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inexpressible)’ 말을 들었다. 사람으로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나, 부득불 그 말하지 못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도다!”(고후12:4)
‘말하지 못할 것’을 말해야만 하며,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만 하는 고충이 설교가들에게 있습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사람에게 단지 ‘이미지(image)’와 ‘상징’ 그리고 ‘유사표현’으로 밖에는 달리 나타내실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사에 대하여 말로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도 말하지 못할 말, 말 할 수 없는 말을 해야 하는 데, 그런 언어적 제약 속에서도 매번 오답(誤答)이 아닌 정답(正答)만을 말해야 하는 부담과 고충이 있다 하겠습니다. 매번 신(神)이 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령에 감동을 받음으로써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말할 까 염려하지 말라, 말하는 이는 네가 아니고, 네 안의 성령이니라.”
전하는 사람도 성령에 감동되어야만, 말하지 못할 말로서 하나님의 본래적 뜻과 의도를 전달 할 수 있는 법입니다. 동시에 받는 사람 역시 성령에 감동되어야만 하나님의 본래적 뜻과 의도를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의 만나’, 그 ‘생명의 떡’이 각자에게 주어지고 그것을 받아먹느냐 마느냐는, 받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 생명의 떡이 좋게 여겨진다면 동의함으로 그것을 선택하여 받아먹게 되나, 그렇지 않으면 거절하고 돌아서 버리고 말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참 하나님에 대해서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일의 취지에 동의하고 찬동하여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힘을 보탠다는 의미인 “참여(參與)”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의한 후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동의한 후에 순종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습니다. 순종하는 자는 참여하게 됩니다.
만고에 변치 않는 섭리대로, 하나님은 언제나 ‘순종하는 사람’을 ‘통(通)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시는 말씀에 ‘예’하고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시며 영광된 부활에 이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꿈과 소원 삼으신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를 비롯해 부활장인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과, 디모데, 브리스가, 아굴라, 스데바나, 아기야’ 등과 같은 ‘순종의 사람’, ‘참여하는 사람’을 통하여 생명살림의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며,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영광된 부활에도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고전16:10-24). 순종과 참여를 위해 기도와 성령이 꼭 필요한 법이니, 당연히 ‘기도하는 사람’, ‘성령이 흐르는 사람’을 통해 꿈꾸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부활의 약속을 성취합니다.
유사표현으로 설명된 플라톤의 ‘동굴 이야기’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동굴 속에 갇혀 보여 지는 허상인 그림자가 전부인 것같이 살아가는 수인(囚人)같은 이런 음울한 인생이 전부가 아닙니다. 동굴 밖의 새 세상에 대한 희망의 역사에 참여하여 진리에의 전향(轉向)을 결단 한 후에, 변용(變容)을 거듭하면서 동굴 밖을 향하여 순종의 발걸음을 옮기다가, 드디어 동굴 밖 태양이 빛나는 곳으로 나와 비상(飛上)하게 되는 새로운 인생이 있습니다. 꿈에 그리던 동굴 밖, 빛나는 기쁨과 찬란한 희망과 황홀한 행복을 누리는 실상의 새 나라에서의 부활의 새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전향(轉向)->변용(變容)->비상(飛上)’ 함으로써 하늘에 오르신 ‘엘리야’처럼,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는 자, 즉 그리스도에 참여한 사람은 ‘전향->변용->비상’함으로써 부활의 약속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역사란 ‘사람’이 만들어내는 살아있는 드라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도 사람이 만들어내는 살아있는 드라마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의 주인공으로 당신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고난과 환난의 뼈아픈 과정가운데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드시고, 그렇게 만들어진 하늘의 사람인 당신을 통(通)하여 그리스도에 참여케 하시고 ‘전향->변용->비상’하게 함으로써,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하십니다.
18세기, 당쟁으로 침몰해가던 조선사회를 구명하여 새 세상을 열어 보겠다는 꿈꾸는 사람들인 정약용 삼형제: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삼형제는 그의 외척으로부터 당시 조선사회 유학자들에 의해 배척되며 사학(邪學)이라 천대되던 기독교를 받아들여 하나님을 창조주요 아버지로, 예수를 구세주로 동의하여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다 1801년, 기독교인을 색출하여 참수로 처형하던 혹독한 신유박해 때, 사학죄인(邪學罪人)으로 관청에 잡혀온 삼형제의 운명은 엇갈리게 됩니다.
매를 이길 장사가 없듯이 항문이 찢어지고 찢어진 항문을 통해 창자속의 오물이 쏟아져 나와 범벅이 되는 매를 견디지 못하고 정약용과 그의 큰 형 정약전은 그만 배교(背敎)하고 맙니다.
‘그리스도교야 말로 혹세무민하는 사특한 사학(邪學)이라. 잠시나마 그리스도를 세상을 구할 구세주로 믿었던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후회하오. 이제부터라도 제사를 폐하고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는 천인공노할 저 사학죄인들을 찾아내어 엄벌에 처하고 나라의 기강인 삼강오륜을 바로 세워 국본을 바로 잡음으로서 흥왕하는 새로운 조선을 만드는 일에 힘을 다하겠소.’ 정약용과 그의 큰형 정약전은 이런 고백과 함께 관에서 풀려납니다.
‘신(神)’을 버리고 대신 ‘현실 정치’를 택하여 꿈꾸는 새 세상을 이루고자 했던 정약용! ‘그리스도에 참여’하였다가 꼭 붙잡고 절대로 놓지 말았어야 할 그리스도를 버리고, 정조 왕(王)을 선택했던 시대의 사람, 한때 그리스도의 제자인 요한으로 불렸었던 그!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수많은 실학의 정수를 집필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버리고 지식을 선택한 바로 그 정약용의 인생을 보며, 안타깝게도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간 “데마”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버리고 로마 황제를 붙잡고자 했던 가룟 유다를 떠올립니다. 또한 신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자연을 선택한 정약전의 안타까운 인생을 보며, 주님을 떠났던 부자 청년과 아홉 명의 한센씨 병자들을 생각해 봅니다.
반면 둘째 형, 정약종은 그리스도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꼭 붙들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선택합니다. 사학죄인의 죄명으로 참수받기 직전 위관의 심문을 받는 중, 정약종은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스스로 진술합니다.
‘정약종, 네 사호가 무엇이냐?’ ‘아우구스틴이다. 사호가 아니라 새롭게 태어났으니, 새 이름이다.’ ‘정약종, 너는 양반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려서 소학을 배웠고 반듯한 인성을 갖추었을 텐데, 어찌 그리 황잡한 헛것에 들려 있는가. 너의 이른바 하나님이 실재해서 세상을 주관하고 그의 아들 예수를 구세주라 하니 그런 허황된 것을 네가 증명할 수 있느냐?’
‘물론이다. 한 집안에는 가장이 하나이고, 한 고을에는 관장(官長)이 하나이고, 한 나라에도 임금이 하나이듯, 한 나라에 임금이 둘이 될 수 없는 것처럼, 한 천지에도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왕이 한 분이시니 당연히 한분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로다. 또 인간의 원조가 한 번 죄를 지은 후에 온 천하고금이 사람이 다 지옥의 무궁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사람은 지극히 천하고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시니, 지극히 천한 사람으로서 지극히 높은 하나님께 죄를 얻었으니, 그 죄를 속할 길이 없으나, 다만 한 가지 신통한 법이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높기가 하나님과 같다면 만민의 죄를 다 그 몸에 안고 벌을 받으면 비로소 속죄가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등한 본체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으로 내려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 벌을 받으셔서 이 세상 만민의 구세주가 된 것이로다.!.....그러한 그 분이 지금도 이렇게 뜨겁게 살아 계신 내 마음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다!!!’ ..... ‘저 독종을 즉시 참수하라!’ ......
정약종은 마지막 요청을 합니다. ‘칼을 받을 때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서 죽게 해 달라!’ 형리가 그의 청을 받아들입니다. ‘주여! 어서 오소서!’ 정약종은 하늘을 우러르며 칼을 받습니다. 그의 얼굴에 피어나는 웃음은 평화로웠고 큰 상을 받는 자의 기쁨으로 피어납니다. 연거푸 술을 마시고 칼춤을 추며 빙빙 돌던 망나니는 그 웃음이 무서워서 쥐고 있던 칼자루를 더듬다가 한 칼에 약종의 목을 끊어내지 못하고 두 번 칼질을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망나니의 칼을 받게 해 달라!’ 역사의 증언대로, 하늘의 별이 된 그 정약종, 아우구스틴은 너무나 평온하고 기쁨에 찬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절두(截頭)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한 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도 함께 참여하게 되리라!’ 부활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부활의 증인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단두대에서 절두된 한 순교자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큰 울림으로 남습니다. ‘내 마음을 조사해봐라.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밖에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에 참여하여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적 삶을 살았던 성(聖) 아우구스틴의 고백처럼,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관용을 베풀며, 그리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하늘의 사람이여!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끝까지,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네 마음대로 하십시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임진년 새해! 절대로 버리지 말고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우리도 끝까지 사랑하며 붙들고,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하여 거북이처럼 멈추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소망인은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끝까지, 언제나, 다함이 없이 사랑할 것입니다. 주님을 절대로 놓지 않을 것이고, 결코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결국 세상정치나 왕을 선택하여 세상으로 가게 될 터이지만, 우리는 죽을 만큼 사랑하는 주의 십자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의 십자가를 선택하여 기필코 부활의 비상을 경험할 것입니다. 결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자연을 선택해서도, 사람을 선택해서도 안됩니다. 방법이 중요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꿈꾸는 새 세상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꼭 붙들고”, 그리스도에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에 참여하여 비상해야 합니다.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오르신 엘리야처럼 천사들과 함께 그리스도처럼 하늘로 비상하여 날아올라야 할 것입니다.
소망인이 꿈꾸는 샬롬의 새 세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꿈꾸는 사람을 통하여’ 샬롬의 새 세상을 세우며 부활의 약속을 이룰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참여하여 “전향->변용->비상”하게 될 것입니다. 복 있는 하늘의 사람이여! 그리스도에의 참여로 비상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