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해 따라 살아가듯이, ‘주바라기’ 주 따라 살아갑니다. ‘해바라기’, 태양으로부터 빛과 열에너지를 받아 광합성 생명작용을 하듯, ‘주바라기’, 진리의 태양으로부터 참 빛과 영원의 에너지를 받아 ‘새사람으로 수술’되며, 새 생명의 역사를 이룹니다. 의미를 알게 하는 ‘참 빛’과 영원한 생명의 ‘열에너지’를 선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활동력이 있습니다.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수술하며, 생각과 마음과 뜻을 새롭게 함으로써 새 생명의 역사를 이룹니다.’
누구나 올수 있으나, 아무나 오지 못하는 은혜의 전당! 고귀한 이곳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라 하십니다. 그리고 항상 깨어 있으라 하십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깨어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는 너희를 향한 주님의 뜻 이니라!’(살전5:16-18). 권리이자 동시에 의무이기도 한 고귀한 일!, 깨어 기도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에게 주님으로부터 더욱 더 큰 사랑이 베풀어집니다.
사랑받는 개는 주인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개입니다. 반갑다고 꼬리치고 뛰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개를 싫어할 주인은 없습니다. 물론 사람을 개에 비유할 수 없지만, 나를 좋아하고 기뻐하는 사람에게 사랑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기뻐하고 좋아하며 감사하는 자에게 더욱 더 지극한 사랑을 베푸시기 마련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었는데, 치유 받은 문둥병자 열 명중, 사마리아인 한명만이 주님을 찾아와 감사했습니다. 누구에게 더 사랑을 베푸시겠습니까....
그리고 깨어 있어야 무지개를 봅니다. 무지개는 건조한 날에는 볼 수 없고 비가 와야만 봅니다. 자는 사람은 비가 오는지, 무지개가 뜨는지 전혀 모릅니다. 욥이 의인의 대명사가 된 것은 그 혹독한 고난 중에도, 깨어 정결한 기도를 하였고, 감사함으로 포악을 행치 않았으며, 기쁨으로 하나님만을 한사코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바라기의 기쁨으로 항상 깨어 기도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천형이라 불렸던 한센병, 문둥병자...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의 병으로, 날로 썩어져 부패해가는 ‘문둥병’은 무섭습니다. 실로 더 무서운 ‘영적 문둥병’도 있습니다. 기뻐하지도 감사하지도 못한 채, 은혜와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양심에 화인 맞아 썩어져 가는 불쌍한 영혼의 사람들도 치료의 광선으로 치유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고침 받아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수많은 병자 중, 특별히 은총을 입은 열 명의 문둥병자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희 몸을 마을에 있는 회당의 제사장들에게 보이라!’ 그 병을 치유하는 방법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일, 제사장에게 그들의 몸을 보이기 전, 마을사람들이 접근하지 말라고 던지는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말씀에 순종하여 가까스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한걸음, 또 한걸음 말씀에 순종하여 가다보니, ‘어~ 이런 일이~눈썹이 다시 나고 없어졌던 손가락이 생기며, 뭉개졌던 흉해진 콧망울이... 다시 회복되어 온전케 되는 놀라운 초월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창조되었고...’ 주의 말씀은 ‘제 1의 창조적 기능’을 지닙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을 따르는 순종은 ‘제 2의 창조적 기능’을 갖습니다. 순종함으로써 잃어버린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그러나 열 명의 문둥병자들에게 있었던 참으로 감사한 일 후에 발생한 사건을 우리는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합니다. 은혜를 입어 치유 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 중에 사마리아인 한명만 다시 주님께 찾아와 주님을 바라보며 감사했습니다. 은혜를 저버린... ‘나머지 9명은 어디 있느냐...?’ 저주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 새 삶을 살게 하신..., 그 은혜에 감사하여 보답하는 참된 감사의 삶, 사명의 인생을 살지 못하고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제 멋대로의 인생을 살아가며 망하고 맙니다. 주님께 감사하고 기뻐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그들, 세상에 얽히고 설켜서 세상 낙(樂)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자들을 주님이 사랑하실 리가 만무합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이렇게 우리도 얽혀서 천년만년 살아보세.’-이방원의 하여가에 답하는 정몽주의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충신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습니다. 하늘의 충신도 그러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주바라기’도 하나뿐인 주님, 한 주인만을 섬기며 한사코 사랑합니다. 한분만을 한사코 바라봅니다. ‘하나를 주셨기에 하나로 족합니다. 하나 안에 열도 백도 천도 영생도 있기에 둘은 잊었습니다. 오직 하나뿐인 한분 주님! 주님만을 한사코 사랑하며, 주님만을 한사코 바라봅니다.’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명작, ‘큰 바위 얼굴’이 생각납니다.
미국의 한 산골마을 깊은 계곡 큰 바위에 사람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습니 다. 그 마을 사람들은 저 큰 바위 얼굴을 쏙 닮은 사람이 나타나 새로운 행복 의 세상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된 예언이 실현될 것’을 믿고 기다립니다. ‘어니 스트’라는 어린 소년도 매일 몇 시간씩, 자신의 유일한 스승이었던 자애롭고 준엄한 모습의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학수고대합니다. 그 얼굴로부터 수많은 깨달음과 영감을 느끼며, 저 얼굴의 모습을 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던 중, 그 마을출신으로 돈 많은 부자 사업가 ‘개더 골드’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을사람들은 그가 ‘큰 바위 얼굴’일 것이라 희망했지만 돈만 아는 그는...그 얼굴의 주인공이 아니었습니다. 몇 해 후에 이번에는 싸움을 잘하는 장군인 ‘블러드 앤드 썬더’가 금의환향했지만 자애심이 없던 그도.. 뭔가가 부족했습니다. 그 후, 오랜 후에 말 잘하는 정치가, 대통령 후보인 사람, 올드 스토니 피즈가 돌아옵니다. 마을사람들은 그가 ‘큰 바위 얼굴’ 일 것이라는 흥분 속에서 그를 바라봤으나 그도... 자신의 야심을 이루기 위한 한갓 정치꾼에 불과했습니다.....그 사이 어니스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사가 되어 진리의 복음을 선포하며 성화의 삶을 성실히 살아갔습니다. 선행과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는 설교가로서 감동과 사랑을 베풀며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오래지나 인격과 품성이 존엄해진 사람으로 백발이 성성해진 어니스트...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큰 바위 얼굴’일 것 같은 시인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 시인 역시.......아름다운 시와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던 그 시인이 노을을 배경으로 큰 바위 얼굴을 뒤로하고 서있는 어니스트를 보며 감탄스레 말합니다. ‘아~ 보시오. 보시오.. 저 모습....저 어니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이 아닙니까....’
바라봄의 법칙과 축복! 하나님을 한사코 바라보는 자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낙원에 들어갈 것입니다. 노아, 욥, 모세, 여호수아,. 다윗.. 베드로, 도마, 바울 등..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바라보며 ‘짝짝~짝, 박수치고 응원 격려하고 있습니다. 너희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들이여! ‘주님을 바라보라!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주님을 주목하라! 징계와 고난 속에서 의와 평강 그리고 거룩한 성화의 열매를 맺어 영광을 돌리라!’(히12:1-16)
올해 제86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 ‘매튜 매커니히’의 수상소감처럼 ‘우러러 볼 수 있는 존재 되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러러 보고 또 보고 또 보고...한 걸음씩 나아가면 누구나 꿈꾸는 것을 이룰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삶을 사는 사람마다 하나님을 꼭 빼닮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약속대로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깨어 기도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며 주님의 사랑을 덧입으며, 하나님만을 한사코 바라보는 자들은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또 하나의 보내신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말씀대로 장대에 달아맨 구리 뱀을 바라본 자마다 치유되어 살아났습니다. 깨어 기도하고, 약속의 무지개를 바라보며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뻐하며, 더욱 더 감사하는 행복한 삶을 살아갑시다.