 사람들.'
그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손가락이 얼었는지 어정쩡한 모습으로 떨리고 있다.
우선 담요를 어깨에 걸쳐준다.
"양송이 수프 끓여줄까?"
"양송이가 있어? 한겨울이라서 구하기 어려울 텐데."
"기다려봐."
양송이는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지난 3년 동안 냉장고에
양송이를 준비해놓았던 것일까?
냄비에 물을 받아 불 위에 올려놓고 양송이를 손질한다.
칼이 닿을 때마다 양송이가 앏고 네모난 모양으로
바뀐다.
음식 재료를 다듬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요리는 마술이야.'
어쩌면 그의 불행을 바랐던 것일까?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내게 돌아오기를? 아니다, 그것은 아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물이 끓는다. 잘게 썬 양송이와 다른 재료들을 넣는다.
한참 끓이자 구수하고 맛있는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지고 김이 모락모락 오른다.
내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는 꾸벅꾸벅 졸고 있다.
갑자기 그 여자 생각이 난다.
그 여자는 왜 그를 원했을까? 그는 그 여자가
소유하고 싶었던 또 하나의 대상에 불과했던 것일까?
왜 그를 저렇게 비참하게 만들고 버렸을까?
눈물을 훔친다.
수프를 접시에 담아 식탁 위에 놓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그가 부스스 눈을 뜬다.
"벌써 다 됐어? 이 겨울에 양송이를 어떻게 구했지?"
전에는 양송이를 어떻게 구했냐고 물은 적이 없었다.
"먹어봐. 맛이 어떨지 모르겠네."
그는 수프를 한 스푼 가득 퍼서 입에 넣는다.
"안돼!"
이미 늦었다.
그가 인상을 잔뜩 쓴다. 냉수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킨 후에야 정신을 차린다.
"네 끼를 굶었거든."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옛날처럼 호호 불면서 수프를 먹는다.
"아... 언제 먹어도 맛있어."
마치 날마다 양송이 수프를 먹었던 사람처럼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불현듯 3년 전 겨울이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이
스르르 녹는 것이 느껴진다.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른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도
물기가 촉촉히 어려 있다.
정성이 담긴 요리는 추억을 만듭니다.
요리에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그 마음은 남습니다.
추억이 담긴 요리는 이 세상 어느 음식보다
맛있고 따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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