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담대하라!’ 폭풍(暴風)은 복풍(福風)이 될 것이라!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도 물이 너를 함몰치 못할 것이며,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도 불이 너를 사르지 못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도우리라 인도하리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와 함께 할 것이라.’(사41:10, 43:1-7)
고난의 산맥을 넘고 환난의 준령을 오르면서 참 교회와 거짓교회, 알곡 신자와 가라지 신자, 진짜 소망인과 가짜 소망인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고 승리하기로 결판’(창3:15)난 싸움을 싸우고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입니다. 생명살림역사의 주역인 소망공동체는 ‘서로 다른 우리(we)가 모여 하나’가 된 영원토록 함께 할 약속의 가족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연후에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법입니다. 죽음의 불안과 맞서서 극복해야 합니다. 피하지 말고 정면 대결하여 영원한 생명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구원이 주께 있사오니, 찬양과 영광과 존귀와 부와 능력과 지혜와 힘’이 되신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환희의 새 노래를 부르는 흰옷을 입은 자들로 승리하는 소망인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계7:9-17)
앙스트 블뤠테! 죽음의 불안과 정면대결하여 불안의 꽃을 피웁시다. 귀머거리로 불후의 명곡 ‘symphony no.9’ ‘환희의 찬가’를 만든 악성(樂聖) 베토벤 같은 울림 있는 인생을 살아갑시다. 그리스도를 본받은 사도 바울 같은 울림 있는 인생을 살아갑시다! 십자가의 환난과 고난을 통해 앙스트 블뤠테! 부활의 꽃을 피우신 울림 있는 그리스도의 인생과 같은 울림 있는 인생을 살아갑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환난과 고난을 당할 때 육체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 치셨지만 ‘다 이루었다’하시는 그 순간의 환희와 감격과 행복감 또한 극치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오묘한 극적 영혼의 오묘한 모습과 표정을 그려봅니다. 그 순간의 그리스도의 얼굴은 어떠했겠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뒤따르는 그리스도와 하나 된 우리의 얼굴 모습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얼굴은 80개의 근육으로 7000여개의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 냅니다. 신체 중에서 가장 많은 근육으로 감정을 표현해내는 특별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마음을 불편 없이 표현해 냅니다. 지나간 기억속의 표정을 재구성해 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얼굴을 보면 대충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40대가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첫인상으로 한사람의 이미지가 결정될 수도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인간관계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자신은 물론 타인과 사회를 위해서도 표정은 관리되어야 합니다. 더없이 중요한 역할을 해내는 얼굴은 우리말의 의미로 ‘얼’은 영혼을, ‘굴’은 통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눈썹으로부터 턱밑까지의 구간은 영혼이 드나드는 통로입니다. 멍한 사람을 보고 ‘저사람 얼빠진 것 같다’라는 말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얼굴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얼굴은 정직합니다. 시나리오를 배경으로 꾸며나가는 연기자들의 표정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얼굴모습은 다릅니다.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가 평창으로 결정되는 순간, 유치위원들의 얼굴을 중계화면을 통해 보게 되었습니다.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한순간의 표정들, 보는 이들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꾸밈없는 영혼의 위대한 연출을 보았습니다. 온갖 상념이 교차하는 숨 막히는 그 짧은 순간, ‘개최지는 피~용 창!’ 외국인의 어눌한 발음으로 발표되는 이 한마디에 터지는 봇물을 표현해 낼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말이나 글이 아닙니다. 표정밖에 없습니다. 김연아 선수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까지도, 환희의 표정을 만들어 내는 분장이며 소품이 아닙니까. 그곳엔 대통령도 그룹사 회장도 선수도 말단사무직도 없습니다. 서로 신뢰하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며, 그래서 너와 나가 아닌 ‘우리’만 있을 뿐입니다.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순간, 자기기준으로 자기와 다름을 ‘틀림’으로 비하하지 않는 순간, 이를 ‘우리’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로 다른 우리는 하나입니다. 극심한 가뭄으로 오리 두 마리와 거북이 한 마리가 가족처럼 지내는 작은 연못의 바닥이 드러났습니다. 오리야 훨훨 날아 산 너머 호수를 찾아가면 된다지만, 날 수 없는 거북이는? ‘너와 나는 가족이니, 날 데리고 가줘’ 간청하는 거북이가 마음에 걸립니다. 거북이걸음으로는 산을 넘기는커녕 얼마 못가 죽을 것 같습니다. 궁리 끝에 오리 두 마리와 거북은 함께 떠날 방법을 찾다가 단단한 나뭇가지를 구합니다. “우리가 양쪽 끝을 꼭 잡고 있을 테니, 거북이 네가 나뭇가지를 입으로 꽉 물고 있으면 너를 데리고 산을 넘을 수 있을꺼야. 그렇지만 명심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입을 벌려서는 안 돼. 그러면 너는 떨어져 죽는거야.” 다음날, 산 너머 호수를 향해 살아남기 위한 여행은 시작되었습니다. 산기슭에 이르자 산 아래 마을이 보입니다. 오리 두 마리가 거북이를 달고 위태롭고 힘들게 하늘을 나는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제각기 수군거립니다. “별 희한한 일도 다있네, 저 거북이 우스꽝스런 꼴 좀 보게. 어어 저러다 떨어지지” 흘려듣기만 하던 거북이도 계속 손가락질하며 비아냥거리는 그들을 향해 한소리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끝내 참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나뭇가지를 더욱 힘주어 꽉 뭅니다. 훗날 산 너머 호수에서 신랑거북을 만나 영원토록 해로할 것을 꿈꾸며.... 그 순간 오리와 거북은 없습니다. 다만 산을 넘어가야하는 ‘우리’가 있을 뿐입니다. 여러 종류의 것이 녹아 합쳐지는 ‘융합’을 보며, 예수와 하나 된 크리스천들의 승리하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 소망인은 예수의 얼굴을 지닌 크리스천들은 하늘을 나는 거북이가 아니겠습니까?
‘피~용창!’의 그 순간, 나와 너, 대통령도 회장도 말단직원도 없이 그저 ‘우리(we)’만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과 하나 된 ‘우리’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융합되어 하나 된 ‘우리’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로만 환난의 산을 넘어 영원토록 사는 그곳으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우리’가 누구입니까? 그 ‘우리’란 바로 성경이 증언한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보혈의 피로 정결케 되어 흰옷을 입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환희의 찬가를 부를 승리한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우리 소망이이여! 거북이처럼 입으로 성령의 나뭇가지를 더욱 힘주어 꽉 물라! 놓치면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꽉 물라!’
말을 섞을 필요도 없습니다. 논쟁할 필요도, 변명할 이유도 없습니다. 손가락질하며 비아냥 거렸던 자들들 향해 ‘노아’처럼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면 될 뿐, 그 비아냥거리는 소리에 흔들릴 아무런 까닭도 없습니다. 노아가 산 중턱에 배를 만드는 일이나 오리들이 거북이를 달고 하늘을 나는 일이나 비슷한 류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입으로 나뭇가지를 꽉 무는 순간 오리와 거북이는 하나가 됩니다. 오리와 거북은 없고 다만 산 너머 호수로 가야하는 우리만 있을 뿐입니다. 그저 입으로 성령(聖靈)의 나뭇가지를 꽉 물고 있으면 성부(聖父) 오리와 성자(聖子) 오리가 산 너머 영원의 세계, 하나님의 보좌 앞까지 데리고 갈 것입니다. 입으로 꽉 물고, 주목하고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의연히 묵묵하게 제 할 일을 하면 됩니다. 더욱 힘주어 꽉 물라! 그 순간 오리와 거북이가 하나가 되듯이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입을 벌리면 떨어져 죽습니다. 더욱 더 힘주어 꽉 물라!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가 되도록 더욱 꽉 물라! 하나 된 우리의 승리하는 모습을 보라! 새 노래 환희의 찬가를 부를 하나 된 우리! 소망인의 승리하는 모습을 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