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오늘, 앞으로 더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새출발을 합니다. 천년의 사람 ‘징기스칸’처럼 마지막 장면에 초점을 맞추고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며, 오늘 용단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거룩한 도전과 거룩한 전진을 하며, 최후의 승리자가 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고 승리하도록 이미 결판난 영광된 승리의 길을 함께 가는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new creature)’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삶이라는 작가가 출간하는 세상이라는 책의 한 페이지를 넘겨 2012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미래는 금세 과거가 됩니다. 맞바람을 맞으며 범선을 항해하듯, 우리는 이렇게 단 하나뿐인 자신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구세주 예수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고 원망하며 ‘기억 속에 사는 인생’이 아니라, 다가오는 희망찬 미래를 꿈꾸고 기뻐 춤추며 ‘기대 속에 사는 인생’입니다. 두근두근 가슴 벅찬 기대를 가지고 출발하는 새해!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길 것으로 예감됩니다. 새해 좋은 생명의 열매를 달마다 풍성히 맺는 복터지는 2012년, 거룩한 기쁨이 충만한 임진년이 될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임’으로 옳은 신앙을 출발하여 옳은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얼음으로 뒤덮힌 북극해(北極海)의 거대한 섬들은 신비롭기만 합니다. 이 바다에는 거대한 얼음덩이들이 둥둥 떠다닙니다. 이런 장관을 구경하기 위해 한척의 배가 관광객을 태우고 이 근처로 들어왔습니다. 모두들 얼음덩이의 크기와 아름다움에 감탄합니다. 그때 한 소년이 아버지께 묻습니다. ‘이 큰 얼음산은 모두 이쪽으로 가는데 왜 작은 조각들은 다른 쪽으로 흘러가지요?’ 실제로 바다의 수면에 떠있는 작은 얼음 조각들은 빙산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아들의 주의 깊은 관찰력에 아버지는 흐뭇하여 ‘잘 듣도록 해라. 큰 빙산은 바다 밑에 더 큰 몸체를 지니고 떠다니기 때문에 바다 깊은 곳에서만 흐르는 조류를 따라 흐르게 된단다. 그러나 부스러기 얼음덩어리들은 물 표면의 바람과 출렁이는 물결에 의해서만 움직이지. 그래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거란다.’
물위에 함께 떠있으나 흐르는 방향이 다르다. 이 땅위에 함께 살고 있으나 가는 곳이 다르다. 바람 불고 물결치는 대로 정함이 없이 부스러기처럼 떠다녀야하는가? 바닷속 조류를 따라 신조를 가지고 움직여야 하는가?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것은 새해를 새롭게 출발하는 이 순간, 우리들의 몫입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셔서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받는 자가 없도다. 그 증거를 받는 이를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도다.’(요3:31-36)
위 본문에서의 세레요한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보여지는 표면의 물결과 바람을 따라 부스러기처럼 떠도는 인생이 아니라, 가시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하늘 위로부터 비롯되는 깊은 영적 섭리와 은총에 의존하여, 마치 바닷속 조류를 따라 확고한 신조(信條)를 가지고 움직여 나가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한 현상적이고 표면적인 역사가 아닌, 하늘 위로부터 역사되는 깊고도 오묘한 불가시적인 것들 즉, 사건과 사물의 본질과 이면, 겉이 아닌 속을 증거하는 증인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례요한처럼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믿음으로 살며 진실된 ‘사랑의 마중불’이 되어 오시는 주님을 예비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셔서 하늘에서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합니다. 영원의 세계이자 영혼의 거처인 하늘에 관한 메시지를 증거하는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합니다.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지 않고, 알게 된 것만을 그립니다’라는 피카소처럼 ‘본 것을 증거하고 알게 된 진실’만을 증언합니다. 그것은 불편한 진실이라서 대다수가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편리한 거짓말’이 너무 오랫동안 사회적 통념이 되어있어서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 불편한 진실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동굴이야기’가 있습니다.
초롱불로 불을 밝히는 동굴에서 태어난 한 사람이 자신의 등 뒤에서 비추어지는 불빛으로 동굴 벽면에 어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무미건조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오랫 동안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는 불가사의한 충동에 이끌려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건 아닌데..., 이렇게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일생을 사는 건 사는 게 아니지. 동굴 밖은 어떨까?... 정말 가보고 싶다...’ 오래 꿈꿔왔던 동굴 밖의 세상에 대한 동경과 희망으로 마침내 그는 용기를 내어 주변의 만류와 염려를 뿌리치고 동굴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태양빛이 찬란한 새 세상!!! 감탄과 감격!!!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는 꿈에도 그리는 동굴밖 세상은 도저히 말로 다 할 없는 전혀 다른 새 세상 이었습니다. 동굴 밖, 새 세상을 본 그는 두근두근 가슴이 뛰며 빨리 동굴로 돌아가 이 아름답고 찬란한 새 세상을 자신이 본 그대로 알려줘야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컴컴한 동굴안의 사람들에게 동굴 밖의 황홀한 새 세상에 관하여 본 대로 말하며, 알게 된 것을 가슴 뜨거운 떨림으로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랫동안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 있다가 갑자기 태양빛을 보게 됨으로써 그만 태양빛에 노출된 눈이 상하게 되어 동굴 안에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못해 자주 넘어지며, 이것과 저 사람들에게 자꾸 부딪치기 일 수입니다. 어딘가 모르게 현실적이지 못하고 몽환적이며, 불안정하고 어색하게 살아가는 그의 행태와 모습으로 인해, 또한 그의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동굴 밖 세상에 관한 허황되어 도무지 믿지 못할 말들을 불편하게 여겨 대부분의 동굴사람들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대다수는 오랫동안 동굴 안에서 살아오면서 ‘그저 이렇게 사는 게 편하지 뭐!’하며 고착되어버린 동굴 속의 전통적 통념에 따라 편하게 살고자 합니다. 오랫동안 들어와 너무도 익숙한, 이 전의 것들을 감히 다 뒤집어 엎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린 현 상황 속에서, 편리한 거짓말로 인해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그저 멸시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보고 들어 알게 된 그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희망찬 용기를 가지고 동굴 속의 무미건조하고 가련한 망할 삶을 박차고 나와, 찬란한 태양빛 아래서 더불어 기쁘고 황홀한 새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그러나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 찬송하며,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1; 48) 시간속 속된 어두컴컴한 이 땅, 죄악의 동굴에서 사는 사람중에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도무지 믿지 못할 일들을 믿는 영생 받기로 작정된 자들이 있습니다. 하늘 위로부터 오셔서 보고 들은 것과 아는 것들 그 ‘불편한 진실’을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을 받아들인 신자(信者)는 약속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빛나고 높은 천국에서의 황홀한 새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네 자신의 무지(無知)를 알라!’ 예수님이 오시기 500여 년 전,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서 위로부터 오시는 이의 보고 들은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영혼의 거처인 하늘에 관하여 ‘아는 것’을 증거 할 때 받아들임으로써 참되다는 인정을 받는 올바른 신앙인으로서 천국에서의 영광된 삶, 황홀한 새 세상에서의 부활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죽음이 삶보다 못하다’라고 잘 못 아는 ‘죽음의 무지’로부터 벗어나, 알게 된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말고 아는 것으로 예배하라.’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니라!’(요17:3) 영생의 복음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편리한 거짓말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네 위장된 어두컴컴한 동굴 같은 생활에서 박차고 나오는 거룩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2012년 새해! 거룩한 용기로 거룩한 꿈을 이루어 갑시다.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 영생을 꿈꾸는 인생을 살아갑시다.
파르테논 신전 맞은편에 군사와 지혜를 관장하는 미네르바의 여신상이 있습니다. 오른손엔 창을 들고 왼쪽 어깨에 온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듯한 눈 큰 부엉이 한 마리가 앉아있습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라는 헤겔의 법철학 요강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부엉이는 해질 무렵에 날기 시작해서 시공간에 나타나 보이는 것과 수량화 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이론’이라는 둥지에 담습니다. 그것들이 모여 ‘논리’라는 체계를 세웁니다. 그러나 완전한 것처럼 보이는 그곳 둥지 안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마음, 사랑, 믿음, 꿈, 희망, 영혼, 성령, 하나님’ 지혜의 부엉이가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위해 꼭 필요한 맑은 물을 마시기 위해 자연 정화능력을 지닌 미생물에 의존하듯 사랑과 희망과 믿음에 의존해야하며,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식물들의 광합성에 의존하듯 우리 영혼은 하나님 말씀에 의존해야 합니다. 양들을 춤추게 하는 예수사랑 리더십이 충만한 새해가 되길 기도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1-19)
맑은 물과 신선한 공기처럼 생명을 살리기 위해 꼭 필요한 하나님 역사의 ‘선한 도구’가 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고 복주시는 자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함으로써 요한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꿈을 성취하고, 생명살림의 역사를 이루는 마중불, 마중물이 되는 선한도구는 그가 사랑하는 모든 자를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거룩한 꿈을 이루기 위해 혼자만 아니라 함께 꿈을 꿔야 하며, 그 꿈을 사랑함으로 거룩한 부담을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부름받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한다는 것, 십자가의 일을 할 때, 거룩한 부담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집사님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일은 ‘안하는 것도 두렵고, 하는 것도 두려운 일입니다.’ 공감합니다. 주님조차도 십자가의 일 앞에서 거룩한 부담을 느끼셨으니.....그러나 주님은 그 거룩한 부담을 간절하고 절박하게 기도하심으로써 극복하셨습니다. ‘아버지여! 가능하시다면 이 잔을 피하게 해주시옵소서!,....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주님은 거룩한 감사로서 거룩한 기쁨을 가지고 십자가의 사명을 거룩한 기쁨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주님처럼 주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거룩한 부담을 거룩한 기쁨으로 승화함으로써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나 십자가를 지는 하나님의 일에는 처음에 다 거룩한 부담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그 일을 거룩한 부담으로 내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거룩한 부담을 극복하여 거룩한 감사로 바꾸어 거룩한 기쁨으로 충만할 때 이 영광으로 바뀔 십자가의 사명을 아름답게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내 뜻대로가 아닌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나의 나된 것’, ‘우리가 우리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범사의 모든 일이 감사한 것 뿐입니다.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여기까지 살아 왔고, 앞으로 영광의 시온성산에 이르게 되기까지도 그렇게 하나님의 힘과 열심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알파요 오메가이신 하나님 안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자신과 세상을 극복하며 거룩한 부담을 극복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부담스런 일을 짐 지워, 우리로 슬프고 고통스럽게 하려함이 아니라,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고 복주시기 위함이 확실합니다. ‘우리를 부르심의 목적은 우리를 통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함이고, 우리의 꿈을 통하여 복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거룩한 기쁨으로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예수 사랑리더십으로 양들을 춤추게 하라! 우리를 이 시대의 요셉들로 선택하셔서 거룩한 꿈을 꾸게 하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춤추며 찬양합니다. 이제 우리 소망인에게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의 거룩한 일이 거룩한 부담에서 이제 거룩한 감사로 바뀌며 두근거리는 거룩한 기쁨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기쁨으로 소망비전2012! 생명살림 역사의 마중불, 마중물이 되어 거룩한 꿈을 이룹시다. 꿈을 혼자 꾸면 꿈이 그저 꿈으로 남지만, 함께 꿈을 꾸면 꿈이 현실이 됩니다. 함께 거룩한 꿈을 꾸고 그 거룩한 꿈을 사랑하는 복된 나날들이 되십시오. 양들을 춤추게 하는 예수사랑 리더십이 충만한 새해가 될 것입니다. 예수사랑 리더십으로 거룩한 꿈을 이룹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