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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역설적 차원의 세계에서 열린 긍정의 자유로 결단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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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逆說的) 차원의 세계에서 열린 긍정의 자유로 결단(決斷)하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니. 내게 와서 배우라. 자유하라, 내 짐은 쉽고 가벼우니라.’
주님 앞에 마른 막대기 같고,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은 나는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 그슬린 나무 같고, 타다 남은 재와 같은 나는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 한 줌 흙으로 와서 죄악 속에 뒤엉켜 살다가, 늙어지고 병들어 허무에 굴복하는 나는 무엇입니까? 대체 사람이 무엇이관대 나를 생각하시고, 인자가 무엇이기에 긍휼을 베푸시나이까? 할렐루야! 주의 은혜와 사랑 앞에 감사와 영광과 찬송을 드립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고 찬송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며 인생의 목표입니다.
주의 십자가 앞에 모든 것들 다 내려놓습니다. 지난 잘못을 용서하소서. 생각과 마음을 바꿔 최선을 다하기로 결단하게 하소서! 기쁘고 즐겁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여 필연코, ‘달래’처럼 이문을 남기게 하소서! 주의 생각과 마음과 일치될 때, 십자가는 깃털같이 가벼워지는 법입니다. 또 다른 새로운 차원의 사명의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인도할 것이라.’(롬8:1)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노라.’ 정보의 눈, 과거의 눈으로 보지 말고 성령의 눈, 사랑의 눈으로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안의 우리는 함께 가야 할 곳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하늘을 본향삼고 이 땅을 살아가는 나그네요, stranger 입니다. 보냄 받아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소풍처럼 설레임 속,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 세상의 낯선 삶의 끝에서 하늘로 돌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귀천(歸天)의 삶을 사는 나와 당신은 돌아갈 곳이 있는 행복자입니다. 할렐루야! 이 세상의 현실 속, 아무리 험악한 고난과 처절한 고통과 절박한 위기 속에서도 하늘 본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자의 가슴에는 영원의 여유와 샘솟는 즐거움과 기쁨과 찬양이 충만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저녁 노을 산기슭에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었다 라고 말하리라’-천상병 귀천(歸天)
이 세상 소풍 길을 살아가는 인생에는 이런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땅에 속한 자가 있고 하늘에 속한 자가 있으며, 이성과 논리의 세계에서 사는 삶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세계, 믿음의 세계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자들의 삶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즉 신의 세계에는 이성은 들어갈 수가 없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천지창조, 동정녀탄생,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영생, 천국..!! 이성과 논리로는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머리를 겨냥하고, 상대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다니는 길과 같이 하나님이 다니시는 ‘복의 통로’가 있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이 세상 사람의 삶에 이성과 논리의 세계와 전혀 차원이 다른 별세계(別世界)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삶에는 역설적 차원의 또 다른 내면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바로 이곳에서 부지중에 ‘낯설은 모습’(alian)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들, 천사들을 영접해 하늘의 축복을 얻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추측과 상상력을 활용하여 열린 긍정의 자유로 문자주의와 축자주의를 벗어나 선한 행위를 결단해야 합니다. 지혜롭고 일하기를 즐기는, 충성되고 자유하는 종으로 주신 것을 30배, 60배, 100배로 불리는 방법을 생각해 냄으로써 달란트의 이문을 남기어 자신과 주변을 살렸던 복된 ‘달래’가 되어야 합니다.
‘천하만국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아브라함!’,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증거인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실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대단했던 아브라함!, 그는 이성과 논리로서가 아니라 죽음을 무릎쓰고 가족의 몰살 위험에도, 역설적 차원의 내면의 세계에서 낯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으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결단을 하고, 결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들처럼 많은 자손을 주실 것이라는 역설적 차원의 또 다른 내면의 세계 속의 확신에 찬 소망으로 24년 동안, 이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절대 곤고와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않고 결단의 삶을 살았던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이성과 논리의 세계가 아닌 역설적 차원의 또 다른 내면의 세계가 확고했던 참으로 대단한 믿음의 대장부였습니다. 그가 역설적 차원의 별세계에서 낯선 세 사람을 만나 복에 복을 더하였습니다(창18:1-18).
우리도 ‘하늘의 통로’요 ‘축복의 통로’인 그곳에서만 아브라함이 만났던 세 사람, 낯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부지중 천사를 만나 이 땅에서 얻을 수 없는 것들을 하늘의 선물로 선사받고, 이 세상에서 고칠 수 없는 것들을 고칠 수 있게 되는, 위로부터의 신기한 초월적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네가 내년 이맘때에 아들이 있을 것이라, 아들을 이삭이라 하라.’ 피~식, 코웃음 쳤으나, 이삭을 품에 안고 감격에 겨워하는 사라와 함께 아브라함처럼 복에 복을 주신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의 삶에는 역설적 차원의 또 다른 내면의 세계가 있습니다. 과연 그러합니다. 역설적 차원의 별세계가 있습니다. 이 별세계의 역설적 진리로 결단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위기가 기회입니다. 폭풍이 복풍(福風)이 됩니다. 약하나 강합니다.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삽니다. 할렐루야! 이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됩니다. 시온산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승리의 노래를,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새 세계가 도래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렐루야!’를 부르는 가운데 결심하고 결단함으로 결정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역설적 차원의 세계에서 역설적 진리가운데 열린 긍정의 자유로 결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말입니다.
옳은 결정은 ‘금’이고, 잘못된 결정은 ‘은’이요, 아직도 미적대고 결정하지 못하는 것은 ‘똥’입니다. 옳은 판단으로 옳은 결정은 최상의 좋은 것입니다. 비록 잘못된 판단으로 옳지 못한 결정이라도 은처럼 좋은 것입니다. 옳지 못한 결정, 틀리고 잘못된 결정이 차선(次善)으로 좋을 수 있는 까닭은 결정하여 실행했기 때문입니다. 똥 같은 것, 결정하지 못한 채 아직도 망설이고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는 것보다 천만배 좋은 것입니다. 아직도 결정하지 못한 채 미적대고 있는, 그런 쓸모없고 바보천치 같은 똥 같은 것보다 나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된 결정을 하고 난 후, 다시 수정 보완아고 개선하여, 잘못된 것으로부터 ‘성공에서 배우는 둘’ 보다도 ‘실패에서 배우는 훨씬 더 많은 여덟’을 통해 앞으로 더 잘 할 수 있는 확고한 토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럴까?.., 저럴까? 차라리 안할 까?... 어떠한 결단도 못내려 결정하지 못하는 것은....??? 당신은 어떠합니까? 계속 이성과 논리의 감옥에 갇혀 계산만 하고 있습니까? 생명살림의 대역사, 역설적 진리의 별세계, 믿음의 신세계에서 할렐루야만을 외치며 아직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결정을 미적 미적대고 있습니까?... 똥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직도 결단하지 못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까요?
왜 부흥이 안될까?의 부정적 이유를 찾고 그 원인을 규명하려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부흥이 잘 될까’를 열린 긍정의 마인드로 찾으라 했습니다. 혹독한 위기, 절박한 고난, 절대 절망 속에 작품을 완성한 세기의 감동적인 명곡 ‘헨델’의 메시야 중 ‘할렐루야’를 가슴으로 들으며 역설적 차원의 별세계에서 지금 무엇을 결단하시렵니까?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역설적 차원의 세계에서 열린 긍정의 자유로 결단하십시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