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sus plus(+)! Logos plus(+)! 예수가 플러스 되어야 교회이고, 로고스가 플러스 될 때 참으로 교회다울 수 있습니다. 예수의 몸된 성전, 로고스가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유기적 공동체가 참된 교회입니다(요1:14). 참된 교회를 통하여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며, 하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십자가(+)는 플러스입니다. “ + ”는 마이너스가 아니고 플러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몸 된 교회에 오면 누구든지 플러스가 됩니다. 새롭게 바뀝니다. 무언가 유익된 것을 얻고 도움을 받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좋은 결과를 이룹니다. 광야의 길을 지나면 약속의 땅에 이르며, 십자가의 과정을 통과하면 필연코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아멘: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 주옵소서!, 할렐루야: 살아계신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혈루병 든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믿음으로 붙들었을 때 주님께로부터 능력이 빠져나와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마9:19-21)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늘의 것을 주셔서 받는 일도 있는 가하면, 혈루병 여인의 경우처럼 하늘의 능력을 믿음으로 끌어내오는 일도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지성소의 휘장이 찢겨져 이 땅에 사는 우리가 하늘 아버지께 직고(直告)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써 이 땅으로부터 하늘로 통하여 상달되는 길이 뚫렸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14:6)
이제 우리 소망인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늘에 상달되어 응답됩니다. 산제물로 드려지는 우리의 예배도 하늘에 상달되어져, 놀라운 은총을 내려 주십니다. 우리, 두 세 사람이 있는 그 곳이 교회입니다(마18:15-22).
동아일보의 ‘다시 빛과 소금으로’코너에 소개 될 교회로 우리 과천소망교회가 섭외되어 인터뷰를 하게 되면서 깊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어떤 교회이어야 하는가?”
“우리 교회는 이 시대, 이 난국에 과연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
“예수 +”, “로고스 +” 교회는 “사랑의 둥지”이어야 하지 않을 까? “줄( )탁(啄)동(同)시(時)!” 어미 새가 “톡 톡 톡” 신호를 보낼 때, 알속의 살아있는 새끼가 “톡 톡 톡”반응하며, 밖의 어미는 바깥 껍질을 깨어주고, 안의 새끼는 안막을 스스로 찢고 나오는 오묘한 생명의 섭리! 이렇게 신비롭게 예수 사랑으로 알을 부화시키고, 말씀의 먹이로 새끼를 키워 양육하고 하늘의 제왕인 독수리와 같이 성장, 성숙되게 만들어 비상하게 하는 그런 일, 즉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들을 만드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는 하늘 아버지와 어머니인 교회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참된 교회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낳아 키우고, 그들로 세상에 나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위대한 일, 세상을 움직이는 일을 만들어 가는 ‘과정(過程)’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광야의 과정, 십자가의 통로를 통과해야만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이를 수 있고, 하늘의 뜻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칼레 시민의 동상이야기에 얽혀있는 이야기가 이러한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합니다. 1347년,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영국에서 가장 가까운 프랑스의 ‘칼레’시부터 공략했습니다. 이 작은 성이 완강히 저항하다 1년여 만에 항복의사를 전해오자, 왕은 그동안 대영제국의 명예를 실추시킨 칼레의 전주민을 몰살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항복을 청해온 주민을 몰살했다는 소문이 전해지면 프랑스 본토의 나머지 성들의 저항이 격렬해질 것이라는 한 신하의 진언으로 인해 왕은 칼레의 시민 중 6명만을 처형하기로 결정합니다.
‘칼레’시는 대량학살을 면했다는 소식에 안도했으나, 어떻게 6명의 희생자를 골라야 하나를 고민하다 ‘제비뽑기’로 정합니다. 이때 한 지도자가 강력히 반대하고 나서며, ‘만약 희생자를 제비뽑기로 정한다면 운이 없어 제비를 잘못 뽑아 죽은 것이 되니, 우리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자원의 방식으로 희생자를 선발해야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먼저 자원하겠습니다.’ 이 영웅적인 연설에 고무된 사람들이 ‘저요, 저요’하며 손을 들어 순식간에 6명의 지원자가 다 차게 되었습니다. 그 6명을 형상화한 것이 ‘칼레시민의 동상’이라는 로뎅의 작품으로 남게 됩니다.
우리는 이 동상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뎅이 10년을 투자해 완성한 이 작품 속에 칼레시가 부탁한 호기로운 영웅들의 모습과 전혀 다른, 나약하게 떨고 있고, 울고 있는 사람들이 조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로뎅은 ‘우리를 움직이는 일’, ‘세상을 움직이는 위대한 일’이 만들어 지는 ‘과정’을 통찰하여 작품화 하였습니다.
영웅적인 연설에 고무되어 ‘제가 모두를 위해 죽겠습니다.’하고 자원을 한 후, 그들은 죽게 된다는 사실과 두려움에 나약해졌고, 자원하게 된 것을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그저 속수무책의 패닉상태에 빠져있을 수밖에 없는 ‘죽기직전의 순간’은 호기어린 영웅들의 모습이 아닌, 연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는 바로 그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런 ‘흔들림’속에서도 결국은 극복하고 갈등과 고뇌의 터널을 빠져나와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냈다는 그 사실이 위대하다 하겠습니다.
죽음이 너무 두려워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합니다. ‘내가 정녕 맹세하여 가로되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하자 닭이 울기 시작합니다. 두려움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예수님의 말씀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하리라’하는 말씀이 그제야 생각이 난 베드로가 통곡(痛哭)을 합니다. 통곡하는 베드로의 모습, 이런 ‘흔들림’속에 기적을 만드는 힘이 꿈틀거리며 숨겨져 있다니 놀라울 뿐입니다. 마치 바람이 세차게 불어줘야 흔들리는 줄기로 인해 뿌리가 힘을 키우듯, 위대한 일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도 ‘흔들림’이란 절대 필요한 절차라 생각됩니다.
나약함과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기에 통곡밖에 할 수 없었던 베드로! 그러나 그 순간이야말로 베드로에게는 정녕 반석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며, ‘통곡’이야 말로 하나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아이의 울음’이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를 위해 죽으리라’ 자원한 6명의 칼레시민들이 두려움에 흔들리며 고뇌에 빠져있는 처절한 모습, 그러면서도 형장을 향해 뚜벅뚜벅 걷는 그들의 걸음! 새벽닭 울기 전, 세 번이나 주를 부인하고 통곡하는 나약한 인간의 절규, 그러나 끝내 복음을 위해 순교한 큰 사도 베드로! 이들의 ‘흔들림’과 ‘통곡’을 보며 ‘인간사 시련은 있을 수 있으나, 실패는 없다’는 크리스천들의 부러지지 않는 유연한 몸짓에서 희망을 봅니다. ‘흔들림’과 ‘통곡’은 거듭 낳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풀릴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 뵈면 도움을 받습니다. “예수 플러스(+)”, “로고스 플러스(+)”된 교회를 통하여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안에서 모든 것이 합(合)하여 결과가 좋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헬라 문화의 옷을 입고, 유대의 국지적인 종교에서 세계적 종교로 발돋움 하여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낸 로고스 플러스 교회처럼 과천소망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합니다. 문턱 없는 마음병원으로서 복음 선포와 치료의 기능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참된 교회로서 생명살림 역사를 이룹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로 변화되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로고스 플러스(+) 교회는 사랑의 둥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