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TV속 세상만 보지 말고, 때때로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인류의 역사는 땅만을 쳐다보고 살아가는 인본중심(人本中心)의 ‘헬레니즘(Hellenism) 사조’가 아닌, 하늘을 쳐다보고 살아가는 신본중심(神本中心)의 ‘헤브라이즘(Hebreism) 사조’에 의해 유지 존속되며 발전되어 왔습니다. 하늘 위로부터 영원한 생명력이 주어지는 법입니다. 하늘의 아버지와 연결된 믿음의 줄에 의해 영원한 곳으로부터 하늘의 능력이 새록새록 공급되어지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것이 하늘나라, 즉 천국(天國)입니다(마13:44). 사랑이 가득한 마음을 주고 그 천국보화를 사는 순간, ‘첫째 하늘’이 열립니다. 하늘 위로부터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믿고 순종해 감으로서 열리게 되는 ‘둘째 하늘’을 가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둘째 하늘 길을 가다보면 약속의 말씀대로 실재하는 이데아(Idea)와 실상을 보게 되는 곳에 이르게 되는 데, 바로 그 곳이 ‘셋째 하늘’입니다. 그 하늘 가는 밝은 길, 샬롬의 축복이 주어지는 천국 길을 가는 복된 자는 참된 기쁨으로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예수사랑 리더십으로 양들을 춤추게 하라!’ 2012년, 과천소망교회의 멋진 하늘의 슬로건대로 어떻게 하면 양들을 기뻐 춤추게 하는 리더가 될 수 있을까?를 기대하며 다음의 이야기를 상고해 봅니다.
세계 2차 대전 중의 실화로, 치열한 전쟁 시 밀림 한복판에서 본대에서 떨어진 병사들이 길을 잃었습니다. 사방 우거진 수목에 갇혀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밀림 속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그들은 우선 두 그룹으로 나누어 각기 살길을 모색해보자고 의견을 모읍니다. 이 밀림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방법은 근처의 산의 정상에 이르는 방법뿐입니다. 두 그룹으로 나누어진 병사들은 각기 정상에서 만나자는 다짐을 하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갈 길을 찾으며, 정상으로 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합니다. 우선 그룹을 인도할 리더를 세웁니다. 한 그룹에는 이전에 밀림에서 절망적 상황을 헤치고 살아남아 생존했던 경험 많은 베테랑 리더가 뽑혀 병사들을 인도합니다.
‘예전에 이와 똑같이 밀림 한복판, 절대절망의 상황 속에서 살아나왔던 적이 있으니, 걱정 말라. 안심하고 나를 믿고 따르라! 내 말에 무조건 복종하라!’ 자신에 찬 그는 카터 칼로 밀림 속 길을 내가며 앞서 나갔습니다. 옛 기억과 경험을 살려 밀림 속을 한참동안 길을 뚫고 나를 따르라! 하며 나아갔지만 그만 정상에 이르는 길을 찾지 못하고 천길 낭떠러지에 이르게 됩니다. 안간힘을 쓰고 거기까지 이른 병사들은 남아있는 기력을 다 소진한 채, 지쳐 쓰러져, 살기를 포기하고 죽고 맙니다.
반면, 또 다른 그룹은 자신들의 리더로 한 사람을 선발합니다. 그런데 그는 전혀 경험 없는 신출내기 병사였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 참으로 부족하고 경험도 미천한 저를 리더로 뽑아주셨으니 이제부터는 저를 믿고 제 말을 따라주십시오!’ 이 말과 함께 그는 모두에게 ‘꼼작 말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있으라.’ 당부한 뒤에 재빨리 주위를 살펴 근처의 제일 큰 나무위로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나무 꼭대기에서 산의 정상을 바라보며 어디로 가야할 지 방향을 정하고는 밀림 속 현 위치에 있는 병사들에게 외칩니다. ‘우현 한 시 방향으로 1km 나아가라!’ 그들은 그의 말에 따라서 각자 역할을 분담하여 밀림 속 수풀을 헤치며 나갈 수 있도록 상호 협동하면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시시각각으로 닥치는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며, 나아갑니다.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일심동체가 되어 ‘으쌰 으쌰’하며 그의 말대로 1km쯤 나아가다 늪을 만나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뒤에서부터 이미 앞서 길을 내고 간 병사들을 뒤 쫒아 그들의 후미로 다가갑니다. 그리고는 다시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꼼작 말고 그대로 서 있으라.’하고 당부한 후에 또 다시 그 근처의 가장 높은 나무로 올라가 소리칩니다. ‘좌편으로 비스듬히 열한 시 방향으로 20여 미터를 가다가 다시 오른편 두시 방향으로 나아가라!’ 그렇게 길을 내가면 다시 뒤로 접근해 가고 그곳에서 다시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병사들이 가야 할 정확한 방향을 알려줍니다. 밀림 속 척박한 환경 속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상대의 힘을 북돋우며 협력하여 한 순간씩, 한 걸음씩 어려움을 극복하며 나아가다, 병사들은 소리가 들리지 않을만한 거리까지 갔을 때, 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뒤에서 나는 소리를 따라 방향을 새로이 설정해 나아가기를 계속합니다. 그렇게 나아가다 결국 그 병사의 무리는 함께 정상에 이르게 되었고 그곳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승리의 춤을 추며 환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치 밀림 속을 헤쳐 산의 정상을 향해 가듯, 시온의 정상을 향해 가는 우리네 인생도 후자와 같은 리더십으로 인도되어야 정상에 이르러, 기뻐 춤추며 승리의 새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전자의 경험 많은 베테랑 리더는 이전에 자신의 ‘기억에만 의존’한 리더입니다. 그는 과거에 경험했던 기억에 의한 ‘지식에 의존’했던 리더로 결국 밀림 속 난관을 헤쳐 나가지 못하고 대원들 모두를 지쳐 쓰러져 죽게 만들었습니다. 반면 경험이 없는 신출내기 리더는 ‘지혜에 의존’한 리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순간의 번뜩이는 지혜로 나무위로 올라가 멀리 도달해야 할 정상을 바라보며, 현 위치에서 어떻게 밀림 속을 헤쳐 나가야 할 지 방향을 지시함으로써 모두 함께 정상에 이르러 기뻐 춤추며 생명의 합창을 부르게 만들었습니다. ‘지식에 의존했느냐’, 아니면 ‘지혜에 의존했느냐’의 차이가 승리와 실패를 갈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식’과 ‘지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과거의 기억이 모아지고 경험이 축척되며 여러 날 배움으로써 ‘지식’이 되는 반면에, ‘지혜’는 하늘로부터 그 순간에 주어짐으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차원인 지식과 하늘의 차원을 지니는 지혜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차이만큼 크게 차별된다 할 수 있습니다. 배운 적도 없고 이런 경험도 없지만, 영적 교통과 감성적 교통을 통하여 하늘 위에서 주어지는 지혜를 따라 순간의 번뜩이는 슬기로,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하늘로부터의 신 령(神 靈)과 진리의 영을 통해 주어지는 ‘지혜에 의존하는 자’는 땅의 차원보다 높은 곳에 올라 영적 교제를 하는 기도를 하면서, 상상하고 꿈꾸는 일들을 믿음으로 현실화시켜 나가는 자들로서 이런 자들만이 신앙의 목적지인 천국(天國) 즉, 하늘나라의 정상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지혜는 심리학의 아버지 ‘맬로우(Abraham mallow)’의 말을 빌리자면 ‘지고(至高)의 경험’이라 칭합니다. 말하자면 지극이 높은 곳인 하늘로부터의 ‘지고의 경험’에 의한 ‘지고의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높은 나무 위와 같이, 땅의 높은 곳, 성루와 파수하는 높은 곳에 올라선 지도자는 자신의 과거의 기억과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진리의 영과의 영적 교통과 감성적 교감을 통하여 주어지는 지혜와 믿음에 의존하며 기도에 의존하는 참된 지도자입니다. 이런 참된 지도자가 되어야 상황에 따라 시의적절하게, 가야 할 방향을 지시해주면서, 밀림 속과 같은 이 땅의 척박한 현실속의 난관을 극복하고 나아가게 함으로써 시온의 정상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이처럼 지혜와 믿음에 의존하는 지도자가 양들을 기뻐 춤추게 하며 시온의 정상에서 함께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하는 참된 지도자로서 이 시대가 요청하는 예수 사랑 리더십으로 충만한 자들입니다.
이사야 본문에 말씀하시는 것처럼 ‘너희 뒤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것이 정로(正路)니, 너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지시한 방향(方向)을 향해 나아가라! 그 생명의 정로를 멈춤이 없이 가다보면 하늘을 향해 가는 이 길의 끝에서 천국(天國), 하늘나라의 실재를 보게 될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 뵙게 될 것이다. 샬롬의 실상을 접하는 영원한 영광의 축복을 얻게 될 것이다’(사30:15-22).
이제 하늘의 지혜에 의존하여 샬롬의 정로를 발견하여 나아갈 분명한 방향을 설정한 자들이 명심해야 할 이솝의 우화가 있습니다. 너무나 유명하고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목표점에 먼저 도달하여 경주의 승자가 된 자는 바로 거북이였습니다. 짧은 다리와 등판 등, 느려 터질 수밖에 없는 거북이에 비해 달리기에 적합한 신체구조를 가지고 깡충깡충 잘 달리는 토끼가 그 경주에서 진 것은 지극히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토끼는 목표를 잃어버리고 거북이만을 보고 달리며 승부에 집착해 있는 동안, 거북이는 목표를 향해 멈추지 않고 ‘비비적거리며’ 계속 나아갔기 때문 이었습니다. 지혜에 의존하여 샬롬의 정로를 향해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고 가는 우리가 시온의 정상에 이르기 까지 가슴속에 새겨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격언이 있습니다. ‘느린 것을 두려워 말고, 멈춘 것을 두려워하라!’
토끼는 목표를 보지 않고 비비적거리고 가는 듯 마는듯한 거북이의 안간힘 쓰는 모습이 가소로웠을 뿐이었습니다. 재능과 역량은 뛰어났지만 토끼는 그만 가야 할 방향과 목표를 잃어버리고 승리에만 관심이 있어 승부욕에 집착하는 가운데 상대의 가소로운 모습에 그만 교만을 떨다가 낮잠을 자게 되어 ‘멈추어 있다’가 경기에 지고, 정상에 서지 못하는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반면 거북이는 토끼가 와서 무어라 비아냥을 하고 모욕해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를 보지 않고 오직 가야 할 목표에 집중하여 ‘비비적 비비적, 비비적 비비적...........비비적 비비적, 비비적 비비적’대며 ‘멈춤이 없이’ 나아갔습니다. 참으로 한심하게 느리기는 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고개를 빼고 넣으며, 비비적대고 또 나아갔습니다. 우리도 거북이처럼 ‘느린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멈춘 것을 두려워하라’는 지금의 중국을 있게 했던 바로 그 격언과 같이 목표를 향해, 방향 설정하여 멈추지 않고 ‘비비적 비비적’ 거릴지언정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어차피 토끼와의 달리기 싸움에서는 안되는 여러 열악한 조건을 탓하지 말고, 그저 하늘의 지혜와 믿음에 의존하여 ‘앞길을 보여 주신 대로’ 밀림 속 난관을 극복하며 어찌하든지 십자가의 과정을 통과해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시온의 정상에 올라야 합니다. ‘느린 것을 두려워 말고, 멈춘 것을 두려워하라!’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소망인이여! 기억과 경험의 지식에 의존하지 말고 진리의 영의 지혜에 의존하여 살아갑시다. 꼭 필요한 매순간마다 주어지는 하늘의 지혜에 의존하여 앞길을 보여주신 대로 하늘 가는 정로를 따라 믿음으로 거북이처럼 멈춤이 없이 나아갑시다.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셔야 하는 십자가의 고난의 과정을 통과해야만 하지만 ‘비비적 비비적....비비적 비비적’ 하늘나라로 가는 거북이 춤을 추며 나아갑시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려 기뻐하면서 각자 최선을 다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살림의 역사’에 마중물과 마중 불로서의 제 몫을 감당합시다.
로고스 현관에 있는 톨라의 작품을 통한 하늘의 메시지! ‘The sky is limit! 하늘을 향하여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 척박한 이 현실이라는 땅을 디디고, 하늘을 바라보며 기뻐 춤추며 하늘 향해 한 걸음씩 걸어 나가는 소망인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어찌하든지 십자가의 고난의 과정을 극복하고 부활의 영광에 이릅시다. ‘내가 푯대를 향하여 하늘에서의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하여 달려가노니, 거북이처럼.....십자가의 산맥을 넘어 어찌하든지 부활의 영광에 이르려 하노라!’
그 날, 우리는 함께 시온의 정상에서 환희에 찬 승리의 새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지고(至高)의 지혜에 의존하여, 샬롬(shalom)의 길로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